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자 김형준 인터뷰
김형준
1990년대 후반, 우후죽순처럼 신생한 아이돌 사이에서 태사자는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확보했다. 스트릿 패션 열풍 속 깔끔히 차려입은 세미 정장과 수려한 비주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면, 대표곡 ‘도’, ‘Time’ 그리고 ‘애심’은 실력을 입증했다. 해체 후 18년 만에 선보인 < 슈가맨 3 >의 완전체 무대에서도 이들은 여전히 우상이었다. 그렇기에 방송에서 밝힌 리더 김형준의 근황이 더욱 대조적으로 다가왔다.
진솔하고 꾸밈없는 인터뷰였다. “택배 기사였을 때가 더 행복했다”며 연예계 활동 당시의 고충을 드러내기도 했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 가려진 그룹 해체 후의 삶을 조명하며 후배들에게 조금 더 세상을 멀리 보라는 진심 어린 조언 또한 남겼다. 선뜻 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여유와 미소를 장착한 그에게 리더의 노련미가 돋보였다.
TV 프로그램 등을 통해 근황이 어느 정도 알려진 상황이다. 현재는 음악과 거리가 있는데.
그렇다. 태사자 활동 종료 후 공백기가 상당히 길었다. 좋은 기억도 있지만 어린 나이에 세상의 쓴맛을 느껴 회의감이 들었기에 크게 미련은 없었다. 그래서 연예계 생활은 젊은 시절의 추억으로 남기고 다른 분야에 도전해왔던 것이다. 만약 해체 후에도 계속 앨범을 냈다면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아있겠지만 지금은 많이 내려놓은 상태다. 오히려 색다른 이미지의 내가 좋다.
한 시대를 풍미한 아이돌이었다가 ‘쿠팡맨’으로 근황을 알려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한편으로 열심히 산다는 이미지가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부담스러울 때도 종종 있다. 평일 낮에 나갈 일이 있으면 살짝 눈치가 보일 때도 있다. 그래도 이미지가 안 좋은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솔직하게 나의 생활을 털어놓는 게 편하다.
‘쿠팡맨’으로 근무할 때는 어땠나?
사실 지금보다 그때가 더 행복했다. 일단 잡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고민과 스트레스가 많을 때 머릿속이 복잡하니까 고통스럽지 않은가. 그런데도 당장 몸이 힘드니까 잠을 푹 잘 수 있고 나름대로 운동도 되고 돈도 벌 수 있어서 행복했다. 2년 전까지 하다가 지금은 그만 둔 상태다. (근무 중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을 것 같다.) 당연히 나를 못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근무했을 때 겨울이라 모자도 푹 눌러쓰고 옷으로 최대한 가렸다. 나중에 다른 분들과 친해지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처음부터 알아봤다고 한다. (웃음) 3개월 지나니 일하느라 정신없어서 다른 사람이 날 알아보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쿠팡맨’ 당시 생활하는 데 있어 경제적 부담은 없었는지.
나는 레알 마드리드 CF를 정말 좋아한다. 그 팀의 축구 경기가 있는 날만 쉬고 그 외에는 계속 일했다. 밤낮으로 일하다 보니 돈을 쓰지도 못했다. 1년에 한 번,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해외로 약 2주 정도 다녀온 여행이 유일한 낙이다.
태사자는 4집 < 도약 >을 끝으로 해체했다. 이는 자연스러운 절차였나 혹은 개인 의지였나?
일단 멤버 각자의 생각이 달랐다. 연기, 솔로 활동 등 다양한 선택지가 생기더라. 모두의 마음이 맞았으면 앨범을 더 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룹 계약을 제의하는 회사도 있었고 기대를 어느 정도 하긴 했지만 멤버의 생각이 다르다 보니 뿔뿔이 흩어졌다.
태사자는 다시 뭉칠 계획이 있나?
지금도 함께 공연을 하고 있다. 사실 < 슈가맨 3 > 출연 이전에 멤버들에게 몇가지 공약을 내걸었다. 이 공약을 하나라도 안 지키면 나는 할 생각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첫 번째는 ‘멤버들끼리 술 마시지 않는다.’ 일단 컨트롤하기 힘들다. (웃음) 활동할 때 술 마시고 싸웠던 기억이 있고 항상 리더인 내가 중재했기 때문에 피곤했다. 두번째, ‘새로운 음원을 내지 않는다.’ 후배 아이돌을 보면서 참 잘한다고 느꼈다. 일단 90년대는 트레이닝 시스템이 체계적이지 않았고 알아서 습득해야 했던 문화가 깔려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비교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약간 완벽주의라 그런지 그 시절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태사자만의 단독 콘서트는 없다.’ 그러나 이 조건은 내가 양보 아닌 양보를 했다. 코로나 시기와 겹치는 바람에 아쉽게도 관중 없이 단독 콘서트를 진행했었다.
