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 충만, 소망 기원, 사랑 가득! RSS 뮤직 페스티벌
리듬도, 소망도, 사랑도 충만했다. 걸출한 연주력을 뽐내는 흑인음악 밴드 소울 딜리버리, 그들이 운영하는 레이블 ‘리듬소망사랑’의 앞글자를 딴 < RSS 뮤직 페스티벌 >의 진가는 음악과 사람이 모였을 때 나오는 오프라인의 힘이다. 겨울이 다가오길 약간 망설이는 11월 둘째주, 한적한 성산동 갤러리에서는 3일간 쉬지 않고 리듬과 소망과 사랑이 흘러나왔다. 리듬소망사랑과 소울 딜리버리의 멤버들이 직접, 그리고 여러 동료와 함께 운영하는 이 축제는 첫 발걸음의 밀도와 열정을 잃지 않았다.
둥지로 삼은 공간부터 특이했다. 가좌역 부근에 자리 잡은 서보문화예술공간은 대안적 성격을 지는 문화공간으로 원래도 전시, 공연 등이 이뤄지는 곳이다. 다양한 범위를 다루는 예술 기업 두루두루 아티스트 컴퍼니가 함께 위치한 이 공간은 작았지만 예사롭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단출한 입장 부스와 함께 카페가 있었고, 티켓을 받고 주문한 맥주 한잔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모든 공간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렇게 작은 갤러리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이라니. 약간은 우려와 기대가 뒤섞인 마음으로 행사장 문을 열었지만, 내부로 진입하면 걱정은 금세 사라진다.
1층에는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는 포그머신과 함께 메인 무대, 음향 콘솔이 있었고, 그 옆에는 포토그래퍼가 직접 사진을 찍어주는 독특한 사진 부스가 자리 잡았다. 시선을 위로 올리면 굿즈 샵과 오페라 테라스석을 연상케 하는 좌석이 복층을 꾸몄고 2 계단 밑에는 공연 중간중간의 여흥을 책임질 DJ 부스가 세워졌다. 또 ‘RSS Pharmacy’라는 이름으로 토크 세션과 작은 공연이 열리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으니 작은 규모에도 갖출 건 다 갖췄다. 넓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을 밀어 넣기보다는 밀도 있는 음악에 집중한 곳. 공간, 사람, 음악의 삼위일체가 근사했다.
주요 콘텐츠는 역시 한국 블랙뮤직의 현재를 체감할 수 있는 음악 공연들이다. 힙합 위기론이 흘러나온 지도 한참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힙합이 강세기는 하다. 그러나 이를 제외한 우리나라의 흑인음악도 다양한 갈래로 성장하고 있음을 증명하듯 소울과 알앤비, 펑크(funk), 재즈 기반의 팀들이 각자의 매력을 마음껏 뽐냈다. 최근 독창적 감성의 < Weather >를 발매한 강지원, 라이브 연주의 강자 워크맨쉽(WKMS), 재즈 보컬리스트 김유진 등 직접 보지 못한 무대가 아쉽지만 직접 몸과 눈으로 느낀 공연만으로도 페스티벌의 열기를 전하기엔 충분하다.
신예 알앤비 싱어 오티스 림(Otis Lim)은 자기 목소리의 매력을 제대로 뽐냈다. 음원에서 느껴지는 차세대 보컬리스트로서의 역량뿐만 아니라 실제로 본 그에게는 쾌활과 진지가 공존하는 인간미가 넘쳤다. 금관악기를 불다가 마이크에 대고 찐득하고 유려한 보컬까지 선보인 큐 더 트럼펫(Q the trumpet)의 무대도 인상적이었다. 흔히 볼 수 없는 연주-가창의 스위칭을 공연 내내 진행했고, 다른 아티스트의 연주에도 여러번 객원으로 참여해 너른 영향력을 뽐냈다. 디스코와 펑크(Funk) 중심 셋리스트를 선보인 디제이 소울스케이프는 메인무대 휴식 시간의 무료함을 즐겁게 달래주었다.
