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의 흥망이 사회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전 글 < 올리비아 로드리고와 새드 걸 팝, 팝은 어떻게 슬퍼졌는가 >에서도 언급했듯, 현재 대중음악은 코로나 시대와 개인화 흐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그로 인해 이전보다 높은 감성주의적 경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 흐름이 인디 록 신에 닿은 결과, 이모, 슈게이징, 드림 팝 등 감성 지향적 장르들이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다. 팝 펑크 리바이벌의 파라모어가 그랬듯,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슬로우다이브, 콕트 트윈스 등은 이 과정에서 젊은 세대 록 팬들의 새로운 우상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그 영향은 스트리밍으로도 이어졌다.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가 해외 음악 웹진 스테레오검(Stereogum)에 전한 통계에 따르면, 2022년 11월부터 1년간 슈게이징 장르의 스트리밍 수치는 전년 동일한 기간 대비 50%가량 증가했고, ‘shoegaze’라는 단어에 대한 검색 수는 220% 이상 증가했다. 플랫폼 내 대표적인 슈게이징 플레이리스트 ‘Shoegaze Now’는 그 청취수가 무려 800% 증가, 그 실체가 수치로 체감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 중심에 Z세대가 있다는 사실은 더욱 인상적이다. 틱톡의 젊은 유저들은 90년대 후반 활동하던 밴드 더스터(Duster)의 슬로코어(Slowcore) 곡인 ‘Inside out’, ‘Stars will fall’ 등을 그들의 입맛대로 갖고 놀기도 했고, 위습(Wisp)의 ‘Your face’라는 새로운 슈게이징 컬트 히트곡을 탄생시키기도 하는 등 슈게이징이 가지고 있는 장르적 매력에 적극 반응했다. 전체 이용자의 20~30%가량에 불과한 Z세대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 슬로우다이브 등 스포티파이 내 주요 슈게이징 아티스트들 스트리밍의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라는 사실 또한 꽤나 놀랍다.
작지만 강한, 세대의식이 강하게 작용된 흐름인 슈게이징 리바이벌. 이번 글은 열두 팀의 주요 아티스트들을 중심으로 이 부흥의 과정을 돌아보며 그 영향이 흩뿌려진 현재를 살펴본다.
슈게이징 리바이벌의 배경 - 취향의 파편화와 힙스터 집단의 형성, 디깅 문화
인디 음악 신을 추종하는 ‘힙스터’적 성향의 음악 마니아들은 인터넷을 등지로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고, 동시에 취향에 맞는 음악을 직접 발굴해 듣는 ‘디깅’ 문화가 보편화에 이르자, 이들은 수면 저 아래에 있는 아티스트를 지목, 공유하여 아이돌화하기 시작했다. 근(近)과거 인디 록의 상징적 존재로 여겨지던 카 시트 헤드레스트, 익스페리멘탈 힙합의 거성 제이펙마피아 등 각 신의 ‘컬트’ 스타들이 탄생하게 된 데에도 이러한 문화의 영향이 있었다.
‘비주류성’과 ‘서정성’을 지향하던 힙스터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마이너한 감정 친화력을 가진 슈게이징, 이모 등의 장르로 향했다. 이모 감성의 노이즈 팝 싱어송라이터 웨더데이의 걸작 < Come In >, 정체를 알 수 없는 로스트 미디어(Lost media)로 시작해 로스트웨이브(Lostwave)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판치코의 < D>E>A>T>H>M>E>T>A>L > 등 다양한 작품들은 인터넷 문화에 힘입어 리스너들의 상당한 주목을 받았고 슈게이징 계열의 음악, 감성은 인디 신에 보다 직접적으로 스며들게 되었다.
관련작
판치코(Panchiko) - < D>E>A>T>H>M>E>T>A>L > (2000)
웨더데이(Weatherday) - < Come In > (2019)
블랙 마켓 카트(bl4ck m4rket c4rt) - < Today I Laid Down > (2023)
파란노을의 대한민국, 슈게이징의 중심지로 떠오르다.