태사자의 노래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을 뽑아달라.
정규 1집 < 태사자 >의 수록곡 ‘Time’을 제일 좋아한다. 미디움 템포의 편안한 멜로디가 매력적이다. 지금 들어도 좋다. 타이틀 ‘도’가 인기가 많았지만 노래방에서 사랑받는 곡은 ‘Time’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 스타일은 ‘사랑 눈물 기쁨 상처’이다. 1990년대 대표 작곡가인 장용진 님이 작사와 작곡을 맡으셨다. 메인보컬 (김)영민의 보컬이 잘 녹아 들어 우리 팀에 어울리는 댄스곡이라고 생각한다. 영민이 보컬에는 약간 슬픔이 묻어 있어서 마냥 밝은 곡보다 마이너한 발라드 댄스 스타일이 꽤 잘 맞았던 것 같다.
1집이 좋은 반응을 얻은 반면, 2집 < 태사자 二 >는 느낌이 사뭇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생각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당시 소속사는 연기자 위주의 기획사였다. 회사에서 처음 기획한 가수가 우리 팀이었는데, 태사자의 데뷔가 예상 외로 성공을 거두면서 2집을 빨리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10곡을 녹음하고 안무와 뮤직비디오 등 모든 걸 준비해야 하니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2집이 큰 성과를 못 내서 3집 < 2000-1 >은 그래도 투자를 했다. 그러나 한 번 꺾이면 반등하기 쉽지 않은 곳이 가요계였다.
연습생 시절 또한 궁금하다. 태사자의 준비 과정은 어땠나?
보컬 연습의 경우 다른 가수의 노래를 듣고 혼자 연습했다. 당시에는 레슨 개념이 없었다. 예전에 홍대에 당인리 발전소가 있었는데, 회사에서 그 옆 건물 지하에 연습실을 하나 만들었다. 거의 감금 생활이었다. (웃음) 약 8개월의 연습생 기간 중 집에 두 번 갈 정도였다. 안무 선생님은 있었지만 단계별로 춤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지금 데뷔하는 후배들처럼 오랜 기간 연습을 했다면 어땠을까 궁금하긴 하더라. 살 빼라고 밥도 안 줬다.
태사자보다 조금 앞선 선배로 에이치오티(H.O.T)와 젝스키스가 있었다. 이들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두 그룹은 나에게 있어 조금 다르다. 에이치오티는 내가 학생일 때, 젝스키스는 감금 상태의 연습생일 때 데뷔했다. 그래서 젝스키스의 무대는 거의 챙겨보지 못했다. 에이치오티는 아주 좋아했었다. 최근 < 2024 타임캡슐 슈퍼콘서트 >에 태사자가 출연했는데 (장)우혁 씨와 (이)재원 씨도 있었다. 그때 ‘캔디’와 ‘전사의 후예’의 무대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관객처럼 몰입하게 되더라. (웃음) 생각해 보니 에이치오티 1집 활동 당시를 TV로만 접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실제로 엔알지(NRG)와 라이벌 의식을 가졌는지.
초반에는 라이벌 의식이 심했다. 회사에서 ‘엔알지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계속 주입했다. 그들에게 지고 오면 심하게 혼났다. 한번은 주말 방송에서 엔알지와 복싱 대결을 했던 적이 있다. 예능이니 힘을 빼고 임해야 했는데, 시작 종이 울리자마자 서로를 향해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웃음) 나중에는 활동을 계속 같이하고 지방 공연하려고 같은 버스를 타게 되면서 친분이 생기더라.
태사자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데뷔했을 때가 제일 생각난다. 데뷔 무대 당시 클론과 DJ DOC 형들과 함께 대기실을 썼는데, 나의 우상과 함께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그리고 98년에 참여한 ‘제4회 드림콘서트’.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을 채운 수많은 관객 앞에서 무대를 올리니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아이돌로 진로를 정하게 된 계기는?
