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에게 문정선이란 이름은 낯설다. 하나 근대사를 알아야 현대사를 풀이할 수 있듯 지난날의 한 기둥을 인지하는 일은 오늘날의 폭넓은 이해를 위해선 받아들여야 할 필수에 가깝다. 설령 그 동량이 지금은 발길이 뜸해진 산사의 일부라 해도 말이다. 1971년. 박정희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직에 올랐고, 대학자주화 운동과 풍속사범 단속, 교련 반대 등을 외치는 각계의 농성과 가두시위에 정부는 국가비상사태 선언에 이르렀다. 엎친 데 덮친 격 성탄절에는 명동 대연각호텔에 불이 나 백오십 명이 넘는 목숨을 잃고 전 국민이 공황을 떠안기도 했다. < 수사반장 >과 <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가 안방과 극장을 달궜음에도 따뜻한 기억이 그리 남아 있지 않은 이유다.
우리 대중가요는 어땠을까. 배호가 ‘마지막 잎새’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진이 ‘마음이 약해서’를 발표하며 나훈아와의 본격적인 대결을 목전에 뒀다. 분란의 시기 ‘아침이슬’이 실린 양희은의 데뷔 앨범과 약 두 달 뒤 발매한 김민기의 독집, 대학가를 달군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가 떠오른다. 아울러 ‘거짓말이야’를 히트시킨 김추자, ‘참사랑’을 부른 김상희, ‘진정 난 몰랐네’의 주인공 임희숙, ‘사랑이 미움 되면’의 정훈희 등 트로트와 포크, 스탠다드 팝과 번안곡이 이리저리 뒤섞여 차가운 사회에 온기를 적셨다.
문정선 또한 그곳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마음은 짚시’를 띄운 이용복과 함께 1971년 TBC 방송가요대상 신인상 수상은 물론 같은 해 7대 가수상까지 거머쥐며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 반세기를 넘긴 세월에 광휘는 좀처럼 희석되어 갔으나 아직도 라디오에선 ‘보리밭’과 ‘나의 노래’가 흐르고 있다. 이즘과의 인터뷰에서 만난 그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잊지 않고 찾아준 모두에게 연신 감사함을 전했다. 소싯적을 떠올리는 문정선의 눈빛은 여전히 투명했고, 음악 이야기엔 진지했으며 무엇보다 모두가 놀랄 만한 젊은 에너지를 내뿜었다.

정말 반가운 얼굴이다. 근황이 어떠한가.
즐겁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 한창 인기를 누릴 당시에는 일에 지쳐 도망 다니기 바빴다. 고된 기억이 강해 지금은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살고 있다.
< 전국노래자랑 >에 출연해 당시 KBS 관현악단장 김강섭을 만나 가수 인생이 시작됐다. 그 때를 떠올려본다면.
고등학교 2학년 때 큰언니를 따라 참가했다. 무대를 마치고 난 뒤, 심사위원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께서 제자 삼고 싶다며 제의를 주셨다. 고민이 됐으나 김강섭 선생님은 다른 분들과 달랐다. 당시에는 주 장원, 월 장원, 연 장원을 뽑았는데 연 장원을 할 경우에는 전속가수로서 계약이 되기 때문에 월 장원까지만 하고 일찍 데뷔하자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월 장원 활동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가수 생활이 시작됐다.
김강섭 선생은 가수 문정선을 어떻게 평가하던가.
선생님이 정은 많은데 그렇다고 살갑게 대하는 성격은 아니셨다. 그럼에도 ‘목소리가 우렁차다’라거나 ‘자신감이 보기 좋다’, ‘노래가 시원하다’고 말씀해 주셨던 기억은 남아있다.
여러 심사위원과 김강섭 선생이 왜 유독 문정선을 택했다고 생각하나.
당시는 이미자, 조미미, 김세레나 등 훌륭한 트로트 음악이 인기를 끌던 때였다. 그 시기에 발라드풍의 음악을 들고나왔으니 새롭게 느껴지셨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노래’와 ‘보리밭’, ‘오라 오라 오라’를 비롯한 히트곡이 참 많다. 과거를 돌이켜 본다면 스스로 어떤 가수였다고 생각하나.
대중적인 부분은 매우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성격이 그리 활달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순진하고 착하고, 무엇보다 건전한 가수였다.
문정선은 다른 가수와 달리 가곡을 불렀다. ‘보리밭’이 대표적이다. 어떻게 부르게 된 건가.
