Splash of the Year 2023
Splash of the Year : 한 해를 조각내 음악 신의 주목할 만한 사건을 뽑는 이즘 내 연례 행사
끝나지 않는 걸그룹 전성시대
작년 대단히 이례적이었던 ‘걸그룹 르네상스’는 올해도, 아니 어쩌면 올해 더욱 화려하게 타올랐다. 뉴진스부터 아이브, 르세라핌, (여자)아이들, 에스파까지 정상급 걸그룹들은 한 해 내내 음원 차트 상위권을 지배했고, 수많은 중소 걸그룹들 역시 저마다의 매력으로 인상적인 성과를 일구어냈다.
수많은 걸그룹들의 대격돌 속에서도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뉴진스의 성취다. 작년 < NewJeans 1st EP ‘New Jeans’ >의 거대한 신드롬과 함께 국내 음악계를 말 그대로 ‘정복’한 뉴진스는 올해 또한 그 기세를 뚜렷하게 이어갔다. 해가 바뀔 즈음엔 ‘Ditto’ ‘OMG’를 연이어 크게 히트시키더니, 올여름 EP < NewJeans 2nd EP ‘Get Up’ >에는 드럼 앤 베이스(Drum and Bass), UK 개러지(UK Garage), 볼티모어 클럽(Baltimore Club) 등 최전선에 있는 사운드를 적극 대동, 절정의 감각을 거듭 과시했다.
올해 첫 정규 앨범을 발표한 아이브와 르세라핌의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아이브는 기존 문법을 강화한 ‘I am’, K팝의 고전적 이데아를 계승한 정규 앨범 < I’ve IVE >로 정통성을 확보하기도, ‘Kitsch’와 ‘Baddie’에서의 시도로 새로운 경로를 모색하기도 하며 대중적 성공과 음악적 도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쟁취했다. 작년 ‘Antifragile’로 재기에 성공한 르세라핌은 복귀작 ‘Unforgiven’으로 작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지만 앨범의 킬링 트랙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가 타이틀 대신 그룹을 강하게 견인하며 결코 부족함 없는 결과를 얻었다. 이어 조금 다른 문법의 ‘Perfect night’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기까지, 르세라핌에겐 예상치 못한 선물로 가득한 한 해였다.
난해한 컨셉, 강렬한 노이즈로 대중과 조금 멀어졌던 에스파도 정상 궤도에 복귀하며 선두 그룹에 재참전했다. 각각 ‘Spicy’와 ‘Drama’를 앞세운 < My World >, < Drama >를 통해 보여준 대중 친화적 기조와의 절충은 자연스레 안정적인 차트 성과로 이어졌고 이후 행보에 기대감 또한 갖게 했다.
상술한 거물들 못지않은 중소 걸그룹들의 활약 또한 흥미로웠다. 많은 일들이 오가긴 했지만, 피프티 피프티의 ‘Cupid’는 틱톡 바이럴에 힘입어 빌보드 차트까지 침투, ‘중소의 기적’을 보여줬고, 거대한 세계관의 트리플에스 또한 연이은 작품들을 통해 어느덧 안정세에 접어든 모양새다. 더불어 키스 오브 라이프와 같은 인상적인 신예의 등장까지, 다양한 걸그룹들의 성취는 K팝의 안정화와 고도화를 실감케 했다.
상술한 걸그룹 르네상스 그 한 축에 댄스 음악의 부흥이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거리두기의 반작용으로 발발한 댄스 리바이벌은 디스코, 하우스 등 주 장르의 부활뿐만 아니라, 브레이크비트를 기반으로 한 전자 음악이 대중음악 내로 빠르게 흡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특히 시에라(Ciara)의 ‘Level up’ 릴 우지 버트의 ‘Just wanna rock’ 등 저지 클럽(Jersey Club)은 틱톡을 등지로 큰 유행을 타며 이러한 흐름에 박차를 가했다.
