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ZM이즘x문화도시부평] #47 싸이언
싸이언(CYAN)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부평과 함께 하는 < 애스컴 아카이브 부평사운드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마흔일곱 번째 주인공은 카리스마 넘치는 록밴드 크랙샷의 베이시스트 싸이언이다.
음악 경연 프로그램 < 슈퍼밴드 2 >와 < 불후의 명곡 2 >에서 존재감을 표출한 밴드 크랙샷은 1980년대 글램 메탈의 향수와 현대적 소리 문법을 융화한 “포스트 글램 메탈”로 한국 록계의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출중한 연주력과 화려한 무대 매너로 매 순간 대중에 선명하게 각인된 이들은 < 불후의 명곡 2 >에서 보여준 다양한 곡들의 다채로운 편곡과 두 장의 정규작 < After Midnight >(2017)과 < New Wave >(2019)를 통해 스펙트럼을 점차 넓혀가고 있다.
“궁극의 메탈
아이돌”이란 별명처럼 팀의 막내로서 밴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베이시스트 싸이언은 새로운 분야를 향한
도전 정신과 파고드는 집중력의 인생관이 확고했으며, 예술과 일상의 분리를 통한 장기적이고도 건강한 음악
경력을 강변했다. 나고 자란 인천을 향한 애정이 각별한 싸이언은 “인천이라면
어디든 무대에 서겠다”라며 지역 음악 발전의 소명을 밝혔고 공연장 증가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인터뷰 내내 소신으로 가득 찬 젊은 록 뮤지션의 에너지가 흘러넘쳤다.
밴드 크랙샷
뮤지션 싸이언의 근황은 어떠한가?
지난 7월 23일 ‘Go away’와 ‘Young & wild’, ‘Night rider’까지 신곡 세 개를 발표했다. 9월 한 달간은 공연 등 외부 활동보다는 곡 작업에 몰두하자는 취지로 멤버들과 작업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멤버들과 합주는 자주 하는가?
2019년 발매한 정규 2집 < New Wave > 때부터 “꼭 연습이 아니더라도 주 5회 이상은 함께 시간 보내자!”라고 멤버들과 합의했다. 우리끼리 음악 듣고, 다른 밴드 라이브 영상 보는 것처럼 소통하고 교류하는 등 크랙샷을 하나의 직장 느낌으로 가져가는 것에 멤버 모두 동의했다. 평소에도 본명이 아닌 대니 리와 윌리 K 등 활동명으로 부르는 것도 그 방향성의 일환이다.
싱글은 꾸준히 발매하고 있지만 정규 음반은 2019년 작 2집 < New Wave >가 마지막이다. 정규작 발매 계획은 한동안 없는 것인가?
아무래도 록밴드이고 풀렝스 앨범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아쉬움 없이
하나의 주제로 일관성과 유기성을 지니는 좋은 작품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다.
크랙샷은 뛰어난 연주력이 특징이다. 점차 곡 길이가 짧아지고
음향도 미니멀해지는 현세대와 반대되는 듯한 인상도 있는데?
이게 우리의 정체성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헤비메탈과
글램메탈의 영향 아래 있는 크랙샷은 확연한 기타 리프와 앙칼진 보컬, 기타 솔로가 주가 된다. 이런 요소를 살림과 동시에 근래 유행하는 간결하고 컴팩트한 사운드도 구현하려고 노력 중이다. 7월 발매 신곡 ‘Go away’에서 그러한 시도가 드러난다. 1980년대 글램 메탈에 현대적 소리 색채와 대한민국 정서를 결합한 크랙샷만의 “포스트 글램 메탈”을 목표한다.
곡 만드는 과정에서 멤버들의 의견 개진은 자유로운 편인가?
매우 수평적이다. 형들과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편이지만 그런 걸 느끼지 못할만큼 음악과
평상 시 소통이 자유롭고 편안하다. 나이를 불문하고 한 명의 뮤지션으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측면이 강하다. 6년 간 그런 수평적 관계를 형성해 왔다.
멤버 워낙 쟁쟁한 실력자들이다 보니 가끔 의견 충돌이 일어날 것 같은데,
합주와 음원 작업 과정이 궁금하다.
아무래도 멤버 성격이 다르다보니 강하게 의견을 내는 사람도 있고 중재자 역할을 맡는 이도 있다. 좋은 음악을 위함인걸 알기에 멤버들 모두 감정적으로 임하기보다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편이다. 다른 의견을 처음에 수용하긴 어려워도 결과적으로 납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그 부분에 있어서도 문제되는 경우가
드물다.
