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페스티벌을 보는 새로운 시선, '해브 어 나이스 트립(HAVE A NICE TRIP) 2024'
숱한 여름 음악 축제 사이에서 다채로운 컨셉으로 존재감이 확실한 해브 어 나이스 트립(HAVE A NICE TRIP)이 두 돌을 맞았다. 다니엘 시저와 타이 달라 사인의 알앤비, 힙합 트렌드세터가 나선 제1회 2023 해브 어 나이스 트립처럼 또 한 번 얼터너티브 뮤직 중심의 차별화된 라인업이 화제였다. 한국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캐나다 출신 슈게이즈 밴드 올웨이즈와 전위적 록 음악의 최전선에 있는 1994년생 영국 뮤지션 킹 크룰, 실험성 넘치는 알앤비 뮤지션 샘파가 “라인업 맛집” 타이틀을 수여했다. 설과 솔루션스, 유다빈밴드 같은 개성파 국내 밴드들도 매력 지수를 한층 높였다.
음악과 여행의 공존을 표방하는 해브 어 나이스 트립 답게 각종 이벤트 부스와 행사장 전반의 스펙터클도 바캉스 분위기였다. 표지판 역할의 모형 야자수와 바다, 암초 그림의 커튼으로 구성된 휴식 존이 여행 테마를 연출했고 원색의 각종 오브제도 트로피컬 했다. “덥고 좀 힘들어야 제맛”이라는 페스티벌 고전주의자가 아닌 이상 일산 킨텍스가 주는 쾌적함도 강점. 특이점 가득한 라인업과 실내 페스티벌의 불쾌지수 예방으로 소구력이 명확한 해브 어 나이스 트립은 벌써 세 번째 여행을 향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 라이브 리뷰에서는 이즘 에디터들이 인상적인 무대를 뽑고 페스티벌 전반에 대한 감상을 정리했다. 내년 여름에 돌아올 2025 해브 어 나이스 트립을 기대하며 이번 2회차를 함께 돌아보자. (염동교)
솔루션스(THE SOULTIONS)
본래 페스티벌의 첫 주자에게는 책임감이 막중한 법이라지만, 12년 경력의 베테랑 밴드 솔루션스가 그 무거운 깃발을 낚아채 막힘없이 들어 올렸다. 올해 10년 만의 정규작 < N/A >로 돌아온 이들은 날카롭게 갈고닦은 수록곡 ‘N/A’, ‘Athena’, ‘Dncm’, ‘Superstition’ 등을 선보이며 흥을 돋우는 예열자의 역할을 능숙하게 수행했다. 탄탄한 연주와 가창은 물론 신시사이저 음파에 조응하는 영상 필터와 록 사운드처럼 퍼져 나가는 종이 폭죽 세례는 공연장에 방금 입성한 이들조차도 ‘아, 내가 페스티벌 현장에 와있구나’ 되새기게 할 법한 훌륭한 오프너였다. 이 무대를 보고도 아직 정규 3집을 들어보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가서 재생 버튼을 누르기를 권한다. (장준환)
케냐 그레이스(Kenya Grace)
여린 목소리와 둔탁한 드럼 앤 베이스가 자아내는 오묘한 상호작용 ‘리퀴드 드럼앤베이스’는 오늘날 신세대가 자신을 드러내는 문법이 됐다. 영국 출신의 케냐 그레이스는 그 흐름을 견인하는 인물 중 하나다. 이 젊은 뮤지션이 라인업에 있다는 소식부터 놀라웠지만, 이내 천막이 열리고 강력 비주얼라이저와 런치패드를 병행한 디제이 셋이 눈에 들어온 순간 즉시 판정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곧 자신의 홈 스튜디오를 무대로 가져온 순간과도 같았다. 작년 틱톡에서 반향을 이끈 ‘Stranger’라는 곡을 필두로 ‘It’s not fair’, ‘Paris’, 개성 넘치는 전자음 난무를 시작한 그는 중간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곡을 잔뜩 매시업해 2020년대 새로운 ‘Pop Culture’를 이룩했다. 그웬 스테파니, 브리트니 스피어스, 이모전 힙, 플로우단까지. 확신하건대 팝과 클럽 신의 너드였다면 눈을 떼지 못했을 무대다. (장준환)
트래비스(Travis)
서정적인 사운드로 국내에도 많은 마니아를 보유한 영국 록밴드 트래비스가 2016년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이후 약 8년 만에 돌아왔다. 보컬 프란 힐리의 미소에 금세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처럼 편안한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청중들은 명곡으로 가득한 1999년 작 < The Man Who >의 ‘Writing to reach you’와 ‘Turn’을 힘차게 따라불렀다. 베이시스트 더기 페인이 어쿠스틱 기타를 치는 등 멤버가 한 몸처럼 한데 모인 ‘Flowers in the window’는 2014년 공연의 종이 꽃가루 이벤트를 상기했고 ‘Closer’의 종이비행기는 늘 그렇듯 밴드와 관객 간 추억을 쌓았다. 신보 < L.A. Times > 수록곡 ‘Bus’와 ‘Raze the bar’의 전성기 못지않은 수려한 선율로 관객들을 적신 트래비스는 피날레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에선 외려 집단 점프를 유도했고 감성적인 멜로디와 펄쩍 뛰는 역동성의 묘한 조화 속에 7번째 만남이 막을 내렸다. 언제든 우리에게 다시 돌아올 것 같은 트래비스의 무대에서 약속과 믿음, 가족 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염동교)
