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올해의 국내 앨범

by IZM

2024.12.15



야속할 정도로 K팝이 1년 싱글을 지배했다 하더라도 그 압도적 힘은 앨범의 영역까지 완전히 미치지는 못했다. 전례없는 대형 싱글의 존재감 아래 필자들은 어느 때보다 작품성과 의미를 담아 개인적인 취향의 작품을 선별하고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숙고와 논의를 거쳐 10장의 앨범을 단상에 올렸다. 그렇게 당당하게 돌아온 록, 완숙미와 세련미를 갖춘 알앤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힙합 등 K팝을 넘어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리스트가 완성되었다. 물론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손민현)




김범수 < 여행 >
콘셉트, 비주얼, 칼군무, 글로벌, 세계관 등 치장과 장식이 난무하는 K팝과 대척 지점에서 시작한, 기조가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25년의 이력은 이전 고음의 포효와 달리 차분하고 조금은 먼발치로 물러나 더듬는 고백과 관조의 정서로 나타났다. 요란함과 고속이라는 이 시대의 통화(通貨)를 무르고 자아라는 무전 지대로 여행을 떠나 ‘표류와 저류의 교차’를 꾀한 것이다. 히트와 화제로 정체성이 결정되는 작금의 현실과 손절하는 이런 역행이 앨범의 중량을 높였다. 경청하면 고요한 수동성 아닌 꿈틀거리는 운동성을 꿰차는 환희가 따른다.  


김범수는 무엇보다 자신을 살리고 싶었다. 타이틀곡 ‘여행’을 비롯한 ‘걸어갈게’, ‘나이’ 그리고 ‘너는 궁금하지 않을 것 같지만’, ‘혼잣말’ 등 제목이 전하듯 그동안 하지 못했던 자기 응시와 대화에 나서고 있다. 최유리, 김지향, 한밤 등 싱어송라이터들이 준 곡임에도 모두 김범수의 자작 자전으로 들리는 게 놀랍다. 톤을 내려놨어도 극강의 보컬이 곡마다 살결, 핏기, 온습 그리고 서사를 부여한 덕이다. 2024년 최고의 ‘보컬 앨범’이자 동시에 K팝과 강한 콘트라스트를 이룬 앨범. 흐름을 위반하는 힘은 근사하다. (임진모) 




김수철  < 김수철 45주년 기념 앨범 너는 어디에 >
데뷔 45주년을 즈음하는 22년 만의 복귀지만 퇴색의 기미란 찾아볼 수 없다. 여류하는 세월에 지나온 날을 갈무리하듯 다채롭게 펼쳐놓은 여덟 곡은 김수철이 우리 대중가요에 뿌리내린 그 깊이와 상통한다. 덕분에 ‘못다핀 꽃 한 송이’와 ‘내일’의 새로운 자태, ‘젊은 그대’와 ‘나도야 간다’의 반가운 호기, ‘천년학’과 ‘기타 산조’ 속 빛나는 기개가 곳곳에서 얼굴을 내민다. 김수철만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대중에 기억되는 음악가는 그리 많지 않다. 이는 모름지기 그의 음악 모든 일면에 깃든 실험성과 도전 정신의 공이 크다. 어느덧 반세기에 가까워진 시간, 누구도 가지지 못한 선명한 나이테가 사뭇 경외롭다.


항상 새로운 결과물을 내놓으며 발전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수십 년씩 경력이 쌓이다보면 열정과 속도는 물론 모든 변인에 점차 둔화하기 마련이다. 하나 김수철은 최상위 선도를 유지해냈다. 오히려 규격을 벗어나고 형식을 비튼다. 역사의 맥을 이을 뿐 자가 복제나 답습은 없다. ‘너는 어디에’와 ‘휙’이 그간의 발자취를 아우르며 애환 소설의 한 장면을 그려내고, 오늘날의 청춘을 쓰다듬는 ‘아자자’와 ‘그만해’는 작품의 정수이자 곧 김수철의 정체성이다. 45년 간 고락을 함께한 기타를 10분에 걸친 록과 산조로 확장한 끝맺음까지 < 김수철 45주년 기념 앨범 너는 어디에 >에는 한 시대의 거장이 주조해낸 생목(生木)의 우짖음, 그 진실한 미학이 새겨있다. (신동규)