멤버가 4명이다보니 약간의 갈등이 빚어질 때 가급적 2대 2로 중립을 지키려고 한다. 3대 1이 되면 1 입장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다들 서로를 존중해주는 성격이라 2대 2 구도에서도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조율이 나오기도 한다. 역시나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음악 오디션 경연 프로그램 < 슈퍼밴드 2 > 참여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밴드에 있어서 프런트퍼슨이 주목도가 높은 데 반해 < 슈퍼밴드 2 >는 각 악기 연주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보낸다. 다양한 참가자들과
팀워크를 도모하며 음악적으로 그리고 관계적으로 더욱 유연해질 수 있었다.
< 불후의 명곡 2 >에도 출연했다. 음악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 불후의 명곡 2 > 백두산
편에서 198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헤비메탈 밴드인 백두산의 ‘애타는
마음’과 ‘말할 걸’을
메들리로 엮었다. 백두산 특유의 메탈 사운드에 크랙샷의 고유색을 결합한 편곡이었다. 싸이 편에선 육중완밴드와 함께 ‘예술이야’를 대중적 색채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장르와 스타일별로 멤버별 편곡 기여도가 달라지는가?
리듬파트에선 나와 드러머 대니리의 편곡 비중이 높다. 대니리는 살려야할 부분은 살리고, 덜어내야할 부분은 컴팩트하게 정리하는 등 송폼의 기여도가 높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Oops!... I did it again’과 투애니원 ‘Fire’, 스콜피언스의 ‘Still loving you’, 머틀리 크루 ‘Home sweet home’ 등 많은 곡을 커버했다. 타 뮤지션 작품의 재해석은 싸이언과 크랙샷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새로운 시도를 통해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히는 과정이다. 웅장하고 장엄한 분위기의 도입과 더욱 강력한 메탈 음향의 구현, 서정적인 발라드 등 다채로운 스타일을 시험하고 있다.
크랙샷의 곡 중 베이스가 두드러진 곡을 추천해 준다면?
개인적으로 베이스는 확연하게 튀어나오기보단 전체적인 밴드 사운드를 받쳐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몇 곡을
들고 싶다. 우선 < New Wave > 수록곡 ‘Don’t close your eyes’는 베이스 리프의 도입부를 지나 러닝타임이 5분가량 되는 긴 호흡의 곡이다. 댄서블한 베이스 리듬의 ‘Follow me’도 권한다.
싸이언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방금 전 베이시스트로서의 지향성이 의아하게 느껴진다.
기본적 성향은 남들을 재밌게 하는 걸 좋아하고 표현이 많다. 베이스를 치면서 조금
더 객관적이고 입체적으로 상황을 둘러보고 과묵한 성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음악 실력은 실력대로, 성격은
성격대로 그대로 가더라(웃음)
향후 도전하고픈 음악이 있는가?
1980년대 글램 메탈에 기반한 크랙샷만의 포스트 글램 메탈의 뿌리를 지키면서 다채로운 스타일을 조금씩 녹여내지 않을까 싶다. 갑자기 확연히 다른 장르를 한다기보단 말이다.
뮤지션 싸이언
음악가의 꿈을 꾸기 시작한건 언제인가?
당시 어울리던 친구가 2007년 영화 < 트랜스포머 >의 사운드트랙을 들려줬다. 영화에 실린 린킨 파크의 ‘What I’ve done’이 밴드 음악을 향한 불씨였다. 2009년
작 < Atmos >를 통해 서태지에게도 빠졌다. 당시
국내에서 그린데이나 뮤즈 같은 팀들이 인기를 끌었는데, 이들의 음악을 자세히 듣다보니 자연스레 베이스란
악기에 관심을 품게 되었다. 심지어 베이스를 한번도 손에 쥐지 않았는데 “나는 베이시스트가 될거야”라는 소망도 가졌다.
학창시절 스쿨밴드도 했는가?
늘 하고 있었다. 당시에 < 슈퍼스타K >로 인해 실용음악 학원을 비롯 스스로 음악을 하려고 하는 인구가 많았던 상황이다. 인천과 부천은 실용음악 학원의 메카였고,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지역별로 연주 잘한다는 친구들과 밴드를 조직하곤 했다. 메탈리카와 건스 앤 로지스를 커버하며 합주 실력을 높였다.
실용음악과에 진학한 계기는 무엇인가?