수많은 이들이 이런 큰 흐름을 만들어냈지만 지금의 대중화를 최전선에서 선도한 인물은 역시 핑크팬서리스(Pinkpantheress)다. 2021년경 ‘Pain’, ‘Break it off’ 등이 틱톡에서 바이럴을 타며 이름을 알린 그는 드럼 앤 베이스를 비롯한 다양한 전자 음악의 부드러운 면모를 포착, 베드룸 팝의 감성적인 요소와 결합하며 이를 거듭 연마한 끝에 장르와 시대의 얼굴로 자리매김했다. 그를 비롯해 올해는 티나셰(Tinashe), 켈렐라(Kelela), 아이스 스파이스(Ice Spice)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 또한 저마다의 접목을 통해 위와 같은 흐름에 힘을 보탰다.
국내의 경우, 프로듀서 250과 프랭크(FRNK)를 중심으로 한 뉴진스가 이 흐름의 중추에 섰다. 작년 볼티모어 클럽을 도입한 ‘Ditto’, UK 개러지의 속도감을 이식한 ‘OMG’의 연이은 대성공은 장르를 본격적으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켰고, 이어진 EP < NewJeans 2nd EP ‘Get Up’ >에서의 방법론 확장, 인상적인 선도는 새로운 장르의 모범 답안을 제시했다. 이에 뒤따라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의 르세라핌, ‘손오공’의 세븐틴 등 다양한 후발주자들은 저지 클럽을 중심으로 저마다의 다양한 해석을 선보이며 새로운 하나의 생태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여전한 숏폼 콘텐츠의 유행과 바이럴 논란
앞서 언급한 댄스 음악의 유행에 힘입어, 틱톡으로 대표되는 숏폼 콘텐츠 또한 여전한 강세를 이어갔다. 오죽하면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타 플랫폼들도 각각 유튜브 쇼츠(Shorts), 인스타그램 릴스(Reels)를 연달아 출시하며 시장에 적극 참전할 정도. 경로까지 다양해진 숏폼 콘텐츠는 특유의 낮은 진입 장벽, 즉 높은 접근성을 무기로 어느덧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당연하게도 음악 산업과 문화 역시 이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초기엔 특별했던 챌린지 문화도 어느덧 품앗이와 유사한 형태의 고정 콘텐츠로 변모했고, 이러한 챌린지와 숏폼 콘텐츠를 이용한 홍보에 염두를 둔 마케팅 전략과 음악적 작법까지 등장했다.
시스템이 문화에 스며드는 과정에서 작지 않은 잡음 또한 발생했다. 흔히 ‘바이럴 마케팅’이라 불리는, 마치 실제 바이럴 유행을 탄 것처럼 숏폼 콘텐츠의 알고리즘을 인공적으로 유도하는 형태의 마케팅 방식은 이용자들의 불편을 야기하며 새로운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됐다. 그중 가장 큰 논란이 일었던 인물은 단연 ‘Christian’의 지올 팍(Zior Park). 수많은 이용자들은 유튜브 쇼츠 알고리즘을 장악한 그와 레이블 뷰티플노이즈(Beautiful Noise)의 수장 마미손에게 상당한 불만을 표출했고, 음원 차트 상위에 진출하는 등 분명한 유명세와 인지도를 얻었음에도 좋지 못한 이미지, 지탄의 화살 또한 동시에 끌어안게 됐다.
서비스를 교란할 뿐 불법적인 행위는 아니라는 점에서 과거 유사한 흐름으로 논란이 일었던 ‘음원 사재기’ 사태와는 결이 확연히 다르나, 소비자의 시청 경험을 분명하게 침해한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 역풍 또한 본인이 감당해야 함은 동일하다. 새롭게 대중화된 마케팅 방식의 효력도, 그 개선 필요성도 엿볼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일본 문화의 흡수와 J팝의 대중화
당연하게도, 상술한 바이럴 마케팅의 수혜를 받은 이가 지올 팍만은 아니었다. 그중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일본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 중 하나인 아이묭(あいみょん). ‘Night dancer’의 이마세(imase) 등과 함께 국내 J팝 바이럴 마케팅의 중심을 차지한 그는 특유의 대중 친화적이고 감성적, 깔끔한 음악적 색채를 무기로 국내 젊은 세대의 인식 속에 침투했다. 독특한 비주얼과 음악의 지올 팍과 달리 무난하고 보편적으로 듣기 좋은 색깔을 지닌 만큼 대중의 반발 심리도 보다 적었다.