모스크바서핑클럽 < 짙은햇살 >
그저 막다른 꿈이 될 수 있음에도 어쩌면 우리의 노래가 세상을 구할지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으로 진동하며 분산하는 음악이 어떻게 아름답지 않을 수 있는가. 모스크바서핑클럽은 언젠가 자신들에게 내리쬘 한 줄기 빛을 기다리는 기도자들이면서 스스로 빛을 내기 위해 파형을 만드는 창조자들이다. 각자의 자유로운 취향과 생각이 한데 어우러져 함께 그린 한 폭의 거대한 콜라주에 햇살이 내리쬐니, 그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파도가 잔잔하게 일렁이는 듯한 절제를 지나면 감정 폭발의 카타르시스를 마주하고, 소강상태에서의 멜랑꼴리와 몽환 속에서 유영하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날의 활기와 안정이 느껴진다. 편안하고 선명한 멜로디의 '삼라만상'과 '유령극장', 강렬한 파동의 '지진관측소', 압도적인 색소폰 연주로 감정을 휘감는 'Prozac' 등 각자의 색을 가진 곡들이 모이니 하나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된다. 햇볕이 만들어낸 서늘한 그늘에서 연주한 음악이 빛을 낸 순간이었다. (김태훈)




솔루션스 < N/A >

‘Sounds of the universe’가 실린 2012년 데뷔작 < The Solutions >로 일찌감치 떡잎이 남달랐지만 < N/A > 속 발전과 도약은 눈부시다. 10년간의 담금질을 고스란히 반영한 솔루션스의 정규 3집엔 메인스트림적 소구력과 장르 음악 색채가 공생하며 록과 일렉트로니카의 절묘한 배합이 감각을 무한 자극한다. 두 축의 명확성에 장르 블렌딩까지 챙긴 13개 트랙은 본능과 말초 신경의 자극으로 내적 댄스까지 사정없이 유발한다.


인스트루멘틀의 강점을 살린 4~5분대 러닝타임 사이로 앰비언트 풍 ‘Annihilation’과 오묘한 제목의 ‘Iptf14hls’ 같은 짧은 트랙들의 완급 조절이 음반의 구성미를 살렸다. 베이스가 쫀득한 ‘N/a’와 고감도 록 ‘Fireworxx’가 나루(기타) 박솔(보컬), 권오경(베이스), 박한솔(드럼)의 물오른 기량을 드러내며 멤버들이 직접 꾸린 앨범 전반의 프로덕션도 고품질이다. 지속적인 싱글과 EP 발매 속 딱 하나 정규작의 아쉬움을 2024년을 수식할 만한 록 음반으로 불식했다. 밴드 뮤직의 명가 엠피엠지/해피로봇레코드가 배출한 또 하나의 수작. (염동교)




수민 & 슬롬 < Miniseries 2 >
전천후 알앤비 아티스트가 작품의 실권을 한 프로듀서에게 내어준 이유는 명확하다. 등장부터 정상급 인물들과 교류한 슬롬이 수민의 옆자리를 한치도 내어주지 않은 저의도 분명하다. 상호 독점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연속성과 조합이 더 큰 빛을 발한다. K팝부터 흑인음악, 아니 한국 대중음악 전역으로 영토를 넓힌 둘의 확장성이 올해의 상징으로 귀결되었다. ‘왜, 왜, 왜’와 ‘신호등’, ‘텅 빈 밤’ 등 곡마다 빼어난 움직임을 보라. 수민의 목소리를 기초로 시티 팝부터 보사노바까지 굵은 획을 긋고 나니, 여러 붓칠이 모인 한 폭의 푸른 알앤비 수채화다. 


