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판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4위에 꼽힐 만큼 역사적 · 음악적 가치를 공인받은 1971년 정규 1집 < 김민기 1 > 이후로 김민기 디스코그래피는 흐릿했다. 1978년 < 공장의 불빛 >을 비롯한 각종 음악극을 썼고 양희은에게 다수 곡을 제공하는 등 1970, 80년대를 거쳐 꾸준히 창작 활동을 해왔지만 본인의 음원을 갈무리하는 데는 비교적 무감했다. 이에 가수로서의 정체성이 흐릿해진 시기도 있었다.
흩어져있던 작품들을 한데 모아 1993년 서울음반에서 넉 장으로 발매한 < 김민기 1 >, < 김민기 2 >, < 김민기 3 >, < 김민기 4 >는 김민기 본인에겐 학전 설립을 위한 계약금이, 팬들에겐 경력 조망의 지형도가 되어주었다. 이에 2004년 발매된 컴필레이션 < Past Life Of Kim MinGi > 덕에 음악세계 접근이 용이해졌다. 한국 모던 포크의 거장이자 타칭 민중가요의 기수와도 같았던 김민기를 떠나보내며, 그가 일궈낸 수많은 명작 중 일부분을 소개한다. 본문에서 다룬 ‘친구’와 ‘아하 누가 그렇게…’, ‘아침이슬’ 이외에도 토속적 분위기의 ‘꽃피우는 아이’와 재즈풍 ‘길’ 등 < 김민기 1 >은 전곡이 추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구 (1968 / 1971) *(발매년도 / 작곡년도)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익사로 세상을 등진 친구와의 작별을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초현실적 이미지로 표현한 ‘친구’는 김민기 특유의 시적 감성과 언어의 응축이 돋보인다. 담담한 음성과 어쿠스틱 기타, 은은하게 퍼지는 건반은 화려하진 않지만, 속이 꽉 찬 과실과도 같다. 친구에게 작별을 고하는 범용적 스토리텔링 덕에 각종 추모 행사에서 쓰이지만 악곡 자체만으로 한국 컨템포러리 포크를 대변할 만한 명작이며 ‘아침이슬’과 더불어 김민기의 음악 세계를 요약할 만한 대표작이다. 하모니가 강조된 김영세와의 듀오 도비두의 1970년 희귀 음원과 1993년 버전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침 이슬 (1971 / 1971)
김민기의 많은 작품 중 상징성과 인지도 측면에서 최극에 올라와 있다. 마치 존 바에즈처럼 통기타 위를 활보하는 양희은의 육성이 투쟁가요의 전형을 굳혔으나 사실 1973년만 해도 건전 가요로 지정되었다. 건전과 불건전의 부조리한 딱지 교체가 그 시대 팽배한 모순점을 직격했다. 김민기 1집에 실린 ‘아침이슬’은 피아노 반주에 보다 담담한 창법이 보다 고전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김민기의 작품세계를 망라한 2004년 박스 세트 형식 편집 음반 < Past Life Of Kim MinGi >에는 독일어로 부른 ‘Morgentau’가 실려 있다. 이 모음집은 신중현의 < 신중현 Anthology Part Ⅰ&Ⅱ >와 더불어 한국 대중음악 거목을 이해하는데 좋은 참고서 역할을 했다.
아하 누가 그렇게... (1971 / 1971)
김민기의 1집은 재즈 내음이 진하다. 김호선이 연출한 1977년 영화 < 겨울여자 >와 배창호 감독의 1985년 작 < 깊고 푸른 밤 > 등 영화 음악에 탁월했던 밴드 리더 겸 색소포니스트 정성조가 조력자였던 덕분이다. 제스로 툴의 향취가 느껴지는 ‘길’과 토속적 한국미와 색소폰을 유려하게 엮은 ‘종이연’은 조니 미첼의 1970년대 중후반 작품군과 같이 포크와 재즈가 공존했다. 도어즈의 1967년 1집 < The Doors >의 오프닝 트랙 ‘Break on through (to the other side)’처럼 빠른 보사노바 리듬의 ‘아하 누가 그렇게’에서 정성조의 플루트와 김민기의 보컬은 한 쌍의 유려한 대구를 이뤘다. 같은 음반의 '길'과 더불어 정성조의 플루트 연주가 빛나는 작품이다.
