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래 & 박성건 인터뷰
클론
아무리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이라도 이따금 춤추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것이다. 방 안에서 작게 몸을 흔들든, 다수의 타인과 섞여 에너지를 내뿜든 간에. 그러니 춤이 의식주 다음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건이라 해도 완전히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은 춤추게 하는 음악을 종종 경시하고는 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안무가 기본이 된 K팝의 국가인데도 말이다.
여러 얘기를 하려면 역시 춤꾼을 만나야 하는 법. 그리하여 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날 한국 댄스 음악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를 마련한 클론의 멤버 강원래, 그리고 그와 함께 < The Dance : 한국 댄스뮤직 100년사 >를 집필한 박성건을 만났다. 한국 댄스 신의 역사와 흐름, 현재와 미래까지 두루두루 논의하며 단순히 댄스 가수가 아니라 안무가로서 강원래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2021년에 한국 댄스 음악 역사를 다룬 < The Dance : 한국 댄스뮤직 100년사 >를 발간했다. 어떻게 쓰게 된 책인가?
강원래: < 노래선물 > 주크박스 코너로 박성건을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본인이 집필한 < 한국 재즈 100년사 >라는 책을 들고 왔는데, 제목을 보고 ‘재즈의 역사가 100년 밖에 안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딱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박성건에게 댄스 음악을 주제로 한 번 책을 만들자는 제안을 주면서 작업이 시작되었다. 내가 인터뷰 섭외를 주로 맡았고 박성건은 이외 부분을 썼다. 내가 그래도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후반 한국 댄스 음악 전성기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니 당시 유명 기획자, 가수 등 유명한 인물을 섭외할 수 있었다. 특히 표지를 장식해준 인순이 선배에게 감사를 표한다.
공동으로 책을 쓴 박성건 평론가의 소회도 듣고 싶은데.
박성건: 가요계 역사를 다룬 책이 워낙 없고 댄스는 더더욱 그런 편이라, 이곳저곳 흩어진 기록들을 하나로 묶어 정리를 한다면 굉장히 가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강원래는 댄스 뮤직의 전성기에 안무가 역할까지 겸하지 않았나. 그가 주축이라면 좋은 책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진입한 원더걸스를 비롯해 ‘강남스타일’로 엄청난 인기를 떨친 싸이, 그리고 지금의 방탄소년단의 성과 모두 다양한 인기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춤이 차지하는 비중이 30% 정도는 이상은 된다 생각한다. 춤이 없었다면 과연 이만큼 K팝이 대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강원래: 댄스 가수이자 안무가인 내 입장에서는 더더욱 춤의 중요성이 크게 느껴진다.
지금의 쟁쟁한 댄스 가수들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강원래는 스승 아니겠는가.
강원래: 어떻게 보면 다 내 라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혼자 해본다. 하이브 엔터테인먼트의 수장 방시혁의 선배 박진영이 나에게 춤을 배웠고, ‘강남스타일’의 핵심 안무인 ‘말춤’도 우리 팀 멤버가 만든 것이다. 요즘 후배들은 나를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들의 안무를 보고 있으면 다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고 누구 라인이고 등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강원래가 직접 뽑는 한국 댄스 음악의 주요 기점은 무엇인가?
강원래: 내가 처음으로 ‘댄스 음악’이라 의식했던 곡은 조용필의 ‘단발머리’다. 들으면서 신나는 기분, 춤 추고 싶은 느낌을 받았던 첫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방송적으로 큰 분기점은 1981년 UCDC(United College Dancing Club)의 대학가요제 출연이었다. 퀸시 존스의 ‘Ai no corrida’에 맞춰 ‘허슬(hustle)’ 춤을 췄는데 이것이 내가 본 첫 번째 ‘칼군무’였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많은 춤꾼들에게 큰 영향을 준 순간일 것이다.
세 번째는 모타운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마이클 잭슨이 펼친 ‘Billie Jean’ 퍼포먼스. 그 유명한 문워크 춤이다. 자기를 키워준 회사 행사에 와서 다른 레이블에서 발표한 노래를 선보인 그 무대가 말 그대로 세상을 뒤집었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그 다음으로는 허비 행콕의 ‘Rockit’을 뽑고 싶다. 로봇 춤이나 팝핀, 브레이크 댄스 등 우리나라 사람들의 춤 문화에 큰 자극을 줬던 곡이다. 더불어 1985년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 때 비보이 팀 뉴욕 시티 브레이커스(New York City Breakers)가 브레이크 댄스를 춘 순간도 빼놓을 수가 없다.