활동 당시 예쁘장한 이미지가 있었지만 학교 다닐 때는 그 이미지가 콤플렉스였다. 어릴 때는 강한 남자이고 싶지 않은가. 그래서 나를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바로 ‘갱스터 랩’이었다. 당시 N.W.A, 닥터 드레, 스눕 독 음악에 영향을 받아 사람들 앞에서 랩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 때 포켓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손님이 없는 타임에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가끔 혼자 랩을 했다. 바닐라 아이스, 쿨리오의 랩을 따라 부르다가 사장님이 이를 듣고 손님이 계실 때도 한번 해보라고 하셨다. 마침 태사자 프로듀서와 캐스팅 디렉터가 방문했고, 나의 무대를 보고 캐스팅한 것이다. 운이 좋았다.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하는 것에 대해 전혀 터치가 없었다. 아마 아이돌을 잠깐 하다가 말겠지 하는 생각으로 허락하신 것 같다.
축구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축구는 또 하나의 자아가 된 것 같은데.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축구 해설가나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에 몇 차례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 표정을 보고 놀랐다. 약간 미친 상태였다.
개인 유튜브 < 준 인더하우스>에서도 축구를 주로 다루더라. 축구 유튜브로 방향을 정한 계기가 있는가?
사실 작년에 살이 엄청나게 쪘다. 거의 90kg까지 체중이 늘었는데 그때 마침 레트로 공연을 출연했다. 나를 보러 왔을 팬들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대했을 텐데 넙데데한 놈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웃음) 그래서 70kg이 될 때까지 라이브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렇게 유튜브를 개설하게 되었다. 하다 보니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중계도 하고 있다. (왜 레알 마드리드 CF인가?) 네덜란드의 판니스텔루이 선수를 정말 좋아했다. 그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소속일 때부터 좋아했는데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면서 나도 레알의 팬이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 응원가 'Hala Madrid! y nada más' (나아가자 마드리드, 아무것도 말고)
< 나 혼자 산다 >, <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에서 개인사를 밝혀 시청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방송 출연에 대한 마음가짐이 궁금하다.
사실 < 슈가맨 3 > 출연 이후에 예능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능에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태사자 당시에는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제대로 못 하면 매니저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제일 힘들었던 방송은 < 서세원쇼 >였다. 전국에서 말 잘하는 사람들이 한 군데 모였는데 그 사이에서 어떻게 웃음을 줄 수 있겠는가. 어린 마음에 위축 들었다. 그래서 최근에 다시 예능에 출연했을 때는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연차로 인한 나름의 대우도 받아서 힘들지는 않았다.
< 슈가맨 3 >에 출연하여 태사자로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방송 섭외 요청을 계속 거절하다 수락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그전까지 방송에 다시는 나오고 싶지는 않았다. 길거리를 다녀도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 다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참 행복했다. 그런데 방송에 나가면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이 생기지 않는가. 그래서 거절했다. < 슈가맨 2 > 끝날 때쯤 또다시 연락이 와서 별로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마침 그 때 멤버 박준석과 함께 살던 때였다. 무심결에 준석이에게 ‘나간다고 할 걸 그랬나?’라고 하니까 준석이가 바로 작가님께 출연한다고 연락하더라. (웃음)
경험자로서 현재의 케이팝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다들 너무 잘한다. 그런데 최근에 방송한 < 2024 마마 어워즈 >의 지드래곤 무대를 보니까 느낌이 확실히 다르긴 하더라. 내가 힙합과 알앤비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지드래곤, 태양 그리고 박재범의 개성 강한 스타일이 눈에 들어온다.
요새 아이돌에게 1세대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말 어렸을 때부터 긴 연습 기간을 갖는 어린 친구들이 많다. 혹여나 실패했을 경우에 트라우마가 클 수도 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할 수도 있다. 내가 그랬다. 나름 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공부를 조금 하긴 했지만 막상 그룹이 해체하니 미래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꽤 길어졌다. 거의 집 밖에 안 나가고 사람을 마주치기도 싫었다. 누군가 “뭐하냐”고 물어보면 그냥 집에만 있었기에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가수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미래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빛이 있는 만큼 그림자가 크고 짙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도전을 끊임없이 해왔다. 그러한 인생을 돌아봤을 때 태사자 활동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좋은 기억보다는 고생했던 시간이 더 크게 다가와서 늘 아쉬움이 있다. 트레이닝을 더 체계적으로 받았더라면, 앨범이나 무대의 완성도가 높고 개인적인 만족감도 충족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렸을 때부터 댄스 음악을 좋아했던 터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구나’하는 즐거운 생각으로 임했지만 막상 무대를 하면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태사자’는 조금 아쉬웠다.
