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올해의 해외 싱글
국내는 힙합이 저물고 젊은이들의 K팝이 신을 채웠지만, 해외는 어른들의 음악인 컨트리가 한해를 지배했다. 재밌는 점은 백인의 전유물을 흑인들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사건 역시 흑인의 전유물인 힙합에서 나왔다. 두 거물의 디스전에 대중의 시선이 모였다. 그 틈을 파고든 솔로 가수들의 저력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이렇듯 단순하다 하면 단순하고 복잡하다 하면 복잡할 해외 음악 흐름을 완벽히 정리할 수는 없지만, 이즘만의 기준으로 2024년을 정의했다.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임동엽)
벤슨 분(Benson Boone) 'Beautiful things'
숏폼을 단지 유행이 아니라 시대라고 정의해야 할 정도다. 플랫폼의 규모가 거대해질수록 더 단순하고 직관적인 요소가 핵심이 된다. 여행 사이 비춘 예쁜 노을 등 낭만적인 순간들의 배경에 곡이 선택되며 인기를 끈 근본적인 이유에는 가창력이 설파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SNS가 전 세대에 걸쳐 힘을 쥐고 있는 지금, 음악이 영상에 얼굴을 비추는 건 치사한 수법이 아니라 당연지사인 용법이다. 1분 이내에 폭발적인 노래로 전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꽂았다.
2002년생의 젊은 벤슨 분의 시간은 두 배로 흐르는가. 곡 전반에 중후함이 깃든 호소력이 흐른다. 부드럽게 표현한 도입부를 지나 기타 선율이 내달릴 때부터 포효하듯 노래한다. 한 곡 안에서도, 몇 초 안에서도 변화무쌍한 멜로디를 만개하며 가수가 갖추어야 할 힘을 되새긴다. 실력이 춤, 외모, 마케팅 등 여러 갈래로 찢어진 현 시대에도 가장 쉬운 설득력은 목소리에서 온다는 사실. 그 변하지 않는 본질을 올해 가장 잘 알린 싱글이다. (정기엽)
비욘세(Beyoncé) 'Texas hold 'em'
어차피 한 번쯤 다뤄야 할 역사였다면 결국 누가, 언제 하느냐가 쟁점일 것이다. 서서히 불어온 컨트리 열풍은 결국 작년에 이르러 만개했고, 금년에도 그 신바람은 꺼지지 않았다. 라나 델 레이와 포스트 말론을 비롯해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팝 스타가 흐름에 몸을 실었고, 수십 년 경력의 거장들도 시류에 탑승해 복귀를 알렸으며 컨트리와 힙합의 크로스오버로 탄생한 샤부지의 ‘A bar song (Tipsy)’은 빌보드 싱글 차트 19주 1위의 기염을 토하며 올해를 장식했다.
비욘세 또한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그 방향성은 완전히 다르다. 그는 묻는다. 미국에서 컨트리라는 장르가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 단번에 떠오르는 인종적 논제 위로 흑인 여성이 컨트리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컨트리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흑인의 역할을 조금도 부정할 수 있는가. 미국 대중음악의 발전사에는 언제나 흑인이 있었다는 메시지 하나로 시작한 그의 삼부작 프로젝트 중 허리에 위치한 < Cowboy Carter >의 대표곡 ‘Texas hold ’em’. 비욘세는 ‘잊힌 역사’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 간의 적확한 지점을 교차하며 경쾌하고도 엄중한 질문을 남겼다. (신동규)
채플 론(Chappell Roan) 'Good luck, babe!'
새로운 21C 팝스타의 재림이다. 본인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서서히 자신의 색을 찾아가던 채플 론에게 ‘Good luck, babe!’이 안긴 성과는 견고하다. 그건 2017년 데뷔 이후 음악으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좀 더 선명해진 것에 있으며 대중이 음악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을 때 정확히 움직이고 반응하는가를 깨달은 그 순간에서 기인한다. 1980년대 풍의 쉬운 신스팝 사운드에 캐치하고 편안한 멜로디. 그리고 그 위에 드랙 퍼포머로 화려한 분장을 한 채플 론의 모습이 겹쳐진다.
레즈비언 여성으로서 여성성을 과하게 치장한 모습으로 무대에 서는 그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음악적 자아’라고 표현한다. 이 싱글은 채플 론의 음악적 자아가 확고히 자리 잡았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노래 안에 자리한 보수적인 미국 중서부 출신의 여성이 무엇을 깨닫고 어떻게 행동하기로 ‘결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여성인 나를 사랑함에도 그 감정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동성의 ‘babe’에게 띄우는 차가운 러브송. 살아가며 짙은 가면을 써본 사람 일수록, 더욱 깊게 이 노래에 매료될 것이다. 채플 론에게 빌보드 핫 100차트 4위란 최고 성과를 안겨주기도 했다. (박수진)
호지어(Hozier) 'Too sweet'
현지에서 반응은 더 뜨거웠다. 대형 유럽 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섰고 모든 이들이 그의 노래를 따라불렀다. 엘튼 존을 상기한 두텁고 성스러운 가창의 2013년 작 ‘Take me to church’ 이후 약 십 년 만에 재현한 영광은 대형 팝스타들의 틈바구니에서 미국과 영국의 싱글 차트까지 석권했다. 한동안 미국 시장과 떨어져 있던 아일랜드 음악가에게 빌보드 핫 100 꼭대기를 안겨준 건 역시나 곡의 힘에 있다.