걸 갱(Grrrl Gang)
이름조차 처음 본 인도네시아 인디 밴드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2023년 9월 발매한 첫 정규 앨범 < Spunky! > 투어의 일환으로 한국을 찾은 걸 갱은 정말 깜찍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팀으로, 풋풋한 인상과 능숙한 무대 매너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베스트 퍼포먼스 중 하나가 나왔음을 직감했다. 대부분 곡이 2분 내외로 러닝타임이 짧은 편이지만 이들은 노래 사이사이 적극적으로 관객과 소통하며 밝은 에너지로 40분을 꽉 채웠다. 특히 ‘Spunky!’를 부르며 리드 보컬 겸 기타리스트 앤지타 센타나(Angeeta Sentana)가 형성한 서클 핏은 이번 페스티벌에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다. 공연 중간에 다음 순서인 설(SURL)을 친한 밴드로 언급하며 이후 실제 그들의 퍼포먼스를 지켜본 걸 갱은 음악이 끝난 후에도 사랑스러웠다. (한성현)
설(SURL)
데뷔로부터 약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오로지 상승세만을 이어 나간 밴드 설의 라이브는 이번에도 빛났다. 그들은 시작부터 'Dry flower', 'What you say', 'Cilla'를 연달아 연주해 탄탄한 라이브를 들려주면서 관중의 호응을 적극적으로 유도해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심지어 공연 중간에는 직접 서클핏을 주도하면서 더욱 즐거운 순간을 만들기도 했다. 리드미컬한 'Ringringring', 절제미 가득한 기타 사운드의 'The lights behind you' 등 다양한 스타일의 곡을 오가면서 다채로운 매력을 선사함을 물론, 미공개 곡 'Humming for sunset'까지 들려줘 팬들에게 행복한 순간을 연달아 안겨주었다. 언제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눈'이 연주되었을 때는 하얀 눈송이 같은 관객들의 플래시 라이트가 이들을 화려하게 빛냈다. '여기에 있자'로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던 설은 현재 그들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과 본인들을 항상 멋진 순간에 있도록 한다. (김태훈)
올웨이즈(Alvvays)
청량한 바닷바람에 노스탤지어를 실어 보내는 드림 팝 밴드, 올웨이즈가 데뷔 1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팬들의 오랜 기다림에 부응하듯, 그들은 좋은 컨디션의 라이브로 각자의 아련한 추억을 꺼내 음악에 녹아들도록 했다. 특히 밴드의 프론트 몰리 랜킨은 흐트러지는 순간 없이 음원과 동일한 수준의 아름다운 보컬을 들려주었다. 시작은 3집 < Blue Rev >의 'Pharmacist'와 'After the earthquake'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모두가 리듬에 맞춰 춤을 추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아련하고도 시원한 감각에 매료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Adult diversion', 'Belinda says', 'Dreams tonite' 등 대표곡이 연주될 때마다 가사는 물론 기타 리프까지 따라 부르는 사람 또한 적지 않았다. 'Archie, marry me'는 곡의 인기에 걸맞게 가장 큰 호응을 받으며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올웨이즈의 음악을 들으며 개인적인 추억을 그리던 사람들은 이날 이후, 올웨이즈 자체가 멋진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김태훈)
샘파(Sampha)