이러한 침투는 최근 다양한 흐름과 세를 합치며 올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J팝 부흥을 낳았다. 근 몇 년 간 코로나19 창궐로 인해 실내 활동의 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넷플릭스 등 OTT의 이용 시간이 증가하며 < 귀멸의 칼날 >, < 체인소 맨 >, < 스파이 패밀리 > 등 일본 애니메이션의 시청 경험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눈에 띄게 늘어났고, 같은 이유로 < 모여봐요 동물의 숲 >을 필두로 한 일본 게임으로의 유입이 확대되기도 했다. 더불어 < 스즈메의 문단속 >, < 더 퍼스트 슬램덩크 > 등 일본 영화의 국내 흥행까지 이어지는 등 다양한 일본 문화가 침투함으로서 J팝에 대한 편견, 심리적 벽은 서서히 허물어졌다. J팝이 흥행할 문화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결정타는 애니메이션 < 최애의 아이 >의 오프닝곡인 ‘アイドル(아이돌)’의 등장이었다. 팝 듀오 요아소비(YOASOBI)의 독특한 매력이 애니메이션의 서사와 어우러진 곡은 일본 내 폭발적인 흥행과 함께 유튜브 뮤직 차트 정상에 오르는 등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거두었다. 최근 열린 국내 콘서트는 당연하게도 순식간에 전석 매진, 예술엔 국경이 없음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제 힙합은 멋져, 국내 힙합 두 거성의 연이은 귀환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라는 표어와 함께 근래 국내 힙합 신에는 종종 위기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훌륭한 새 얼굴들이 종종 등장하긴 했지만 갈증을 완전히 해소시키진 못했고, 등용문이었던 < 쇼미더머니 >는 단물이 빠질 대로 빠진 상황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올해는 좀처럼 이러한 불평이 나올 여지가 없었다. 국내 힙합 신의 '두 개의 태양' 빈지노와 이센스가 연이어 복귀를 알렸기 때문. 그것도 ‘올해의 앨범’으로 거론될 만큼 대단히 걸출한 작품과 함께 말이다.
두 작품의 결이 완전히 달랐던 것도 일종의 재미 요소였다. 노련하고 여유로운, 감각적인 측면에 집중했던 빈지노의 < Nowitzki >, 랩 퍼포먼스의 극단을 넘본 이센스의 < 저금통 >, 각자 스스로의 과거 커리어와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이 걸작들은 힙합 신을 뜨겁게 달굼과 동시에 수많은 후배들, 동료들, 리스너들에게 큰 영감과 자극이 되었다.
올해 힙합 신이 풍족했다는 사실의 근거가 이 둘뿐만은 아니다. 고감도의 퍼포먼스로 커리어하이를 넘본 < Beige >의 키드밀리, 어느덧 국내 트랩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한 < Trapstar Lifestyle >의 랍온어비트(lobonabeat!) 등 여러 중진급 인물들은 물론, 반전의 소년 만화를 이룩한 < 해방 >의 스카이민혁, 특유의 젊은 에너지로 크루의 묘미를 보여준 < January Never Dies >의 바밍타이거, 도전적 프로듀싱이 빛난 < Reborn >의 혜민송(hyeminsong) 등 다양한 젊은 피들까지, 수많은 인물들이 위기의 힙합 신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리스너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코로나19의 사실상 종식과 공연 시장의 활성화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코로나19가 사실상 종식되며 공연 시장은 코로나 이전의 활기를 되찾았다. 공연 자체의 공급량이 늘었을 뿐 아니라 수년간 억눌렸던 공연 수요가 폭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본격적인 공연을 재개했고, 수많은 페스티벌이 이곳저곳에서 개최되었으며, 관객들도 오랜만에 찾아온 공연 열기에 적극 동참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아티스트는 인디 신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중 으뜸은 역시 실리카겔. 수년 전 < 실리카겔 >의 역동적 쾌감을 통해 인디 신의 신성으로 화려하게 등극한 젊은 밴드는 몇 년 전 밴드 인생 제2막을 선언한 이후, 현재 인디 밴드 계의 독보적인 리더로 진화했다. 압도적인 기승전결의 ‘Desert eagle’부터 대중 친화적 선율로 결정타를 날린 작년 ‘No pain’, 고감도의 후속타 ‘Tik tak tok’까지, 감각적인 패션만큼이나 음악 또한 감각적이었던 이들은 올 한해 인디 신을 단단하게 지탱해 내는 뛰어난 완력을 보여줬다.