작곡 솜씨에서 기인한 물 흐르듯 유려한 선율과 복고적 분위기에 두른 현대적 사운드 프로덕션이 세대를 아울렀고 ‘I take my whiskey neat, my coffee black and my bed at three’처럼 증류주와 블랙커피의 “아일랜드적” 이미지를 드리우기도 한다. 일견 단순한 곡 구성임에도 장기인 기타로 쌓은 리듬 골조에 종소리와 오르간이 서서히 스며드는 중독적 음률이 대중가요의 간결성과 명확성을 환기했다. 화려한 팝스타들 사이에서 키다리 아저씨처럼 듬직하고 우직하게 음악으로 밀고 나가는 호지어의 존재가 다시금 반가운 순간이다. (염동교)
제이미 엑스엑스(Jamie xx) 'Baddy on the floor (Feat. Honey Dijon)'
자유분방한 자기표현을 기치로 삼는 찰리 XCX 진영과는 또 다른 내성적 분출의 역학이다. 오색찬란한 빛을 무채색 파동으로 변환한 < In Waves >의 선봉이자 전자음악가 제이미 엑스엑스의 대표 넘버로 남을 ‘Baddy on the floor’는 한 해를 대표할 자격이 충분하다. 군중은 이 냉철한 표제에 억지스럽지 않게 무의식적으로 인도되었다. 그리하여 도달한 ‘플로어’는 전자음악에 익숙지 않은 이들의, 혹은 발을 내딛길 망설이거나 스피커의 괴성에 치를 떠는 ‘악인(惡人)’들의 안식처. 재야에 숨어있던 일렉트로니카 잠룡이 꾸민 반란의 실체다.
시작의 사이렌 소리는 차가운 서정성이 하우스 지배를 엄포한다는 신호다. 주동자는 소수의 전자음과 비트, 자문은 소울 펑크(Funk)에 위임한 너무나 간단한 전략이다. 80년대에서 가져온 주요 멜로디 소스는 기껏해야 음표 한 계단씩을 오르락내리락할 뿐이고 절정을 유도하는 브라스 연주는 음 하나의 연속에 그친다. 단순한 리듬과 음률의 반복이지만 놀랍도록 흥미진진하다. 흔히 그를 미니멀리즘이라는 순박한 단어로 포장하나 실상은 폭력적인 점거다. 밀려드는 물결에 감각기관은 혼비백산, 머리는 지휘 통제권을 포기, 말초신경은 어처구니없이 잠식당했다. (손민현)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Not like us'
올해의 팝 중심은 컨트리였지만 최대의 이슈는 힙합에서 나왔다. 켄드레이크 대전, 서부의 기둥 켄드릭 라마와 캐나다 출신의 히트 전문 래퍼 드레이크의 챔피언 결정전으로 2024년 음악계가 불타올랐다. 승기는 단풍이 진 늦봄 캘리포니아 컴튼에서 휘날렸다. 음악적으로도, 내용 면에서도 ‘Euphoria’를 시작으로 융단 폭격을 가한 켄드릭 라마의 완승으로 마무리됐다. 링 위의 승자는 한 명 뿐, KO펀치로 날린 ‘Not like us’가 제대로 먹혔다.
웨스트 코스트에 새로운 국가(國歌)가 탄생했다. 디스전이라는 무거운 분위기와는 다르게 이미 우승을 확정한 듯 긍정 바이브로 가득한 반복적인 비트가 인상적이다. 휴전, 혹은 종전의 이 팡파르는 빌보드 HOT 100에서 정상을 차지하며 드레이크의 대중성과는 조금 다른 대중적 지지까지 완벽하게 얻었다. 켄드릭 라마는 이 기세를 몰아 진짜 낙엽이 져서 거름이 되고 있는 늦가을에 정규 6집 < GNX >를 발매하며 화제성을 적극 활용했다. (임동엽)
매기 로저스(Maggie Rogers) 'In the living room'
부드럽고도 강단 있는 보컬 톤으로 컨트리, 포크 팝 분야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던 매기 로저스의 'In the living room'은 노스탤지어와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담아낸다. 거실에 누워 지독하고도 갑갑했던 사랑의 순간들을 차근차근 꺼내보는 것처럼 점진적인 곡 구성에 올라탄 보컬은 감정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타면서도, 절제와 분출의 지점을 정확하게 찌른다.
