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lash of the Year 2024

by 박승민

2024.12.22


Splash of the Year: 한 해를 조각내 음악 신의 주목해 볼 사건을 뽑는 이즘 내 연례행사.


급작스러운 혼란을 뒤로 하고 어느덧 2025년이 성큼 다가왔다. 유독 빠르게 지나갔던 올해를 추억하며 음악계를 돌아보면 발자국 하나하나마다 성취와 시련이 모두 존재한다. 넘쳐났던 이슈만큼이나 훗날 회고할 기억이 가득한 2024년, 일곱 개의 키워드를 바탕으로 인상적인 순간들을 되짚어 보았다.



여전히, K팝

이즘이 2024 올해의 국내 싱글을 선정하며 첫머리에 밝혔듯 ‘야속할 정도로 K팝이 거의 모든 음악적 담론을 흡수한 1년’이었다. 매년 기대와 근심의 목소리가 나란히 들려오며 부정적 전망이 제기되고는 하지만 이제 K팝은 깊게 뿌리를 내리며 점점 단단해지고 있다. 또한 이지 리스닝이라는 표어로 요약 가능했던 지난 몇 년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시도를 거치며 훌륭한 성과를 이뤄냈다는 점이 더욱 긍정적이다.


데뷔 이래 꾸준히 축적해 온 전자음악으로 만개한 에스파, 앞선 히트곡과는 다르게 J팝과 록을 적절히 결합한 (여자)아이들, 복귀 직후 축포를 터뜨린 데이식스까지 2024년을 지배한 세 그룹은 제각기 차별화된 매력을 뽐낸다. 이뿐만인가, 애니송과 보컬로이드 사이의 큐더블유이알, 플러그앤비의 요소를 차용한 아일릿 등 대중에게 다소 생소한 사운드마저 K팝의 문법을 거쳐 유려하게 가공해냈다. 동서부를 오가는 정통 힙합의 영파씨, 윤도현의 조력 하에 본격 메탈을 선보인 엑스디너리 히어로즈처럼 틈새 영역을 파고든 팀도 빼놓을 수 없겠다. 각종 장르를 포섭한 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형태로 내놓는 K팝 특유의 흡수력이 두드러졌던,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고 다채로운 한 해였다.



대형 산업 이면의 어둠

빛 뒤에는 항상 그림자가 존재하는 법,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일 역시 가득했다. 또 다른 K팝 그룹의 코첼라 데뷔를 알리며 빛나야 했을 순간은 고름처럼 점차 악화하며 차올랐던 가창력 논란에 불을 지폈다. 그 비판의 강도가 거세고 넓어져 때아닌 전수조사로 번져나가는 등, 언젠가 터졌어야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 오래간 홍역을 치러야 했다. 다만 이를 단순 비난과 가십으로 소비하기보다는 아이돌이 진정 아티스트로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로 여겨야 하겠다.


이어 올해 가요계의 최대 이슈인 하이브-민희진 분쟁은 아직도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지루하게 지속되고 있다. K팝 산업 속 온갖 지저분한 면면과 네거티브로 점철된 갈등이 장기화하며 처음에는 그저 흥밋거리로만 여겼던 대중의 피로감도 늘어나는 중이다. 일련의 사태 속 제일 큰 피해자는 다름 아닌 순수한 팬들이다. 소모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다툼에서 벗어나 그룹을 응원하고 음악을 즐겨 왔던 이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란거리에 대해 소속사에게 항의하기 위한 방편으로 근조 화환 시위가 떠오르기도 했다. 업계의 체계화에 발맞추어 팬덤도 조직화하여 맞서는 것이다. 그 결과 두 거대 연예 기획사인 하이브와 SM 엔터테인먼트 사옥 주변에 수많은 근조 화환이 자리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시각적으로 강렬한 효과를 준다는 점에서 유행으로 퍼져나가고 있으나, 동시에 과도한 과격화와 이후 남겨질 쓰레기에 대한 우려도 뒤따른다.



겨울잠을 끝내고 약동하는 거목들

11년과 22년 – 각각 조용필김수철이라는 두 전설이 기지개를 켜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그리고 이들이 대중음악사에 남긴 발자취만큼 길었던 기다림에 보답하는 결과물이 나타났다. 변하지 않는 에너지로 현대의 팝 록 사운드를 들려준 < 20 >과 45년의 역사를 8곡 안에 넓게 풀어낸 < 김수철 45주년 기념 앨범 너는 어디에 > 모두 거목들의 겹겹이 포개진 나이테 속 연륜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또 하나의 숫자 75. 지난 2016년 깜짝 복귀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을 놀라게 했던 정미조의 나이이자 동명의 음반이다. 존박과 강승원, 이효리와 하림을 보컬리스트란 공통분모로 묶어내어 목소리의 결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만든 섬세하고 우아한 오르골이다. 끝으로 경쾌한 EDM 사운드 기반의 ‘아름다운 그대여’로 극적인 변신을 보여준 조덕배까지, 새파란 후배들에게 질 수 없다는 듯 관록을 자랑했다.



