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소리,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Oneohtrix Point Never) 내한 공연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Oneohtrix Point Never)
'Blinding lights'로 세계를 호령한 위켄드가 다음 프로젝트의 핵심 인력이 될 메인 프로듀서 명단을 발표했을 때, 독특한 이름 하나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그 주인공은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Oneohtrix Point Never, 이하 OPN)'. 보스턴의 라디오 채널 '106.7 FM'의 발음을 비튼 독특한 예명만큼이나 오늘날 전자음악 신에서 가장 도드라진 행보를 밟고 있는 음악가 중 하나다.
주파수를 경유하듯 윙윙거리는 드론(drone) 음향, 팝 채널의 히트곡 송출을 방불케 하는 명료한 선율, 여과를 거친 로파이 음질과 커리어 전반에 드리운 과거 편향성 등 그를 상징하는 요소는 마치 라디오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아예 스스로 라디오 자체가 되려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2010년대에 이르러 '퓨처 베이스'나 '하이퍼팝' 등 일렉트로닉 뮤직 시장에 도래한 유행은 대개 미래로 나아가려는 전진성을 보였지만, OPN은 자신만의 중력을 유지하며 과거의 무덤을 파헤치고 현대 문화가 지닌 노스탤지어의 면면을 추출하는 데 집중했다.
단, 이런 외골수적 집착은 찬란했던 골든 에라에 대한 동경이나 애착을 위한 과업이 아니다. 아날로그가 디지털 시대와 충돌하며 생겨난 파편을 한데 모아 도리어 우리의 추억이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각색되는지를 알려주기 위한 냉정한 반추에 가깝다. 키치의 공식적인 주류 침입을 허락한 베이퍼웨이브(vaporwave) 흐름의 선구자로도 잘 알려진 그이지만 각종 매체 인터뷰를 통해 꾸준히 자신의 업적을 부정해 온 사실은 유명하다.
이번 공연에 기대를 보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0집 < Again >의 전국 투어를 위해 9년 만에 다시 서울 땅을 밟은 OPN은 이번 앨범의 테마를 '사변적인 자서전'이라 밝힌다. 지난 아홉 장의 앨범들은 저마다의 주제 의식을 던지며 개개의 '스피커'로 기능해 왔지만, 공통으로 작업 과정에서 무수한 샘플 재배치와 재배열, 고도의 재생산이 거듭되곤 했다. 말 그대로 그의 음악 여정은 거대하고 자잘한 'Again'이 반복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오래되어 변색한 여러 스피커를 뭉개질 정도로 묶은 앨범커버는 이 '반복'의 끈을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 짓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뚝심 있는 가치관과 소리 자체의 탐구 정신은 물론, 예술 사조를 다채롭게 활용한 미디어 아트에도 조예가 깊은 아티스트이기에 전국 각지의 마니아들이 모든 감각에 그를 맞이할 빈방을 마련한 채 가슴만을 졸이고 있었다. 과연 그는 이 테마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먼저 공연은 실리카겔의 김한주, 전자음악가 김도언과 씨피카의 오프닝 액트로 막을 알렸다. 본래 게스트를 담당하는 뮤지션은 해당 주인공의 열렬한 팬이거나 평소 교류가 원활한 인물로 채우는 경우가 많지만, 유독 이들의 집결은 전자에 의의를 두고 있음에도 심도가 달라 보였다. 특별 공연보다도 간증처럼 들리는 무대였다. 그들은 공연을 하다가도 중간중간 본인들이 OPN을 얼마나 존경하고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관객과 설렘을 공유하기 바빴다.
각자 색채가 뚜렷한 세 아티스트의 합은 역시나 우수했다. 쉽사리 보기 힘든 이 조합은 OPN이라는 한 공통된 인물에 의해 형성된 교집합이었고 따라서 언젠가는 모이게 되었을 필연적 우연이라 봐도 무방했다. 귀를 치고 들어온 건 이날 메인 플레이어로 활약한 씨피카의 < ION > 수록곡이다. 몽롱하고 뿌연 꿈결 사이로 명징한 멜로디를 아로새긴 'Crusader'와 'Giant lion'의 존재감이 빛났다. 그들은 안개 사이에서 천천히 길목을 짚어 나갔고, 마치 만질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비정형의 공간을 직접 지휘하고자 하는 루시드 드림의 모험가들 같았다.
이내 가슴을 후벼파는 비프음의 'Again'과 함께 OPN이 등장했다. 귀가 아릴 정도의 볼륨과 함께 이내 'World oustide'의 불친절한 노이즈 사이렌이 양쪽으로 울려 퍼졌고, 뒤이어 스크린에는 눈이 시릴 만큼 원색적인 색감의 투어 제목이 적색경보처럼 떠올랐다. 감싸오는 음압에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계속 머물다가는 피부에 생채기마저 날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는듯 지배적인 위치에서 일방향으로 소리와 영상을 주입하며 서서히 조여오기 시작했다. 마치 잡음이 가득한 브라운관 한 가운데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느낌이랄까.