원래 조금 더 속이 꽉 찬 사람이 되고픈 마음에 철학과를 꿈꿨다. 창작에서 오는 고뇌를
좀 더 현명하게 다스리는 내실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우선 철학 전공을 하고 음악도 병행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당시 밴드 활동 같이 하던 친구들의 꼬드김으로 실용음악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사실 실용음악은 개인적으로 꿈꾸던 장르와 완전히 달랐지만 "나는 호원대 갈거다" 일단 질러놓고 그에 합당한 노력을 기했다. 1년 남짓 짧은 기간 매일 9시간씩 베이스를 쳤다. 방에서 안 나오다보니 폐병 환자처럼 얼굴이 하얘졌지만 그만큼 나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운 좋게 호원대 실용음악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전문적인 뮤지션의 길로 접어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스물 한두살 때 가입했던 모던 락 밴드 하드슈가이다. 하드슈가 보컬과 드러머가 나와
띠동갑 형님들이었는데 그들과 한솥밥 먹으며 사회 생활을 익히고 싶었다. 하드슈가로도 음원 발매를 꽤 했다. 아직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고 당시 멤버들과 연락도 종종한다.
하드슈가 당시 생업도 있었는가?
주말엔 실용음악 학원에 출강하고 평일엔 복싱 체육관에서 코치로 일 했다. 복싱을
꽤 오래 했다. 프로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 실제로 하진 않았다. 지금은
취미로 하고 있다. 음악이 아닌 다른 걸로 돈을 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친구들도 많지만
외려 “자신의 음악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이라는 마음으로
자존감을 높였으면 좋겠다. 뭐가 먼저라고 정의 내리는 것에 스트레스 받기보다는 음악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베이스와 권투 모두 집중력이 강한 것 같다.
순간적인 집중력과 무언갈 시작하면 파고드는 것에 강하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뮤지컬 < 볼륨업 > 출연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는가? 음악 소재 뮤지컬인만큼 홍경민과 정모, 이세준, 고재근 등 많은 음악가가 나왔다.
연기와 뮤지컬에 관해 잘 알지도 못 했고 관심도 없었다. 뮤지컬 기회가 올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 했다. 뮤지컬 작품에 임하는 순간엔 베이스 연주자가 아닌 배우여야 한다는 생각에 한두달
정말 노력했다. 10~20년 경력 베테랑 배우들과는 당연히 비교될 수밖에 없겠지만 “내 몫을 충실히 하자”란 마인드셋이었다. 다행히 선배분들이 많은 칭찬을 해주셨다.
뮤지컬 이외에도 다른 장르에 대한 도전 의식이 있는가?
워낙 운동을 오래하다보니 태도 자체가 도전적이고 안해 본 작업을 받아들이는데도 수월한 듯 싶다. 새로운 일에 지레 겁벅기보단 “일단은 해봐야지, 내 길로 만들어가야지!”라는 마음이 더 크다.
슬랩, 워킹베이스, 뮤트 등 다양한 베이스 테크닉 중 본인의 강점은 무엇인가?
국내엔 피크를 사용하는 베이시스트가 많지 않다. 피크로 연주하는 국내 베이시스트 중에선
자타공인 내가 가장 뛰어나지 않을까 싶다. 연주자로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먼저고 주법이나 기교는
그 다음이라고 생각한다. 핑거 피킹과 슬랩, 태핑 모두 표현 방법의 차이일 뿐 특정 소리를 통한 의도 전달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존경하고 영향을 많이 받은 베이시스트는?
영화 < 뷰티 인사이드 >(2015)처럼
한 명 지목하면 바로 해당 스타일 연주 가능할만큼 동경하는 연주자가 많다. 레드 제플린 존 폴 존스와
딥 퍼플 로저 글로버, 메탈리카 클리프 버튼을 존경한다. 테크닉
적으로 어마무시하진 않으나 그 자체로 아우라를 뿜어내는 머틀리 크루의 니키 식스도 선망하는 베이시스트. 그렇다고
이들의 스타일을 답습한다기보다는 영향력을 모태로 나 자신의 고유성을 발전시키는 것에 가깝다.
샌드버그라는 악기 회사의 엔도서라고 들었다.