가을편지 (1971 / 1993)
가을의 계절적 운치와 낭만을 드리운 ‘가을편지’는 김민기의 색다른 부면이다. < 눈길 >의 시인 고은이 가사를 붙인 이 곡은 본래 ‘황혼의 엘레지’의 가수 최양숙이 1971년 취입했고, 김민기의 음원은 20년이 지나서야 < 김민기 3 >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살결을 어루만지는듯한 세심한 어쿠스틱 기타 주법은 까막득한 후배인 기타 거장 함춘호와의 듀엣 퍼포먼스를 상상케 하며, 김민기의 중저음이 최양숙의 낭창한 분위기와 대비되는 그윽함을 드리운다. ‘향수’의 주인공이자 김민기와 1951년생 동갑내기인 포크 가수 이동원의 클래시컬한 버전과, 발라드 적 감성을 십분 활용한 박효신의 리메이크 등 많은 음악가에 의해 재조명된 작품이기도 하다.
작은 연못 (1972 / 1993)
김민기는 언어 함축의 도사였다. 진의와 무관한 다양한 해석은 그의 노랫말이 지닌 범용성과도 닿아있고, 많은 이들에게 각자의 의미로 새겨진 이유기도 했다. 1970년대 당대 많은 가요와 마찬가지로 금지곡으로 지정된 ‘작은 연못’엔 동요와 민중가요가 두로 녹아있다. 전반적인 곡조는 아이스러우나 노랫말은 자못 날카롭다. 본디 1972년 <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제2집 >에 먼저 실린 ‘작은 연못’은 가사 관련 이야기가 분분했다.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가 물 위에 떠오르고”의 장면에서 연못이 우리 민족을, 두 마리 붕어가 각각 남한과 북한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주되었던 것이다. 1993년 전설적인 디스크자키 이종환과의 인터뷰에서 김민기는 “직접적인 의도를 담진 않았으나 지나고 나보니 대중들의 해석이 1970년 창작 당시에 나에게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라고 술회했다.
주여, 이제는 여기에 (1973 / 1993)
김민기는 < 타는 목마음으로 >의 시인 김지하와 대학생이던 1971년부터 교류했다. 김지하의 언어 감각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은 김민기는 그를 큰 형처럼 따랐고, 1973년 연극 < 금관의 예수 >를 위한 음악을 써 내려갔다. 파이프 오르간과 아이들의 합창으로 이뤄진 성스러운 후렴구가 종교성을 부각하는 ‘주여 이제는 여기에’의 가사는 반전이다. “고향도 없다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 / 겨울 한복판 버림받았네, 버림받았네”란 구절은 유럽 작가주의 영화들의 대표적인 테마기도 한 “사제의 고뇌와 원망”을 담았다. 1970년대 일본에서 재일 한국청년동맹에 의해 발행된 < 금관의 예수 > 엘피는 높은 희귀성으로 마니아들에게 성배(聖杯)와도 같으나 정작 ‘주여 이제는 여기에’와 동일 곡인 ‘금관의 예수’를 부른 양희은은 “족보 없는 음반”이라며 해당 엘피를 가치 절하했다.
바다 (1974 / 1993)
50주년을 맞은 양희은의 1974년 작 < 내님의 사랑은… >엔 당대 특급 작곡가가 참여했다. 포크 쿼텟 따로 또 같이의 이주원이 타이틀 곡 ‘내님의 사랑은’을 지원했고 비운의 천재 음악가 김정호의 ‘이름모를 소녀’가 실렸다. 상기한 ‘가을편지’와 ‘바다’같은 김민기의 작품들도 빛을 발했다. 흑인음악적 요소로 리드미컬한 ‘혼혈아’와 더불어 1993년 < 김민기 2 >에 수록된 김민기 표 ‘바다’는 클래시컬하다. ‘아침이슬’과 유사한 진행 방식은 고전 음악적 곡조 위에서 장기인 포크 뮤직과 색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부드러운 분위기와 달리 “바람아 쳐러 물결아 일어라 / 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라는 구절에서 영국 인상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격렬한 바다 화풍을 이미지화한다.