이번에는 정말? 힙합 위기론

“Nothing’s changed. Hip-Hop is still No. 1” – 최근 미국에도 불어닥쳤던 힙합 위기론을 두고 스포티파이는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이러한 명제가 본고장에서는 아직 유효한 모양새지만 국내는 다시 한번 힙합의 쇠락이라는 고루한 표어를 꺼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염려에 그쳤던 이전과 달리 최근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힙합 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 쇼미더머니 > 시리즈가 끝난 지도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작년 빈지노와 이센스라는 두 전설의 앨범으로 떨어진 화제성을 버텨냈다면 올해는 주목도 면에 있어 직격타를 맞은 모양새다.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엠넷과 티빙이 손을 잡아 방영한 서바이벌 예능 < 랩퍼블릭 >도 큰 반향 없이 조용히 막을 내렸다. 여러 논의를 촉발시킨 맨스티어 디스전에서 문화의 부정적인 면만을 부풀려 조롱하는 콘텐츠가 대중의 인기를 가져갔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작금의 위기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코예의 < Whether The Weather Changes Or Not >, 콰이의 < Distorted >, 율음의 < Cicada >와 같이 뚜렷한 색채를 지닌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들이 연거푸 발표한 작품은 자생에 대한 희망을 일깨운다. 빅 네임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개성과 장르 본연의 멋을 살릴 수 있음을 알린 사례들이다. 그동안 주류문화로 여겨졌던 힙합이 하위문화로 돌아가는 상황, 미래는 플레이어들의 손에 달렸다.




밴드의 시대가 도래하는가

‘밴드 붐은 온다’란 예언이 실현될 수 있을까. 아직 시원하게 결론 내리기는 이르지만 차츰 그 목표에 다가서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마니아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이 선언은 메이저뿐만 아니라 인디에서 피어오른 실리카겔, 루시, 터치드를 비롯한 팀들을 통해 구체화된다. 아이돌이라는 높은 장벽 너머를 탐해 주류를 침범할 정도로 강력해진 팬덤과 파급력이 변화의 기폭제다. 밴드부와 클럽 공연으로 연결되는 흐름은 록에 깃든 젊음의 정신을 다시금 일깨웠다.


록의 황금기를 겪어보지 못한 20대가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근래 부여된 이미지에 있다. 어떠한 음악을 소비함에 있어 그 무엇보다 ‘쿨’해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록은 딱 알맞은 선택지다. 과거 장르음악에서 힙합이 보유했던 포지션을 되찾은 셈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밴드가 이에 걸맞은 태도와 매너로 성장을 견인하는 중이다. 어쩌면 머지 않아 ‘밴드 붐은 왔다’로 문장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페스티벌/공연 시장의 대폭발

지난 두 해에 이어 이 화두를 재차 꺼내야만 한다. 팬데믹이 끝나자마자 공연장을 향해 달려 나왔던 이들은 아직 그 한을 전부 풀지 못했다는 듯 코로나19 전과 비교해 보아도 한층 열광적인 반응을 쏟아냈다. 전통 강자인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부터 화려한 라인업의 해브 어 나이스 트립원 유니버스 페스티벌까지 가히 새로운 전성기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와중 턴스타일이 관객들을 무대 위로 불러낸 상징적 장면과 슬램, 모싱의 확대같이 도파민이 넘치는 광경도 펼쳐졌다. 상술한 밴드 붐과 연계한 문화의 발돋움이다.


두 시간 동안 74곡을 퍼부은 카니예 웨스트부터 리빙 레전드 나일 로저스를 아우르는 내한 공연 또한 풍성했다. Z세대의 아이콘 올리비아 로드리고, 두아 리파가 대규모 쇼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며 거장 나스와 스웨이드, J팝 스타 요아소비와 후지이 카제 등 이루 다 열거하지 못할 별들이 대한민국을 수놓았다. 이 모든 무대에 힘껏 호응한 관객들이 더해져 365일 내내 온 공연장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응원봉을 들고 뛰쳐나온 시민들과 새로운 시대의 민중가요

올해 가장 목청껏 노래가 울려 퍼졌던 장소는 고척돔이나 고양종합운동장이 아닌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이었다. 12월 3일 야밤 느닷없이 들려온 뉴스에 당장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8년 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불의에 맞서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 매서운 바람을 뚫고 자리한 이들의 손에는 촛불 대신 각자 좋아하는 그룹의 응원봉이 들려 있었다. ‘아침이슬’과 ‘임을 위한 행진곡’이 ‘다시 만난 세계’와 ‘삐딱하게’로 바뀌는, 아니 다함께 어우러져 메아리치는 순간이었다.


‘가요’와 ‘K팝’이라는 비슷한 듯 상이한 두 단어가 이어졌다. 각 시대를 상징하는 명곡들은 세대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공감대를 만들며 한데 모여 합창이 된다. 해방과 6·25 전쟁 이후부터 현재까지 90년의 세월이 켜켜이 축적되어 탄생한 아름다운 지층이다. 마지막으로 폭력에 평화롭게 맞서며 음악의 힘을 보여준 민중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박승민(pvth05m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