만만하지 않지만 쉽고, 섬세하되 복잡치 않고 간결하다. 고유한 멋과 개성을 지닌 아티스트 레이블 ‘스탠다드 프렌즈’만의 영업 비밀이다. 지난 겨울 슬롬의 < Weather Report >와 소속사 사장 자이언티의 < Zip >이 갖가지 장르음악으로 대중음악을 연성하는 방법론을 탐구하는 와중, < Miniseries 2 >가 무덤덤히 결정타를 날린 것이다. 가요의 존재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이만큼 현재 한국의 언어로 풀어내는 앨범이 있었나. ‘K’ 마크를 수여할 자격이 충분한 K알앤비 국가대표다. (손민현)




실리카겔 < Power Andre 99 >
‘No pain’보다 고점을 찍을 수 있을까? ‘Tik tak tok’보다 더 혁신적일 수 있나? 그 모든 의문에 당당히 응수하며 한계점을 갱신했다. 국내에서 해외까지 저변을 넓혀가는 실리카겔의 고공행진은 팀의 위치를 공고히 다진 원동력, < Power Andre 99 >에서 기인한다. 7분, 9분까지도 가는 곡들을 여럿 수록하며 짧아져 가는 러닝 타임 시류에 가장 ‘풀 렝스’에 걸맞은 반기(反旗)를 들었다.


길이와 수의 논리를 떠나, 이 자체로 출중한 완성형이다. 각기 다른 장르 구성과 심미안이 담긴 18개의 기계 심장은 듣기만 해도 감정을 전이시킬 정도로 깊은 매개체다. 고밀도 정서의 파장이 현 시대상에 알맞은 동력을 제공하기에 이 음반이 뜨거운 지지를 받는 것. ‘Ryudejakeiru’, ‘Apex’의 가사가 표상하는 부조리한 세상 속 투지의 두 얼굴, ‘The rim’과 ‘Gosan’처럼 한 곡 안에서도 두세 차원을 넘나드는 마성은 팀의 서사와 음악적 매력을 대변한다. 목소리와 연주가 변화무쌍하게 요동치며 스위치 켜듯 간단하게 머릿속 응어리를 파괴해버린다. 실리카겔을 밴드 신의 주역으로 만든, 탄복할 수밖에 없는 음악이 절망의 시기를 관통한다. (정기엽)




오코예 < Whether The Weather Changes Or Not >

재즈 랩의 시대는 끝났다.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 누자베스, 재지팩트와 같은 굵직한 발자취들은 모두 과거 시제로 변해 전날의 유산이 되었다. 작품 내 요소 혹은 장치로 쓰일지언정 이를 전면에 내건 앨범은 언더그라운드라는 넓고 깊은 강 아래서 사금처럼 드물게 빛을 낼 뿐이다. 이렇듯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금덩이를 찾는 탐험가들의 눈에 들어온 생소한 이름 오코예는 2024년 국내 힙합 신의 가장 반짝이는 발견이다.


래퍼 이쿄(IKYO)의 전작 < 11:59 >, < 23:59 >부터 시작된 프로듀서 오투(The o2)와의 협업을 한층 광대하고 자유로운 방향으로 확장시켰다. 그루비한 래핑을 하나의 악기로 활용하고 윤석철, 큐 더 트럼펫 등 뛰어난 연주자들이 모여 잼 세션의 넘실거리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 옛날 드 라 소울이 사용했던 ‘Chopsticks’ 샘플을 가져온 ‘Hallelujah’의 인트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찬란했던 역사를 계승하려는 움직임이다. 변덕스러운 올해 날씨처럼 급변하는 유행에도 흔들림 없이 1MC 1PD 조합의 낭만을 간직한 그룹이 의미 있는 첫발을 내디뎠다. (박승민)