< 슈퍼밴드 2 > 나가기전에도 샌드버그 악기 협찬해주시던 라이딩베이스 사장님께서 내 플레이를 눈여겨보고 계셨다고 한다. < 슈퍼밴드 2 > 나가는 동안 잠깐 인사드리러 갔다가 엔도서 확정이 되었다. 핼로윈과 람슈타인, 오페쓰 같은 대단한 메탈 밴드들이 사용하는 샌드버그라 더욱 감사하다. 연주자가 악기를 200% 만족하며 쓴다는건 매우 이상적인 일이다. 작년 초에 샌드버그 독일 본사의 대표를 만났고 함께 연주 영상도 찍었다. 그 후 공식 사이트에 등록된 인터내셔널 엔도저가 되었다.
“궁극의 메탈 아이돌”이란 별명은 어떻게 얻게 되었는가?
당시에 월간 하드락 통신이라는 매체의 편집장과 친분이 있었다. 어느 날 그 분께서 보낸 “베이스 천재 오늘도 파이팅!”일나 문자에 “이제 천재란 소리 지겹다, 나는 메탈 아이돌이 되겠다”라고 답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인데 지금까지 계속 사용중이다.
보통 K팝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인데 본인도 그런 이미지를 원하는 것인가?
그런 건 갖지 않다. 보통 K팝 아이돌은 상당히 절제되고 규격화되어 있는 행동을 한다면 나는 조금 더 자유분방하고 메탈 음악을 하는 청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말할 게 있으면 시원하게 말하고 인간적이고 꾸밈없는 모습 말이다.
무대 위 화려한 무대 의상이 인상적이다. 직접 선택하는 건가?
처음에는 메이크업과 스타일링을 스스로 했지만 소속사가 생긴 이후로는 회사로부터 컨펌 받고 있다. 물론 여러가지 아이디어는 낸다. 1980년대 풍과 최근 캐주얼한 느낌을 조화하려고 한다. 아무래도 비주얼 록의 상징 격인 키스(KISS) 스타일 분장도 많이 참고한다.
인천과 싸이언
인천은 싸이언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는가?
7살까지 부평역 근처 백운역에 살았고, 8살부터 25살까지 남동구 만수동에 거주했다. 어머니가 동인천 제물포 지역의 심지 음악실에서 디제이(DJ)를 하셨다는 걸 20대 중반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인천 출신 메탈 밴드 사하라와도 인연이 있으셨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로스 엔젤레스처럼 한국에선 인천이 메탈 성지(城地)였다고 한다.
돌아가신 외삼촌도 동인천 지역 하드락 카페를 자주 방문하시는 상당한 뮤직 마니아였다. 삼촌 댁에 LP가 수천 장 있던 삼촌 댁엔 매일 다른 음악이 흘러나왔다. ‘Sweet home Alabama’와 ‘Free bird’의 서던
록 밴드 레너드 스키너드도 삼촌 덕에 즐겨듣게 되었다. ‘Simple man’이란 곡을 무척 좋아했고
아마 저니 다음으로 많은 영향을 준 밴드가 레너드 스키너드이다.
음악가로써 느끼는 인천이란 도시의 이미지는?
비단 메탈이 아니더라도 실용음악학원 쪽이든 필드에서 활동 중인 분이든 인천 출신 걸출한 연주자가 많다. 항구도시의 개방적 분위기가 주는 문화적 특성이 있다. 인천의 메탈
신이 중심이 되고싶다는 개인적 포부가 있다.
나는 인천의 아들이다(웃음)
최근 부평에서 한 공연은 어땟는가?
인천 공연을 할 때면 늘 마음이 편하다. 문화도시부평의 “도시 음악을 기록하다”와 인천아트플랫폼 기획 공연 “레코드 플랫폼” 모두
“내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걸 내 모습 그대로 보여드리자!”라는
마음으로 임했다. “레코드 플랫폼” 콘서트 하러가는 길이 3년 전 인천문화재단을 통해서 “인천예술인 이음카드”를 발급받으러 갔던 곳이라 특별했다. 앞으로 인천에 밴드들이 공연할
수 있는 공간과 무대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밴드 붐은 온다”란
말이 생길정도로 밴드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밴드의 구성원으로써 어떻게 생각하나?
전반적으로 매우 좋은 현상이다. 신의 중심에 있는 팀들에서 취향이 다양한 방식으로
퍼질 수 있고 그러다 보면 크랙샷에게 닿을 수도 있다. 오랜 메탈 리스너들에게 우리 음악이 일정 부분
익숙하겠지만 MZ세대에겐 완전히 신선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밴드
문화가 잘 풀리기 위해선 한 두 밴드가 아닌 전체가 잘 되어야 한다. 좋은 음악과 무대를 보여줄 수
있도록 서로 존중하고 응원하면 좋겠다.