국내 인물 중에서는 역시 김완선과 박남정의 등장이다. 음악에 대한 질문이 “이거 들었냐?”에서 “이거 봤냐?”로 바뀐 기점이라 할 수 있겠다. 노래는 몰라도 김완선의 안무나 박남정의 ‘기역니은’ 춤은 기억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 다음이 소방차와 현진영, 서태지 등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MTV와 컬러 TV, 뮤직비디오가 등장하면서 당연히 비디오 재생 장치가 있는 집이 인기가 많았고, 학교에서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본 것을 따라 춤추기도 했다. 당시 < 플래시댄스(Flashdance) >, < 페임(Fame) >, < 브레이킹(Breakin’) >, < 할렘가의 아이들(Beat Street) > 등 댄스 영화도 성행했다. 특히 < 플래시댄스 >에서 락 스테디(Rock Steady) 크루가 하얀 모자를 쓴 채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장면이나 < 할렘가의 아이들 >에서 뉴욕 시티 브레이커스(New York City Breakers)와 락 스테디 크루가 맞붙는 모습은 국내 댄스 음악 유행에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신이라 봐도 무방하다.
한국 댄스 음악만의 문화 같은 것도 있었나?
강원래: 댄스 음악을 부르는 가수들은 많지만, 댄스 신에서 직접적으로 춤을 추고 소위 말해 ‘한가닥 했던’ 사람들을 ‘댄스 가수’로 인정해주는 일종의 룰이 있었다. 이른바 강호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강원래가 꼽는 우리나라의 춤꾼은 누가 있나.
강원래: 보고 엄청 놀랐던 인물이 남진. 가수협회장 당시 가수협회에서 인순이 선배가 중심이 된 ‘인순이 파티’가 열렸는데, 사람들이 삥 둘러싼 곳에서 말 그대로 ‘살벌하게’ 춤을 추더라. 거의 엘비스 프레슬리 급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군대를 간 우리를 이어 현진영과 와와로 활동했던 듀스의 김성재. 3살 많던 우리를 열심히 따라다닌 동생이었다.
현재 K팝 신에서도 뽑아본다면.
강원래: 특출나게 잘하는 인물이 있다기 보다는 그냥 다 잘한다. 지금은 특히 안무와 노래가 하나로 결합된 시대라 춤꾼을 고르기는 어렵다. 대신 연예인이나 스타로 본다면 지드래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굉장히 스타일리시한데다 행보 하나하나에 모두의 이목을 끌어당기고, 비주얼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인정을 많이 받는 사람인 것 같다.

그렇다면 박성건은 댄스음악 100년의 역사에서 클론의 중요성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박성건: ‘K팝에 춤이 없다면?’이라는 가정이 책의 출발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클론의 최대 역할은 포인트 안무의 유행을 촉발했다는 사실이다. 안무가 좋아도 결국 꽂히는 동작이 있어야 오래 기억되는 법이니까.
평론가로서 클론 음악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동료로서 인간 강원래를 어떻게 보는지 묻고 싶다.
박성건: 기존에 인순이와 리듬 터치,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등을 보면 해외 음악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힙합 쪽에서도 솔리드 등의 그룹이 만들어지면서 본토 스타일 랩을 차용하는 과도기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는 단어 자체도 그렇고 굉장히 한국인의 DNA에 탑재된 국산의 맛이 있다. 가사 대부분이 한국어인 것도 그렇고.
개인으로 봤을 때 나에게 강원래는 안무가들에게 가능성을 전파한 사람이다. 그저 댄수 가수에만 머물지 않았으니까. 안무가라는 것이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있게 희망을 준 인물이라 생각한다.
안그래도 몇 년 사이 <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안무가들이 많은 주목을 받는 추세다. 강원래는 어떻게 지켜보고 있나?
강원래: 안무 저작권에 주목해야 하는 시점이라 생각한다. K팝 아이돌의 뮤직비디오 조회수 30% 정도는 춤 때문에 유입된 수치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흥행하더라도 저작권료는 작곡가와 작사가, 편곡자들에게만 가는 것이 상황이 안타깝다. 표절 이슈에 대해서도 요즘 발달중인 AI 기술을 사용해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겠고.
마침 최근 소셜 미디어의 안무 챌린지 관련해서 안무가들이 저작권료 관련 아쉬움을 표한 바 있다.
강원래: 충분한 돈이 가야 한다. 과거에 나도 내가 만든 안무를 별다른 연락도, 안무비 지급도 없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글을 썼다 내린 적이 있다. 안무비가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지만, 지금 한창 댄서로 발돋움하려는 후배들에게는 안무 제작이 돈을 벌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래야 직업이 되고 서로 경쟁도 하면서 발전하는 법이다.