독특하게도 공연은 삼중 구조로 이뤄졌다. 왼편에서 OPN이 본무대를 펼치면 오른편에서는 공연장을 완벽하게 축소 구현한 애니매트로닉스 무대가 등장한다. 동시에 이 작은 인형극은 카메라로 촬영되어 거대 스크린으로 송출된다. 우리는 그의 본명인 다니엘 로파틴이라는 실체와 그를 본뜬 시뮬라크르, 그리고 그 인공물을 렌즈라는 여과 장치로 거쳐낸 또 다른 복제품을 동시에 본다.
좌)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 / 우) 프리카 텟(Freeka Tet)
말 그대로 < Again >이라는 제목처럼 모든 게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앨범 투어 공연은 대체로 홍보를 위해서라도 해당 작품의 트랙을 중심으로 진행하기 마련인데, 여러 앨범에서 고르게 추출해 정교하게 섞은 셋리스트가 뜻을 같이했다. 가령 'Inside world'의 공허하고 투명한 도입을 뒷받침으로 잠시 사용하거나, 서서히 잠식해 오는 'Time decanted'의 팔레트에 드럼 변주를 입히고 'Problem areas'의 하모닉 보이스 샘플을 섞어내거나, 기존의 질감보다 훨씬 날카롭게 깎아낸 'Zones without people'을 선보인 뒤 자연스럽게 광과민성 발작의 총체와도 같은 'Mutant standard'의 이어지는 등의 교정 작업이 오갔다.
이에 상응하는 비주얼적인 두각도 곳곳에서 드러났다. 여러 오디오와 비디오 소스를 샘플링하는 플런더포닉스(plunderphonics) 기법이 깃든 'Power of pursuation'에 이르러는 1980~90년대 상업 광고와 영화 장면을 시점에 따라 거듭 바꿔가며 생경한 감각을 유발하고 이 기조를 따라 연결부 삼아 < Again >의 수록곡을 자연스레 이어내며 연결점을 그려나갔다. 이와 반대로 완전히 암전된 가운데 작은 사각형에서 터져 나오는 스포트라이트만을 등대 삼아 진행된 중후반부는 소리에 오롯이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간이 조성되기도 했다. 현장에 있던 이라면 아마도 'Boring agnel'의 상승하는 오르간 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모두가 환호성을 내지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놀라운 시도였다. OPN은 더 나아가 본인 스스로를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여기는 단계에 이르렀고, 열 장의 앨범을 통째로 결산하고 정돈하는 작업을 통해 < Again >이라는 키워드를 충실히 납득시켰다. 기존에 비해 큰 호평을 받지는 못했던 앨범의 미완성된 구조조차 이 투어로 하여금 완성된다는 감상마저 들었다. 그간 페르소나 격으로 등장했던 모든 캐릭터를 버추얼 AI로 정렬해 마치 어린아이들이 합창하는 듯한 분위기를 구현한 'Chorme country'의 광경은 지금까지의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광경이었다.
마이크를 빼 들고 변조된 목소리로 'Animals'와 'We'll take it'을 힘차게 부르기 시작하는 후반 구간 역시 잊을 수 없다. 앞서 말한 삼중 구조의 공연장과 위협적인 시청각 자료, 더 나아가 가상의 뮤직비디오와 현실의 무대가 마구 뒤엉키며 혼란을 가중하는 연출은 무엇이 들리는 것이고 보이는 것인지, 무엇이 가짜고 진짜인지에 대한 개념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순간이었다. 마치 우리가 지금껏 믿어온 오감이라는 진리는 이토록 쉽게 무너지는 연약한 존재라 말해주는 것처럼.
악기의 실연(實演)이라는 개념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전자음악이 가진 강력하고도 아찔한 성격을 다시금 깨닫는다. 다시는 아날로그라는 세계에 발조차 들이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집념과도 같았던 그의 무지막지한 공연은 감각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극한을 건드린다. 자극적인 것이 늘 옳지는 않겠지만 굳은 뇌를 트이게 할 수 있는 건 결국 자극적인 충격이 아니던가. (물론 합법적인 선에서 말이다) 전자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혹은 창작의 경계를 허물고 싶은 이라면 꼭 봐야 할 공연이다.
송곳처럼 튀어나온 구석이 많아 보였던 그의 행적이 사실은 잘 짜인 14년간의 복선이었다며 군집체로 일단락되는 순간, 소름이 영영 가라앉지 않을 치밀한 작품 세계를 목도한 듯하다. 그의 여파가 여전히 귀와 피부에 아프도록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