스트리밍의 정착과 LP 시장의 부흥, 청취의 개인화
빅데이터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음악 시장에도 스몰데이터 시대의 바람이 불었다. 어느덧 시장에서도 단순 숫자의 정량적 데이터보다 개인 행동 중심의 정성적 데이터가 중요해지며 주요 분석 대상이 거대한 범대중 집단에서 소비자 개개인으로 옮겨간 것이다.
기존에도 가장 주요한 청취 수단이었던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는 이러한 개인 맞춤형 알고리즘 서비스의 보편화로 또 한 번 결정적인 진화를 이룩했다. 스포티파이, 애플 뮤직, 유튜브 뮤직 등 해외 스트리밍 서비스는 이를 무기로 국내 시장을 거세게 침공했고, 이는 멜론, 지니 등 국내 서비스에도 큰 자극과 영감이 되었다. 더불어 일부 스트리밍 서비스는 스포티파이 랩드(Wrapped), 유튜브 뮤직 리캡(Recap) 등 개인별 연말 결산을 통해 흥미로운 화젯거리를 제공하며 유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도 했다.
매우 가벼운 청취 수단인 스트리밍 시장과 비교적 무거운 청취 수단인 LP 시장이 동시에 활성화되는 흥미로운 현상 또한 이러한 개인화 시대의 산물이다. 오피셜 굿즈로서의 소장 가치, 시각적 낭만성 등 다양한 가치를 어필한 LP는 수년 전부터 스트리밍에 길들여진 젊은 층에게 신선한 수집 물품으로 다가갔고 그 수요는 점점 퍼지고 퍼져 이제는 새로운 개념의 소비문화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다.
인간 시대의 끝이 도래했다? 버추얼 아티스트의 정착과 AI의 도입
기술력의 발전은 어김없이 새로운 시스템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올해 최대의 화두는 역시 챗지피티(Chat GPT)를 필두로 하는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 기술. 이 거대한 변화는 음악 사회에도 꽤나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비틀스는 그들의 마지막 곡 ‘Now and then’을 AI를 이용해 완성하기도 했고, 래퍼 릴 야티(Lil Yachty)는 그의 최근 정규 앨범 < Let’s Start Here >의 앨범 커버를 AI를 통해 제작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했듯 음원 스트리밍에 접목되어 그 강세를 더욱 공고히 한 음악 추천 서비스 역시 이러한 활용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AI 기술을 활용한 커버 등 소비자의 2차 창작 활동 또한 많은 화제가 됐다. AI를 활용해 남녀노소 불문 온갖 목소리를 너무나 쉽게 다른 음악에 입힐 수 있게 되자 다양한 커버 음악들이 유튜브 등을 등지로 우후죽순 생겨난 것. 이러한 2차 창작뿐만 아니라, 더욱 발전된 인공지능은 아예 스스로 곡을 창작하는 수준까지도 도달했으니, 저작권에 대한 논의도 자연스레 이어지게 되었다. AI 창작자를 저작권자로 봐야 할 것인지, 혹은 저작권 침해자로 봐야 할 것인지,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담론의 결론에 따라 우리는 음악의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음악 시장에 정착한 외부인이 인공지능뿐만은 아니었다. 인공 인간, 버추얼(Virtual) 아티스트 또한 국내 음악 시장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가상 현실 아바타를 기반으로 하는 지금의 버추얼 가수들은 유사한 선례인 사이버 가수 아담, 일본의 다테 쿄코(伊達杏子) 등과는 달리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에 접근을 시도하며 일부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이세계아이돌을 필두로 한, 인터넷 방송 문화 기반의 ‘버추얼 아이돌’ 형태 확립은 기존 가상 아티스트의 한계점을 타파, 심리적 허들을 낮추며 음원 차트 상위에 진입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신인류들이 앞으로 어떠한 발전과 융화를 보여줄 것인지, 또 음악계에 어떤 자극을 줄 것인지 무척 기대되는 순간이다.
이미지 편집: 이승원, 정다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