현재는 국내에서도 꽤나 알아주는 이름이 된 파란노을 또한 이런 맥락에서 주목받은 아티스트다. 짙은 아마추어리즘으로 무장한 국내 1인 밴드 파란노을의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은 그 높은 완성도와 장르적 색채로 국내외 마니아층과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슈게이징, 이모 리바이벌의 흐름을 스스로에게 집약해냈고, 순식간에 이 사류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영향을 받아 국내에는 아시안 글로우, 브로큰티스 등 다양한 슈게이징 아티스트들이 등장했고, 이들이 구성한 하나의 슈게이징 신은 그 높은 장르적 이해도와 캐릭터성을 무기로 국내외 리스너들의 이목을 모으며 대한민국을 현대 슈게이징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했다. 이러한 흐름 외에도 티알피피(TRPP), 신해경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 또한 독자적인 방법을 통해 걸출한 작품들을 뽑아내며 국내 슈게이징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기도 했다.
관련작
신해경 - < 나의 가역반응 > (2017)
파란노을 (Parannoul) -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 (2021)
티알피피(TRPP) - < TRPP > (2021)
브로큰티스 (BrokenTeeth) - < 추락은 천천히 > (2023)
북미 슈게이징의 새로운 물결
우리나라와 더불어, 슈게이징 리바이벌의 양적 부흥을 이끈 곳은 다름 아닌 미국이다.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atal)에 빗대어 NWOAS(New Wave Of American Shoegaze), 북미 슈게이징의 새로운 물결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북미 지역 슈게이징 신은 2020년대 현재 유례 없는 부흥을 맞고 있다.
쥴리, 데이 얼 거팅 어 바디 오브 워터(They Are Gutting a Body of Water) 등 수많은 밴드가 이를 빛내고 있지만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이름은 역시 피블 리틀 호스. 작년인 2023년 < Girl With Fish >라는 걸출한 작품을 내놓은 밴드는 슬래커 록과 노이즈 팝의 성질을 유려하고 독창적, 실험적으로 섞어내며 괄목할 만한 음악적 성과를 얻어냈다.
관련작
쥴리(julie) - < Pushing Dazies > (2021)
데이 얼 거팅 어 바디 오브 워터(They Are Gutting a Body of Water) - < Lucky Styles > (2022)
피블 리틀 호스(feeble little horse) - < Girl With Fish > (2023)
풀 바디 투(Full Body 2) - < Infinity Signature > (2023)
변화를 꾀하는 슈게이징 - 북미 슈게이징과 컨트리, 슬래커 록
이러한 신세대 미국 슈게이징 신이 독특한 점 중 하나가 바로 컨트리와의 접점이다. 알렉스 지(Alex G)를 비롯한 슬래커 록 음악과 접점이 많던 미국 인디 밴드 신은 자연스레 이 경향성을 포크, 컨트리의 형태로까지 확장 및 변형하여 슈게이징의 문법과 결합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심에 기타리스트 엠제이 렌더맨이 이끄는 밴드 웬즈데이가 있다. 2023년에 발매된 < Rat Saw God >은 컨트리의 토속성, 어쿠스틱한 질감과 슈게이징의 처절한 노이즈를 파괴적으로 엮어내며 같은 해 발매된 < Girl With Fish >보다도 뛰어난, 압도적인 평단의 찬사를 이끌어냈고 미국 인디 록 신의 또 다른 기념비적 작품으로 자리잡음으로써 장르의 가치와 다양성, 지속성에 크게 기여했다.
관련작
어 컨트리 웨스턴(A Country Western) - < A Country Western > (2020)
엠제이 렌더맨(MJ Lenderman) - < Boat Song > (2022)
웬즈데이(Wednesday) - < Rat Saw God > (2023)
슈게이징과 포스트 펑크, 고딕 록
슈게이징이 그 장르적 특성을 무기로 인디 곳곳에 스며들고 있을 때, 유럽 지역에서는 블랙 컨트리 뉴 로드, 블랙 미디 등을 위시한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리바이벌이 그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 정신과 집단성이 주요할 뿐, 포스트 펑크의 방법론에서 벗어나 다양한 색채의 음악을 펼치고 있던 이 흐름은 저변을 거듭 넓혀가는 과정에서 슈게이징의 영역에도 그 발을 담갔다.
아일랜드 밴드 저스트 머스타드는 그 선두에 선다. 특히 이들의 두 번째 작품 < Heart Under >는 포스트 펑크와 슈게이징의 텍스쳐, 에너지를 거칠게 섞어낸 작품으로 유사한 방법론을 공유하는 < Deathconsciousness >의 해브 어 나이스 라이프(Have A Nice Life)를 연상시키면서도 보컬 케이티 볼의 아슬아슬한 목소리를 기반으로 독특한 인상을 선사한다.