셰릴 크로우, 앨라니스 모리셋, 나탈리 임브룰리아 등 1990년대 후반에 활약한 수많은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감성을 2020년대에 그대로 재현한 듯한 만듦새는 오히려 신선한 포인트로 작용한다. 그 시절의 작법을 본따 자신의 목소리에 이식하니, 쉽게 질리지 않는 클래식한 스타일 특유의 보편성이 자연스레 확보되었다. 덕분에 매기 로저스는 정통의 계보를 따르면서도 현시대에서 유니크한 위치에 있는 아티스트로서 한 걸음 도약하게 되었다. (김태훈)
로제(ROSÉ) & 브루노 마스(Bruno Mars) 'Apt.'
노래의 탄생 배경처럼 단순하고 간결하며 신나고 즐겁다. 곡이 재생되는 2분 50초 동안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거리게 만드는 ‘APT.’는 대중음악의 본질을 꿰뚫었다. 로제는 영국 밴드 레이시의 ‘Kitty’를 리메이크한 토니 배실의 ‘Mickey’를 바탕으로 그 위에 브루노 마스 스타일의 유려한 멜로디 라인과 펑크 록의 에너지를 얹어 매력적인 신축 아파트를 건설했다. 브릿지 다음에 등장하는 메인코러스와 백업보컬의 폭발력과 하모니는 그동안 감추었던 로제의 이면을 드러내고 개러지 록 스타일의 코디네이션과 뮤직비디오 세트장은 대중에게 익숙한 블랙핑크의 로제를 순간적으로 망각하게 한다.
채영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을 넘어 많은 사람들이 푹 빠진 ‘APT.’는 싸이의 ‘강남스타일’, 방탄소년단의 ‘Dynamite’, 피프티 피프티의 ‘Cupid’와 함께 글로벌 현상을 구현한 K팝 노래로 짧은 시간에 전 세계 사람들을 빠르게 입주시켰다. 무엇보다 장작 패듯 파워 드러밍을 선보인 로제와 술에 취한 듯 진상 떠는 두 주인공의 모습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소승근)
사브리나 카펜터(Sabrina Carpenter) 'Espresso'
Say you can't sleep baby I know
(잠이 안 온댔지, 나도 알아 자기야)
That's that me espresso
(그게 바로 나야, 네 에스프레소)
뻔뻔할 정도로 위트 있는 가사가 전 세계를 중독시켰다. 설탕처럼 달콤한 누 디스코 음악은 그녀의 이름을 진하게 각인시킨다. 어린 시절 배우로 데뷔한 후 10여 년간 줄곧 앨범을 냈지만, 명성은 계속해서 그녀를 비켜갔다. 올리비아 로드리고와 삼각관계 스캔들에 휘말리고 한참을 오해와 방황 속에서 눈물을 흘렸으며, 이런 과정 또한 모두 음악으로 남았다. 고달픈 시간을 견디고 나자 이제는 웃음과 농담, 그리고 여유를 회복했다. Espresso의 성공은 ‘어느 날 눈을 뜨자 스타’가 아니라 굳세게 성실과 단련으로 쌓은 보상이다. (김반야)
샤부지(Shaboozey) 'A bar song (Tipsy)'
기록을 남긴 노래는 역사적 예술적으로는 몰라도 한해 결산에서는 반드시 기록되는 특권을 갖는다. 신기록 수립은 못이뤘지만 빌보드 싱글차트 19주 정상 타이 행진은 광포했다. 사실 아프로 아메리칸이 백인 컨트리음악과 뒤섞이는 것은 인종적 배반이자 탈골로 오랫동안 경원해왔지만 갈등의 와해와 통합이란 음악 본질적 가치를 전제하면 지금이 어쩌면, ‘이념과 전쟁과 정치로 갈라진 세상, 음악으로 퓨전되어야 한다!’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호소처럼, 제대로 굴러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백인이 하는 것보다 컨트리 색깔이 단정하고 깔끔하다.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의 불필요한 순혈주의를 넘어서고, 콘텐츠에 현실흐름도 담아냈다는 점에서도 곡은 특별하다.
백인 입장에선 ‘밖에서 온 것’이 우리 영토의 맥락 속에 파고들어 우리의 상석을 불사르고 끝내 우리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는 푸념이 나올 만하다. 다 떠나서 ‘한 잔이 두잔 되고, 세 잔이 되고, 네 잔이 되는’ 모처럼의 부어라 마셔라 술판 묘사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소사이어티로 한하면 통렬하다. ‘리플리’를 쓴 그 소설가는 “예술가에겐 음주가 필수. 그래야만 진실과 단순성, 원초적인 감정을 마주할 수 있다”고 권주(勸酒)하지 않았나. 한 번만 들어도 단숨에 곡이 포착되는 가차 없는 흡수력은 ‘팝 DNA의 자연 발로’로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들으면 들을수록 대중적 공감은 번식되고 술 파티 욕망은 지속 증폭된다. 괜히 노래가 오래 간 것이 아니다. (임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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