사실 안무가들은 가수 때문에 성공하지만 동시에 가수를 싫어하기도 한다. 과거 미국의 폴라 압둘이나 바비 브라운 등 댄서에서 가수가 된 이들이 꽤 있는데, 이런 케이스가 ‘결국 끝은 가수인가’ 하면서 때로 댄서들에게 자괴감을 안기기도 한다. 이런 생각으로 빠져들지 않게 좋은 롤모델과 단단한 체계가 갖춰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실 지금도 양현석, 박진영 등 주요 기획사 수장 중에 댄서가 꽤 있잖나. 단순히 안무가들 무시하지 말라는 소리를 넘어서 실제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 The Dance : 한국 댄스뮤직 100년사 >가 어떤 책으로 기억되길 바라나.
강원래: 흥행이 될 거라 예상하고 쓴 책은 아니었다.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학술적인 용도로 책이 쓰이는 것이다. 대부분 자료가 2000년대 이후를 다룰 뿐 이전 가요에서 춤의 존재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사람이 거의 없는 탓에 실제와는 다른 내용이 전해지기도 한다. 댄서부터 춤을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참고할 자료를 주는, 군대로 치면 중고참 정도의 역할을 하고 싶다.
자료가 적은 원인에는 댄스 음악을 은연 중에 멸시하는 태도도 있을 것이다. 엘리트주의적인 사고의 영향 아닐까.
강원래: 다른 이야기지만 비슷한 느낌으로, 사고 이후 나를 응원해주러 온 친구들이 ‘너는 장애인이 아니다, 장애인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식의 말을 많이 했다. 사실 나는 1급 장애인 등록증까지 받은 사람인데. 물론 그 사람들은 좋은 의미로 건넨 말이지만 지금도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장애인에 대한 무시로 들릴 수밖에 없다. 음악도 그렇다. 추켜세워준다고 ‘너는 댄스 가수 아니야’라고 하는 것은 댄스 음악을 정말 얕보는 셈이다.
음악 얘기는 아니지만 말이 나온 김에 묻고 싶다. 휠체어 타기 전과 후 가장 달라진 건 무엇인가.
강원래: 일단 시선이 낮아졌다. 이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그러면 가방에 많이 맞는다. (웃음) 많이 느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도와달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됐는데, 이 덕분에 오히려 자존감이 높아졌다. 물론 사고 직후부터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1, 2년 지나다 보니 내가 천천히 가게 된 상황을 인지하면서 그동안 너무 앞서가려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성숙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진행하는 < 노래선물 >의 청취자 대부분도 장애인 분들, 혹은 장애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하는 작은 기업들이다. 이런 점을 생각해서 가끔은 내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있다. 그리고 장애인들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대부분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힘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역으로 비장애인들에게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존재이자 창구가 되고 싶다. 그래서 대본도 유심히 보면서 걸리는 부분은 우리 장애인의 입장에 맞게 바꾸기도 한다.
가수 활동 질문으로 가보자. 클론 데뷔 이전에 구준엽과 함께 현진영과 와와로 활동하지 않았나. 이때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은데.
강원래: 나와 구준엽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태원에서 춤 좀 날리는 사람들로 유명했다. 일본 그룹 체커스(Checkers)의 ‘Oh, my Julia’ 같은 노래나 테크노 클럽도 우리가 없었다면 유행을 타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도 춤을 출 생각하지 못했던 음악에 춤을 췄으니까.
현진영은 나이트 클럽에서 브레이크 댄스나 재즈 댄스를 춘 전적도 있는 데다 방송 백업 댄서 활동도 했으니 나름 뼈대가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바비 브라운의 춤을 따라 추던 나와 구준엽을 일명 ‘날라리’였음에도 눈 여겨 본 것이다. 그리고 그때 현진영이 소속되어 있었던 SM 엔터테인먼트에서 주최한 댄스 경연 대회에서 우리가 1위를 하니까 그때 영업실장 김승현, 기획실장 최진열, 그리고 이수만까지 와서 우리를 섭외했다. 그렇게 현진영과 와와가 SM 엔터테인먼트의 첫 번째 가수가 되었다. 언더와 오버그라운드가 뭉친 팀이었다. 사실 우리는 랩도 하고 싶었지만 1년 후에 군대를 가야 해서 댄서 활동에 만족해야 했다.
전역 후 구준엽과 클론으로 뭉쳤을 때 ‘꿍따리 샤바라’에 대한 반응이 엄청났다. 일단 춤부터가 강력했으니까.