보컬 담예와 래퍼 쿤디판다, 프로듀서 비앙, 베이시스트 누기가 합심한 밴드 플랫샵(Flatshop)의 무대는 어떠한가. 진지함이 능사는 아니라는 듯 ‘아이스 스케이팅’ 같은 곡에서 유쾌하고 발랄한 매력을 제대로 뽐냈다. 자연스러운 고양감을 뜻하는 ‘내츄럴 하이’를 공연 내내 설파하던 진보의 무대도 하이라이트로 기억될 만한 순간이었다. 녹진한 알앤비와 소울의의 정수를 선보이며 큰형님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다했다. 최근 프로젝트 그룹 포포모(PoPoMo)의 허쉬(Hersh)도 객원으로 참여해 멋진 무대를 꾸몄는데, ‘Tonight’의 레트로한 선율이 흘러나올 때 그 뜨거운 열기가 생생하다.
2023년 소울, 알앤비, 재즈 등을 녹여낸 < Peninsula Park >를 내놓은 소울 딜리버리가 선사하는 금요일 밤은 압권이었다. 연주 음악으로도 이 정도의 흥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최근 발매한 리믹스 버전처럼 ‘Whiskey’ 등의 곡을 자유롭게 편곡하며 분위기에 맞게 각자 악기 소리와 톤을 조율했다. 음악을 모르더라도 즐겁게, 그리고 4명이 한마음 한뜻으로 연주한다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지막을 장식한 따마(THAMA)는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로 올라운더로서 능력을 입증했다. 폐막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큐 더 트럼펫, 소울딜리버리와 플랫샵 세션들이 함께 마감 시각을 넘기며 무대를 이어갔다. 흥겨운 흑인음악 품앗이 현장이었다.
축제를 모두 관람한 후 가장 짙게 남은 인상은 위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울타리로 둘러친 VIP 구역도, 특정 아티스트만을 위해서 페스티벌에 방문한 관객도, 앞자리를 차지하고자 함께 축제를 즐길 그날의 동료를 밀치거나 분위기를 신경 쓰지 않고 소리를 내지르는 사람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전 무대를 달군 아티스트가 다음 무대를 관객석에서 함께 즐겼고 행사 관계자나 방문자 모두 같은 자리에서 뛰어놀았다. 그저 이 문화와 음악을 즐기기 위해 온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리듬을 즐기면 그만이었다.
분위기 형성의 주축에는 역시 소울 딜리버리 멤버들이 있었다. 키보디스트 하은은 직접 페스티벌의 굿즈를 영업하기도 하고, 다른 멤버들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는 등 실무를 도맡으며 관객과 인사하며 돌아다녔다. 관객 역시 이런 광경에 딱히 크게 개의치 않는듯 했다. 화려한 특수효과나 일방적인 괴성, 사람을 구분짓는 구역이 따로 없는 이 RSS 뮤직 페스티벌은 감상과 경험 측면에서 봤을 때 감상자와 실연자 모두 실로 평등한 음악 축제였다.
대중음악 페스티벌에도 다양성이 요구되는 지금 시점에 이렇게 아티스트가 주도하는 페스티벌은 긍정적인 대안이다. 색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이 운영할 수는 없을까? 겉핥기식 축제가 아니라 진짜 피부로 즐기고 느끼는 게 무엇일까? 이 문화를 제대로 즐기고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 RSS 뮤직 페스티벌 >은 이런 물음에 대한 진지하고 유쾌한 답변을 내놓았다. 태동하는 젊은 아티스트들이 스스로 모여 축제를 열었고 관객의 수가 어떻든 이들은 다 같이 즐겁게 해냈다. 들려주는 음악만큼이나 보여주는 음악도, 함께하는 음악도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름다운 축제의 여흥은 홍대 상상마당 라이브 홀에서 열렸던 소울딜리버리 단독 콘서트로 이어졌다. 곳곳에 < RSS 뮤직 페스티벌 >의 흔적이 보였고 그때 마주한 관객들은 공연장에도 많았다. ‘소울’이라는 이국적인 장르를 ‘넋’이라 번역하고 이 모두를 함께 즐기고 발전시켜나가자는 그들의 주창을 듣고있자니, 이제는 의미와 존재가 흐릿해진 ‘신’이 보였다. 자기 음악만 만들고 영역화하는 게 아니라 친구와 타인까지 품을 수 있는 포용력. 요즘들어 실감하기 너무나 어려운 진정한 음악의 힘. 흥겨운 리듬이 충만하고, 우리나라 흑인음악의 성장을 소망하고 기원하며, 동료들과 사랑이 가득한 따뜻한 가을이었다.
사진: 리듬소망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