밴드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과 별개로 아직도 설 수 있는 무대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래도 2010년대
이전까지는 홍대 대부분 클럽에서 주말 공연도 연 만큼 관심도가 높았다고 들었는데 내가 필드에 들어선 이후론 그런 광경은 보지 못했다. 좀 더 쾌적하고 수월하게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는 장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특히 인천과 부평 지역에.
11월 23일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에서 국카스텐과의 합동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두 밴드가 어떻게 만나게 된건가?
솔직히 정확한 경위는 나도 잘 모르지만 어릴적부터 국카스텐 팬이다보니 기획 단계 때 호소를 많이 했다. 보컬 하현우 선배도 “크랙샷 베이스 치는 친구 괜찮더라”라며 언급해주신 적이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국카스텐 ‘거울’이 나왔고 당시 EBS 스페이스 공감에서 펼쳤던 무대가 장안의 화제였다. 중학교 2학년 무렵 나온 EP < Tagtraume >도 ‘붉은 밭’을 비롯 여러 트랙을 좋아했다. 산울림 이후 또 하나의 걸출한 한국 사이키델릭 록의 등장이었다. 이들과의 조인트 콘서트가 특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싸이언의 음악관
후배 베이시스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선 본인 안에 있는 슬픔이나 고통, 노력이 상당히 많이 수반된다고
본다. 자신을 계속 엄격하게 대하고 수련하며 어떠한 원형을 갖춰야 하는데, 정신적으로 미숙한 청소년기엔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음악가가 되고팠는지에
대해 구체화가 되어있다면 그런 과정들이 조금 덜 고되고 즐거움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무쪼록 MZ세대들이 밴드 음악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
한가지 더하자면 음악 할 때의 모습과 일상을 조금 분리해도 좋을 것 같다. 무대
위에서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미친 사람이 되는 게 맞지만, 무대
아래에서는 대한민국 사회의 일원으로써 너무 과잉되거나 자유분방한 행동을 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음악가의 삶과 일상을 분리하는 편인가?
완전히 분리하는 편이다. 음악을 향한 집념을 일상으로까지 끌고 오면
인간 김진우가 너무 힘들 것 같다. 핸드폰도 뒤집어 놓고 연락도 거의 안 받는다. 음악을 오래 하기 위한 장기적 전략이기도 하다. 너무 음악과 예술에
깊게 빠져서 고뇌로 인해 지치는 것보다 조금 더 냉정한 시선을 견지하는 게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고 연륜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유연함도 생길 것 같다.
권투를 비롯한 운동도 음악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함이다. 긍정적인
도파민 분출과 노력과 고생을 통한 성취감에 익숙해져야 한다. 쉽게 얻는 무언가는 그만큼 쉽게 사라지고
힘들게 해내는 건 과정이 힘들지언정 보람이 크다. 음악도 그런 자세로 임하려고 한다.
요즘 즐겨듣는 음악가가 있는가?
해외 레이블의 유튜브 채널을 다수 구독할 만큼 신작을 챙기는 편이다. 흥미롭게도 아직 영미권엔 글램 메탈을 하는 밴드가 많은 걸 보고 “밴드 붐이 오는” 작금의 한국에도 좀 더 원초적이며 본능에 충실한 록밴드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장르의 인기에 모방과 답습이 이어지는 건 주류 음악의 운명이긴 하지만 독창성 있는 팀들이 존재해야 신이 건강하지 않을까?
인생 음반을 공유해 준다면
미국 록밴드 저니다. 중학교 3학년 때 미국 하이틴 뮤지컬 드라마 < 글리 >에서 ‘Any way you want it’과 ‘Don’t stope believin’’을 접했다. 이를 계기로 저니의 경력과 대표곡을 살펴보게 되었다. 닐 숀(기타)과 조나단 케인(키보드), 스티브 페리(보컬) 등 당대 정상급 기량의 뮤지션들이 모여 만든 슈퍼그룹이었고, 모든 장르에 능통했으며, 대중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흠 잡을 데 없는 완전체가 바로 저니였다. 미국인들이 그토록 많은 사랑을 보낸 이유가 있다.
저니의 탁월한 디스코그래피에서도 애착이 강한 작품이 있다면?
‘Don’t stop believin’’과 ‘Who’s crying now’, ‘Open arms’같은 명곡들을 수록한 1981년 < Escape >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음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