관련작
트와일라잇 새드(The Twilight Sad) - < It Won/T Be Like This All The Time > (2019)
저스트 머스타드(Just Mustard) - < Heart Under > (2022)
밀드레드(Mildred) - < Pt. 2 > (2022)
독자적 노선의 일본 슈게이징
슈게이징의 지역성을 논하며 일본이라는 국가를 빼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슈퍼카, 콜타르 오브 더 디퍼스, 루미너스 오렌지 등 다양한 밴드들의 영향을 받으며 독자적으로 성장해 온 일본 슈게이징은 비교적 전통적 슈게이징을 역설한 도쿄 슈게이저, 전달력과 몰입도를 극대화한 초기 키노코 테이코쿠 등 다양한 밴드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며 신을 수놓아 왔다. 보컬로이드 작곡가들이 집결하여 만들어낸 보카로-게이징 앨범 < Mikgazer Vol. 1 >까지 있을 정도니, 다양성의 차원에선 과연 그 궤를 달리한다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신다보쿠노카노조(死んだ僕の彼女/My Dead Girlfriend) - < Hades > (2015)
레이와 시대 J-슈게이징이 제시하는 타협 가능성
대단한 두께를 자랑하는 일본 슈게이징 신은 변화를 거듭하며 결국 대중과 닿게 되는데, 그 단초는 포 트레이시 하이드, 선봉장은 단연 히츠지분가쿠(羊文學)의 몫일 것이다.
일본 슈게이징의 가장 빛나는 이름 중 하나인 포 트레이시 하이드는 그 너른 상상력을 기반으로 쟁글 팝 특유의 찬란한 감성을 이식하는 등 신의 새로운 방향성을 더러 제시했고, 히츠지분가쿠는 이에 이어 드림 팝의 성질에 일본 얼터너티브 록 특유의 대중적 멜로디와 감성, 부드러운 음색을 점차 주입하며 Z세대 일본 록을 대표하는 밴드 중 하나로 자리를 굳혔다. 각자의 음악적 성취 외에도 장르의 변화와 타협 가능성을 역설하는 기점이 됐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의가 있는 활약이다.
관련작
유라기(揺らぎ/yuragi) - < Nightlife > (2016)
포 트레이시 하이드(For Tracy Hyde) - < New Young City > (2019)
에이프릴블루(エイプリルブルー/Aprilblue) - < Blue Peter > (2019)
히츠지분가쿠(羊文學/Hitsujibungaku) - < Our Hope > (2022)
장르적 한계를 넘어 - 얼터너티브 댄스 팝
히츠지분가쿠가 얼터너티브 록과의 접합으로 드림 팝의 일반적 대중화를 꾀했다면, 호주의 싱어송라이터 해치(Hatchie)는 평단의 주목을 받은 수작 < Giving The World Away >를 통해 슈게이징과 드림 팝의 질감을 매드체스터(Madchester)의 배기(Baggy)가 연상되는 사이키델릭하고 댄서블한 팝 사운드와 결합하며 또 다른 방법론적 대중화를 이룩했다. 비슷한 시기 베이퍼웨이브(Vaporwave) 신에서 활약했던 조지 클랜튼(George Clanton) 또한 < Ooh Rap I Ya > 등 작품을 통해 유사한 작법을 선보이며 리스너들의 지지를 얻었다. 본격적인 대중 지향적 장르와의 접합이라는 점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성과다.