엔시티 127 < Walk >
엔시티 127만의 길을 걸어간다. 남자 아이돌의 무덤이 된 국내 대중음악 시장에서 멤버들의 해체와 구성을 화려하게 이룩하며 새로움(Neo)을 찾아가던 엔시티가 대한민국 중심의 서브 그룹으로 2024년 K팝 본국의 체면을 지켰다. 레트로한 비트 사이로 화려한 멜로디와 래핑이 얹어지면 SM 엔터테인먼트의 단단하고 각 잡힌 사운드가 음악을 포장한다. 이렇게 포장된 음악들이 한 상자에 담겨 유기적으로 엮인 이유는 곡 하나하나의 높은 완성도에 있다.

고장 난 듯 ‘삐그덕’ 걸어간다고 노래한 것과는 달리 걸음걸이가 올곧다. 복잡한 세계관과 개성으로 대중이 아이돌 음악과 멀어지던 시기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팀은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음악성을 끌어올렸다. J팝, 이지 리스닝, 밴드가 강세를 띤 올해 힙합과 팝을 적절히 버무려 고유한 스타일을 개척한 엔시티 127. 한 해를 정리하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거기에는 유행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여덟 남자의 선명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임동엽)




크러쉬 < Wonderego >
싱글의 시대라는 말이 나온 지도 10년, 아니 20년이 다 되어가나 우리는 여전히 앨범만의 가치와 미학을 믿는다. 하나의 곡에 그치지 않고 긴 호흡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티스트의 궁극적 소임 아닌가. 군복무를 마친 2022년, ‘Rush hour’라는 웰메이드 싱글과 함께 돌아왔던 크러쉬가 이번에는 앨범의 주인공이 되었다. 정규 앨범에 으레 기대하는 요건을 두루두루 충족하면서 능력치까지 높게 쌓은 < Wonderego >는 쉽게 말해 육각형 앨범이다.


분량? 19곡으로 러닝타임은 한 시간에 달한다. 킬링 트랙? ‘EZPZ’, ‘미워 (Ego)’, ‘Monday blues’… 하나만 꼽기도 힘들다. 장르적 다양성? 트렌디한 팝과 진한 알앤비 사이에 음산한 테크노 트랙 ‘Got me got u’를 뻔뻔하게 배치했다. 심지어 인터루드를 기점으로 ‘Wonder’와 ‘Ego’로 나뉘는 콘셉트 앨범이기도 하다. 다이나믹듀오와 김심야, 이하이 등 유명 게스트 사이에서도 중심을 꽉 지키고 있기까지. 좋은 음반의 모범 답안을 제시한 크러쉬에게 ‘앨범 아티스트’ 칭호를 건넬 수밖에 없다. (한성현)




트리플에스 < Assemble24 >
24인조 완전체로 처음 발표한 < Assemble24 >는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균형 있게 배치한 멋지고 세련된 음반이다. 매끈한 투스텝 스타일의 ‘가시권’, 1980년대 영국의 뉴웨이브 넘버 ‘Midnight flower’, 뭄바톤에서 영향을 받은 ‘White soul sneakers’, 알앤비 트랙 ‘치유’까지 다채로운 노래들은 또한 트리플에스의 질적 성장과 양적 확장을 인증하는 낙관이기도 하다. 짧은 연주곡 ‘S’와 유니트 AAA 이름으로 발표했던 ‘Dimension’을 새롭게 편곡한 버전이 포함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10곡이라는 적지 않은 수록곡은 소속사 모드하우스가 이들에게 전력을 다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멤버 인원이 많아서 정신없어 보이지만 이들은 체계적이다. 외모, 음색 그리고 장점과 단점이 모두 다른 24명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음악 형식을 흡수할 수 있는 최적의 인재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소속사 입장에서는 간접비용이 많이 드는 덩치 큰 그룹이지만 음악 팬들에게는 K팝의 미래에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독보적인 팀이다. (소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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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작: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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