KBS에서 요일마다 한 가수를 정해 그 사람의 이름을 건 한 시간 분량의 무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아워(Hour)’라고 했는데, 이를테면 ‘김상희 아워’, ‘최희준 아워’ 이런 식이다. 그때 김강섭 선생님께서 “톱 가수만 아워를 진행하나, 잘하는 신인에게도 기회를 주자”고 제안하셨다. 그렇게 차례가 왔으나 ‘파초의 꿈’ 하나 발표했을 시기니 무대를 채울 곡이 없지 않나. 그렇게 가곡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럼 본인의 곡 중 가장 애착이 강한 곡이 ‘보리밭’인가.
‘나의 노래’다. 알다시피 김강섭 선생님이 가수 생활의 거의 모든 곡을 써주셨다. 그중 가장 심적으로 와닿고, 가사와 멜로디 모두 마음에 드는 곡이다.
‘나의 노래’를 처음 받자마자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인가. 그 때 이야기를 듣고 싶다.
‘보리밭’과 정반대였다. ‘보리밭’ 첫 녹음 당시 음역과 맞지 않고, 목소리와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못 부르겠다며 녹음실을 뛰쳐나오기도 했다. 제작자분들과 선생님께 혼나기도 하면서 완성한 음반인 반면 ‘나의 노래’는 받자마자 마음에 들었고, 녹음도 한 번에 끝냈다. 운명 같은 곡이다.

가곡과 더불어 ‘오라 오라 오라’ 같은 번안곡도 불렀다.
1971년, 김강섭 선생님과 영화 < 마리솔의 리틀 엔젤 >을 보러 갔다. 삽입곡 ‘Ola, ola, ola’를 들으시더니 꼭 불러야 한다고 하시더라. 부르기도 편하고 나한테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히트곡이 되어 둘이서 참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덕분에 ‘아워’를 채우기 편했다. (웃음)
김강섭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나. 또 음악인으로선 어떻게 평가하고 싶나.
뾰족하고 불같은 면이 있지만 그만큼 인정도 많은 분이었다. 행동력이나 결단력도 대단하셨다. 음악인으로서 평가하기보다는 나와 가장 잘 맞았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가 선택한 방향과 내가 추구한 모습이 대체로 일치했기 때문에 문정선이란 가수에게 좋은 곡이 자꾸 쌓일 수 있었다.
김강섭 선생 말고도 작업을 같이한 경우도 소개해 준다면.
1970년대 오아시스 레코드에 계셨던 김호남 작곡가와 작업을 했다. 김강섭 선생님과는 가곡이나 번안곡, 발라드풍의 음악을 했다면 김호남 작곡가를 만나선 ‘말없이 떠난 사람’이라는 트로트 곡을 발표했다. 1979년 마지막 앨범이었다.
1971년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여자 신인 가수상을 받았다. 어떤 기억으로 남았나.
혹시나 상을 준다면 언지를 해줄 줄 알았다. 아무 말이 없길래 무대를 마치고 분장실에서 숨을 돌리고 있었는데, “신인가수 문정선 씨!”하고 날 찾는 소리가 들리더라. 그 길로 부리나케 뛰어 올라가 헐떡이며 소감을 전했다. 정신은 없었지만 절대 잊히지 않는 영광의 순간이다.
당시 친하게 지냈던 동료는 누구였나.
성격이 사교적이지 못해 자주 어울리지 못했다. 언제나 조용했고, 이따금씩 피해 다니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 명을 꼽자면 ‘어떻게 할까’와 ‘말 전해다오’를 불렀던 장미리가 기억난다. 그도 나와 비슷한 성향이 있어 잘 맞았던 것 같다.
친분을 떠나 동시대에 활약했던 가수 중 장르와 관계없이 정말 높게 평가하는 동료가 있다면.
정훈희. 나와 다른 결이지만 인정하고 싶다. 같은 시대는 아니겠으나 황금심, 패티김, 이미자 선배님에 존경을 표하고 싶다. 지금 봐도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다.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다. 요즘은 무엇에 행복을 느끼는 편인가.
예전에는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는 게 싫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문정선 씨 아니에요?” 하고 알아봐 주시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정말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나. 아직도 나를 기억해 주실 때 참 행복하다.
마지막 질문이다. 문정선의 가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하나 뽑자면.
단연 김강섭 선생님이다. 가수 문정선을 발굴해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해준 은인이자 나의 선장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지도 모른다.
진행: 임진모, 임동엽, 신동규
사진: 임동엽
정리: 신동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