관련작
릴 어글리 메인(Lil Ugly Mane) - < Volcanic Bird Enemy And The Voiced Concern > (2021)
해치(Hatchie) - < Giving The World Away > (2022)
조지 클랜튼(George Clanton) - < Ooh Rap I Yah > (2023)
< Blue Rev >가 열어젖힌 슈게이징의 밝은 가능성
슈게이징이 그 저변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수확이 바로 올웨이즈의 < Blue Rev >다. 셀프 타이틀 < Alvvays >, < Antisocialites >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인디 팝 신의 굵직한 이름으로 자리잡았던 올웨이즈는 그들의 3번째 정규작인 < Blue Rev >에서 기존의 몽환적인 팝 무드를 파워 팝과 슈게이즈라는 양가적 방법론으로 새롭게 반죽하며 스스로의 색채를 더욱 독특한 형태로 강화, 각종 비평적 찬사를 이끌어내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앞서 언급한 포 트레이시 하이드와 유사하면서도 또 특별한 이 질감과 작법은 슈게이징의 명도, 채도를 새롭게 정의하며 장르의 신선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관련작
포 트레이시 하이드(For Tracy Hyde) - < He(r)art > (2017)
올웨이즈(Alvvays) - < Blue Rev > (2022)
핫라인 티엔티(Hotline TNT) - < Cartwheel > (2023)
음울과 느림의 미학, 라나 델 레이와 슈게이징이 만든 Z세대 슬로코어
슈게이징이라는 장르를 관통하는 핵심은 결국 서정성. 다시 전성기를 맞은 이 음울의 미학은 결국 라나 델 레이의 그것과 만나 과거 로우(Low), 더스터, 선 킬 문(Sun Kil Moon) 등의 그것과는 또 다른 형태의 슬로코어를 만들어냈다.
포크적 색채가 짙던 과거 슬로코어와 달리 보다 팝/록 친화적인 형태로 발화한 이 흐름은 슈게이징의 파괴력과 팝의 부드러움 사이 줄타기를 주요 미학으로 삼으며 그 신선한 색채로 많은 리스너들을 매료했다. < Preacher’s Daughter >의 에델 케인은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이름으로, 가톨릭 성가의 영향을 받은 특유의 분위기와 처절한 질감으로 독보적인 음악적 세계를 구축하며 하나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관련작
니콜 돌런갱어(Nicole Dollanganger) - < Natural Born Losers > (2015)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 - < Norman Fucking Rockwell! > (2019)
언더그라운드적 성향이 강하고, 악기의 노이즈를 제일의 무기로 삼는 슈게이징의 부흥은 동일한 성격을 공유하는 인디 전자음악 신에도 큰 영감을 줬다. 슈게이징이나 드림 팝의 감성적 측면을 차용하는 전자음악 아티스트들이 곳곳에서 등장했고, 개중에는 그 문법을 거의 그대로 끌어온 인물도 있었다.
올해 함께 투어를 진행할 예정에 있는 콰닉과 제인 리무버는 과연 그 대표적 인물. 유튜버 출신 래퍼 콰데카(Quadeca) 등과 함께 레이블 데드에어(deadAir)에 소속되어 있는 둘은 슈게이징의 감성과 노이즈를 그들만의 독특한 전자음악 작법에 대입하며 인디 신의 이목을 끌었다. 제인 리무버의 경우 보다 전자 친화적인 기조를 띠지만 최근작인 < Census Designated >에서는 콰닉의 영향을 받은 듯 슈게이징 스타일의 비중을 한층 더해 보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글리치 팝의 아이콘적 존재인 율이나, 인디 드럼 앤 베이스 아티스트인 터쿼이즈데스 등 또한 전자 음악과 슈게이징의 인상적인 융합을 시도하며 신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
관련작
콰닉(quannnic) - < Kenopsia > (2022)
터쿼이즈데스(TURQUOISEDEATH) - < Se Bueno > (2023)
율(yeule) - < Softscars > (2023)
제인 리무버(Jane Remover) - < Census Designated > (2023)
깊이를 더해가는 블랙-게이즈
슈게이징과 함께 노이즈를 대표하는 장르인 메탈 신에도 블랙게이즈(Blackgaze)의 물결이 다시 한번 일었다. 블랙 메탈과 슈게이징의 결합, 데프헤븐이라는 아주 모범적인 선례를 가지고 있는 블랙게이즈는 슈게이징 리바이벌의 단초가 된 감성주의 기조에 힘입어 새드니스, 아그리컬쳐, 스발바르 등 다양한 밴드들과 함께 메탈계에 다시 한번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일본의 밴드 아스노조케이는 데프헤븐의 역작 < Sunbather >에 이어 장르 역사의 상직적 작품이 된 정규 2집 < アイランド >를 통해 블랙게이즈 신의 최전선에 섰다.
관련작
새드니스(Sadness) - < I Want To Be There > (2019)
아스노조케이(明日の叙景) - < アイランド > (2022)
아그리컬쳐(Agriculture) - < Agriculture > (2023)
스발바르(Svalbard) - < The Weight Of The Mask >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