새벽길 (1975 / 1993)
1993년 < 김민기 2 >에 수록된 ‘새벽길’은 나얼이나 빈지노 등 미대 가수의 대선배 격인 김민기의 회화적 연출력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서울대 미대를 등교하던 새벽 풍경을 묘사한 이 작품은 “예배당 종소리 깔린 어둠을 몰아가듯 울리네”의 시청각의 공감각적 심상과 “희뿌연 바람이 헤진 옷새로 스며들어 오는데” 같은 촉각적 심상이 여러 장의 소묘처럼 스르륵 펼쳐진다. 한 꺼풀 유연성을 높인 노래와 기타 연주가 이정선풍 포크 록을 연출하기도 한다. 알리와 장필순 등이 참여한 2021년 EP < 아침이슬 50년, 김민기에 헌정하다 Vol.2 >에서 어쿠스틱 기타의 재기(才氣)를 살린 윤도현의 버전도 총기 넘친다.
상록수 (1977 / 1993)
양희은은 지난 7월 24일 본인이 진행하는 MBC 라디오 < 여성시대 양희은, 김일중입니다 >에서 ‘아침이슬’ 선곡과 더불어 “제가 부른 그분의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김민기 선생의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기도한다”라는 멘트를 남겼다. 양희은의 회고처럼 그의 음악 경력에 지대한 자국을 남긴 게 1년 선배 김민기였으며 ‘아침이슬’과 함께 민중가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상록수’도 양희은의 1979년 작품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이 원곡이다. 비단 정치성을 제하더라도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라는 구절은 시대 불문 격려를 전했다. 1998년 박세리의 US 오픈 골프 우승 영상과 ‘상록수’를 담은 공익광고가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 (1978 / 1990)
김민기는 창극과 뮤지컬 등 다양한 형식에 도전했던 전천후 예술가였다. 그 스스로가 부평의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김민기의 1978년 노래굿 < 공장의 불빛 >은 당시 노동자들의 악전고투를 담았으나 서슬 퍼런 검열 아래 당시 노출도가 전무했다. 극의 클라이맥스에 흐른 ‘이 세상 어딘가에’엔 벼랑 끝 꽃 한 송이처럼 희망이 배어 나오며 인류를 향한 아가페적 사랑마저 엿보인다. < 공장의 불빛 > 극음악의 녹음 장소를 제공했던 송창식과 조경옥이 함께 부른 버전과 2004년 < 공장의 불빛 > 음반에서 이소은, 이승열 등 후배 뮤지션들이 합작한 리메이크가 존재한다. 한대수만큼 김민기와 깊은 우정을 쌓은 송창식은 1993년 작 < 김민기 1 >에 ‘내사랑 내겨레’를 제공하기도 했다.
봉우리 (1984 / 1993)
인생을 작고 높은 봉우리 고개 넘어가는 과정에 비유한 이 곡은 1993년 넉 장의 시리즈 앨범으로 나온 < 김민기 2 >의 수록곡이나 제작 시기는 약 십 년 앞선다. 드라마 < 모래 시계 >의 각본가 송지나가 연출한 1984년 로스앤젤레스 하계 올림픽의 한국 선수단 관련 다큐멘터리 삽입곡으로 내레이션부터 점차 감정을 고조하는 방식이 특징적이다. “눈앞 높아 보이는 고개가 사실 수많은 더 높은 봉우리 중 하나였을 뿐”이라며 담담히 읊조리는 ‘봉우리’는 메달 획득 실패로 고개를 떨군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삶에 통달한 젊은 철학자의 삶의 통달과도 같다. 시티팝 물결로 제2의 전성기를 구가중인 가수 김현철이 "인생 가사"로 꼽았다.
철망 앞에서 (1993 / 1993)
하나음악의 수장이자 포크 음악 대부 조동진처럼 1980-90년대의 많은 후배 싱어송라이터가 김민기를 따랐다. 가수에게 가장 소중한 무대를 김민기의 학전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장필순과 한동준, 윤영로 등 학전 소극장에 섰던 가수들과 하모니를 이룬 ‘철망 앞에서’는 선후배 간 화합이 훈훈하다. “자 총을 내리고 두 손 마주 잡고,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 버려요”라는 남북 관계에 관한 명징한 메시지는 우회에 능한 김민기에게서 보기 힘든 직설어법이며 ‘작은 연못’의 서사적 연장선과도 같다. 사회파 가수의 명맥을 이은 안치환의 2001년 리메이크는 6분 대의 긴 러닝타임과 허스키 음색, 로큰롤 작법 측면에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