앞서 댄스 음악을 즐겨 들었다고 언급했는데, 나의 꿈을 실현해 준 음악이 있는가?
압도적으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마이클 잭슨 주연의 영화 < 문워커 > 레이저 디스크(LD)를 우연히 봤는데 정말 충격이었다. 그 이후로 마이클 잭슨에 거의 중독된 수준이었다. 중학생 때는 단체로 다른 학교와 미팅을 하게 되어 노래방을 갔다. 근데 내 친구가 나보다 노래를 잘해서 어떻게 어필할까 그 짧은 시간에 고민했다. 원래 음악의 시작은 이성에 어필하기 위함이 아닌가. (웃음)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가 막 데뷔한 시기라 랩을 밀고 나갔다. 그때부터 나의 무기는 랩이었다. 상아 레코드에 가서 힙합 CD를 사곤 했다.
특히 듀스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내가 가수가 되고 나서 제일 기분이 좋았던 순간은 1집 < 태사자 >의 앨범 커버를 안성진(JAM) 사진작가님께서 촬영해 주신 경험이었다. 그분이 듀스 앨범 커버를 담당했다고 들었다. 듀스를 찍은 분이 나를 찍다니, 정말 행복했다. 그 정도로 팬이다. 고등학교 때는 타워레코드 사인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아마 내 또래는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듀스의 노래 중 1집 < DEUX >의 수록곡 ‘나의 바보같은 이야기’를 추천하고 싶다. 고등학생 때 날씨가 화창한 날 이 노래를 아침 알람으로 설정했다. 자동으로 카세트테이프가 돌아가면서 흘러나오는 밝은 멜로디가 따뜻한 햇살과 함께 어우러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중이 태사자를 어떻게 기억했으면 좋을지 궁금하다.
태사자 데뷔 전에 멤버들은 노래, 춤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대부분 학교 내에서 ‘춤 좀 춘다’ 수준이어서 우리는 퍼포먼스에 차별성을 두고자 했다. 동작 하나하나 똑같이 맞추는 칼군무를 추구했다. 그래서 개개인으로 봤을 때보다 팀으로 뭉쳤을 때 더 매력적인 그룹, 그리고 열심히 하는 그룹으로 기억되면 좋을 것 같다. 추가로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부끄럽지만 비주얼도 출중했던 것 같다. (웃음)
지금의 본인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가?
물론 돈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이제는 돈을 쫓지 않다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예전에는 쇼핑도 많이 했지만 언젠가부터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3년 전부터 옷은 사지 않는다.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은 어쩔 수 없이 산다. (웃음) 점점 물건에 대한 욕심이 사라진다. 특히 명품, 차에 대한 관심이 아예 사라졌다. 그리고 대부분의 연예인들이 피부과를 꾸준히 다니면서 최대한 변하지 않는 모습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모습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가끔 '쟤 고생 많이 했나 보네'라는 댓글을 볼 때는 마음이 아프긴 하다. (웃음)
마지막으로 이즘의 공식 질문이다. 김형준의 인생 음악을 뽑아달라.
마이클 잭슨의 ‘We are the world’. 내 인생에서 처음 구매했던 카세트테이프가 이 곡이었다. 처음으로 부모님을 졸라서 사달라고 한 기억이 있다. 지금 들어도 전율을 느낀다. 마이클 잭슨의 댄스 음악도 멋있지만 ‘Human nature’처럼 느린 템포의 노래도 좋아한다. 제일 많이 들은 마이클 잭슨의 앨범은 < Bad >인데 최근에는 < Off The Wall >이 확 꽂힌다. 그리고 갱스터 랩의 영향을 받은 투팍의 ‘Hit ’em up’도 자주 들었다. 국내 가수는 지드래곤을 좋아한다. 특히 < One Of A Kind >의 김윤아와 함께 한 ‘Missing you’는 다시 들어도 세련되더라. 그리고 후디의 ‘한강’은 따뜻한 봄날에 정말로 한강을 가고 싶게 만드는 곡이다. 뉴진스의 노래는 다 좋다. (웃음) 마침 퍼렐 윌리엄스도 좋아하는데 ‘Supernatural’에 참여한 사실을 알고 역시 내 귀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진행: 임진모, 임동엽, 임선희, 한성현
정리: 임선희
사진: 한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