강원래: 사실 나는 춤도 노래도 너무 쉬워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준엽이 하자고 하고 나는 반대하면서 의견이 팽팽히 갈렸다. 듀스의 춤 선생이었던 우리가 인상도 쓰고 해야 멋있는데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때/산으로 올라가 소릴 한 번 질러봐’ 같은 가사가 마음에 들었겠나? 그런데 편곡을 맡은 김우진이 작업을 마치니까 의외로 노래가 굉장히 신나더라. 완성본을 듣고 ‘일단 흥겹게 한 번 해보자’ 하는 식으로 무대에 섰는데 첫 방송이 끝나고 보니 PD만 있던 자리에 예능 국장부터 해서 여럿이 와있더라. ‘대단한 놈들이다’ 이런 말이 나왔다.
활동 당시에는 비트에 집중해서 어디서 안무를 하고 어디서 쉴지에 신경을 쓰느라 가사가 지금처럼 힘을 주는 내용인 지는 몰랐다. 그러다가 교통사고 이후 병상에서 노래를 듣는데 새삼 가사가 희망적이더라. 가수가 노래 따라 간다는 말이 있듯이 나도 그 덕에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당장 내가 병상에서 재활하는 이야기를 담은 KBS 프로그램 제목도 < 다시 부르는 꿍따리 샤바라 >였다. 옛날에는 ‘빙빙빙’을 더 좋아했던 것 같은데 지나고 보니 결과적으로 ‘꿍따리 샤바라’가 클론, 그리고 나 자신에게 여러모로 큰 영향을 미친 최고의 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클론 노래 말고 음악적인 끌림을 느꼈던 다른 팀의 곡은 무엇이 있었는지 궁금한데.
강원래: 사고 이후에 듣고서 춤추고 싶다고 생각한 노래가 딱 하나 있다. 아소토 유니온의 ‘Think about’ chu’다. 지금은 윈디시티로 활동하고 있는 보컬 김반장을 만났을 때 ‘노래 만들면서 춤을 췄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춤추기 정말 좋은 음악이었으니까. 정작 본인은 드럼만 연주했다 하더라. 나는 들으면서 춤이 딱 달라붙어야 하는 곡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강원래 퍼포먼스의 핵심은 무엇일까.
강원래: 음악과 어울리고, 함께 추고 싶게 만드는 춤. 지금도 나는 차를 운전할 때 노래 하나를 반복하며 들으면서 안무를 짠다. 마치 < 토요일 밤의 열기 >에서 무대 위에 선 존 트라볼타처럼, 내가 어떤 동작을 해야지 사람들이 다 나에게 주목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식이다.
클론 하면 해외 진출 얘기도 빠질 수 없다. 당장 ‘빙빙빙’이 한류의 시초 격인 노래 아닌가.
강원래: 쿠와타 케이스케가 소속된 일본의 아뮤즈 엔터테인먼트 등에서 우리를 촬영해갔던 기억이 난다. 따로 홍보는 안 해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한국 최초로 쿠와타 케이스케의 목소리가 들어간 노래를 샘플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지 활동이 흐지부지되기 전까지는 케이스케의 집에 가서 식사도 할 정도였다.
잘 성사되었다면 대만 못지 않게 일본에서도 엄청난 열풍이 불었을 텐데.
강원래: 나는 그런 거에 대한 미련이나 욕심은 없다. 대만에서의 인기만으로도 엄청나기도 했고.
김태영이 피쳐링한 ‘돌아와’, 그리고 ‘초련’을 발표했던 1999년에 대만으로 향했다. 당시 현지에서 느낀 분위기는 어땠나?
강원래: 나조차도 클론이 대만에서 그렇게 잘될 줄은 몰랐다. 택시 타니까 기사가 사인해달라며 CD를 내밀 정도였다. 심지어 하루는 백화점에 들어가니까 조금 있다가 ‘빙빙빙’이 갑자기 틀어지더니 “클론의 강원래가 4층에 있으니 사인 받을 사람은 그쪽으로 가라”는 방송까지 나왔다.
커리어적인 면에서 후회되는 지점이 있다면.
강원래: 아껴놓은 것이 너무 많다는 것? 물론 트렌드를 더 잘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춤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보여주지 못한 것이 많아서 아쉽다.
마지막 질문이다. 강원래에게 클론은 무엇인가?
강원래: 내 인생은 딱 둘로 이뤄져 있다. 클론과 배우자 김송.
진행: 임진모, 한성현, 정기엽
사진: 정기엽
정리: 한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