샘파는 이날 킨텍스를 찾은 모든 관객의 혼을 가져갔다. 무대의 중간에 조밀하게 모인 세션들이 조화로운 리듬을 만드는 동안, 중심에서 그들을 지휘하며 사운드를 쌓아 하나의 음악 예술을 완성하는 샘파의 모습은 마치 경이로운 존재의 강림처럼 보였다. 'Plastic 100'c'로 몽환의 시작을 알린 그는 'Suspended', 'Stereo colour cloud (Shaman's dream)' 등 < Lahai >의 수록곡들로 놀라운 라이브를 이어 나갔다. 하이라이트는 잘게 쪼개진 비트의 극한을 선사한 'Spirit 2.0'였다. 접신에 가까운 연주를 보인 두 드럼 세션이 융합해 만들어낸 리듬에 겹겹이 쌓아 올린 음, 그렇게 완성된 음악의 꼭대기에서 자유와 절제를 오가며 템포를 조절한 샘파는 모두의 넋을 빼앗고 무아지경의 춤사위가 가득한 공간을 구축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험하기 어려운 행복의 순간을 전파한 샘파에게 경의를 표한다. (김태훈)
킹 크룰(King Krule)
아마도 많은 이들이 가장 기다렸을 무대가 아닐까 싶다. 골초 음유시인, 심오한 염세주의자, 인디 록의 우울한 시인, 너드들의 록스타. 여러 수식이 어울리는 독창적 세계의 소유자 킹 크룰이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다. 뿌연 사이키델리아 안개와 적색과 청색 조명을 활용한 연출부터 심상치 않았지만, ‘Alone, omen 3’, ‘Dum surfer’, ‘Filsier’, ‘Easy easy’, ‘Baby blue’ 등 대표곡을 선보이는 내내 처절하게 울부짖고 침잠하며 단전에서 소리를 끌어내던 그의 모습은 새삼 무서우리만치 기억에 남는다. 미처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중력을 마주한 느낌이랄까. 물론 마냥 무겁지만은 않았다. 같은 날 무대에 오른 올웨이즈의 ‘Archie, marry me’에 웃으며 화답하던 장면이나(그의 본명이 아치 마샬이다) 직접 안무를 지시하며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무대를 만든 지점은 쏠쏠한 재미. 그날 나는 어린 톰 웨이츠를 마주한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상상에 잠겼다. (장준환)
총평: '궁극의 대학 축제'
페스티벌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유사한 경험이 하나 떠올랐다. 대학 축제다. 스티커 사진을 비롯해 다양하게 설치된 스폰서 부스, 테이블과 의자가 가지런히 배치된 푸드존의 모습은 이른바 '궁극의 대학 축제'라는 말을 내뱉게 했다. 전체적으로 행사장의 분위기 자체도 푸드트럭과 이벤트 부스가 즐비한 중간고사 이후 캠퍼스의 풍경을 고급화한 느낌이고, 에어 스테이지 뒤쪽에 동물 쿠션과 함께 얇은 베일을 둘러 편히 쉴 수 있게 마련한 휴식 존은 학생회가 낼 법한 깜찍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듯한 풍경이었다. 이름에 걸맞은 여행 테마도 매년 슬로건 구상에 골몰하는 대학 축제와 비슷한 감성이다.
재밌는 데자부였지만 허술함도 공존했다. 이를 크게 느꼈던 것이 키스오브라이프의 무대. 이들에게 밴드 셋을 기대한 사람은 없겠지만 별도의 백드롭도 없이 네 멤버만이 오른 무대는 격한 안무에도 불구하고 영 비어 보였다. 퍼포먼스를 중시하여 내린 결정이겠으나 음원을 두껍게 깔아놓은지라 이따금 고음 애드리브를 소화하는 벨의 파트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음악방송 영상을 보는 감상이 들곤 했다.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다. 미묘하게 안맞는 화면 싱크는 케냐 그레이스의 공연까지 이어져 종종 어색함을 안겼고, 음향은 수시로 뭉개져 “음악” 페스티벌의 본분에는 살짝 소홀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행사 장소인 킨텍스가 공연장이 아니라 박람회/전시회장으로 고안된 공간이기에 발생하는 한계다.
사소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난생 처음으로 실내 페스티벌을 방문한 입장에서 쾌적한 시설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추울 정도로 빵빵했던 에어컨은 이후 예매한 야외 페스티벌 티켓을 취소하고 싶어질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편안한 관람과 젊은 이미지를 추구하는 해브 어 나이스 트립은 지구 온난화가 가속되는 2020년대 페스티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상징한다. 이열치열 정신으로는 버티기 어려울 정도의 더위가 우리를 괴롭히는 시대, 음악에 몰두하는 마니아와 힙스터 외 무난한 소비자를 끌어당기는 마력 유무가 중요해진 것이다. 국내외 라인업 기조의 온도차도 그렇고 음악적으로는 조금 더 명확한 방향 설정이 필요해 보이지만, 큰 범위의 행사 개념에서 봤을 때 해브 어 나이스 트립은 분명 남다른 비전을 제시했다. (한성현)
사진 제공: 민트페이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