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라벨 탄생 150주년 특집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by 임동엽

2025.03.07

2025년 3월 7일은 인상주의 시대의 위대한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하 라벨)의 탄생 150주년이다. 라벨을 독파한다고 대중음악의 역사가 쉽게 풀이되지는 않겠지만 ‘Bolero’만 알고 있기에 아쉬워 특집을 기획했다. 올해 자주 울려 퍼질 그의 삶을 미리 공부한다 생각하자. 클래식을 샘플링하는 K팝처럼 가요를 다양한 방법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고전 음악도 알아두면 좋다. 글 한 편으로 모든 업적을 담기도 힘들고 웹진의 성격을 고려해 대중음악과의 접점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첫 문장에 왜 인상주의 ‘시대’라 썼을까. 그는 당시 음악 사조와 결이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프랑스 신고전주의에 가까웠다(그 중심에 있던 클로드 드뷔시도 자신이 인상주의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음표 하나하나에 색을 입히며 감정을 묘사하던 클로드 드뷔시와 달리 라벨은 자신만의 시류를 품었다. 재즈와 민속악처럼 현재와 과거를 적극 수용했고, 특히 관현악법에 대해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다수의 창작물에 관현악 버전이 따로 있는 이유다.


라벨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Bolero M. 81’(1928)는 모두가 알고 있다. M세대에게는 < 디지몬 어드벤처 >의 OST로 유명하며, 2016년 영화 < 밀정 > 등 드라마, 게임, 광고 가릴 것 없이 BGM으로 사용됐다. 스페인 춤곡을 반복적이고 매혹적인 멜로디로 재창조한 것이 특징. 록의 기타 리프, 일렉트로닉 뮤직의 되풀이 악구, 영화 사운드트랙의 긴장감 극대화 등 현대에 남긴 간접적 영향도 적지 않다. 이러한 반복 선율 기법은 이후 1900년대 중반 미니멀 음악으로까지 흘러 들어간다. 점진적 구조와 함께 관현악의 극치를 보여주는 라벨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대중음악과의 좀 더 긴밀한 관계는 당시 신문물이었던 ‘재즈’에서 나왔다. 지금 기준으로는 옛날 음악이지만 1800년대 말에 등장한 이 새로운 장르는 클래식 예술가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대표적인 예가 조지 거슈윈의 ‘Rhapsody in blue’(1924)다. 20세기 중반 블루스와 컨트리가 만나 로큰롤이 되기 약 30년 전에 이미 재즈와 클래식이 만나 새로운 축을 만들고 있었다. 조지 거슈윈이 음악 연구를 위해 파리로 건너가 라벨을 포함한 여러 아티스트에게 사사를 청했으나 그가 갖고 있던 재즈적 색채가 변질될 것을 우려해 모두가 거절했다고 한다. 라벨은 이때 “왜 이류 라벨이 되려 하는가? 이미 당신은 일류 거슈윈인데?”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라벨은 1920년 무렵 실제 이 같은 미국 작곡가들의 뮤지컬과 레뷰(revue, 상업적 목적의 종합 공연)에 영감을 받았다. 1925년에 완성한 두 번째 오페라 < 어린이와 마법 M. 71 >에 뮤지컬 전신 중 한 갈래인 아메리칸 오페레타*를 투영했다. 재즈와 블루스를 비롯한 음악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문화가 크게 다가왔으리라 생각한다. 신흥국이었던 미국은 서서히 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었고, 대중과의 접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는 시류를 빠르게 읽고 받아들였다.

*오페레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유행한 가벼운 형식의 오페라


< 바이올린 소나타 2번 사장조 M. 77 >(1927)에 이르러서 라벨의 재즈와 블루스적 터치가 전면적으로 나타난다. 2악장의 제목부터가 ‘II. Blues. Moderato’다. 이 시기 파리에 머물던 자칭 ‘블루스의 아버지’ W. C. 핸디의 ‘St. Louis blues’ 스타일에 아이디어를 얻었다. 바이올린을 운용하는 방식도 클래식보다는 토속적 느낌이 강하며 그 톤은 마치 벤조를 닮아 있다. 1악장에서 강조하는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대립 역시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재즈 밴드에서의 솔로 대결을 보는 듯하다. 


이후 본격적인 작업은 1928년 미국 투어를 떠나면서 시작됐다. 생전에 다작하지는 않아서 재즈 요소가 들어간 것은 <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M. 82 >(1930)과 < 피아노 협주곡 G장조 M. 83 >(1932) 정도가 전부다. 전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손을 잃은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썼으며 라벨의 커리어에서도 수작으로 손꼽힌다. 후자에서는 앞서 언급한 ‘Rhapsody in blue’의 직간접적 영향이 드러난다. 짧은 시간에 느낀 감각을 빠른 시간에 훌륭한 작품으로 소화했다. 지난달에는 2015년 < 제17회 쇼팽 피아노 콩쿠르 >에서 우승했던 조성진이 협주곡 모음집을 선보였다. 


20세기 초 유럽의 클래식 전통이 저물고, 미국이 막 대중 예술의 씨앗을 심고 있었지만 새싹이 트기도 전에 라벨은 대중 감각을 이해하고 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에드워드 엘가, 에드바르 그리그와 함께 일찍이 ‘녹음’의 중요성에 눈떴다. 음악적으로는 ‘선율’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제자인 본 윌리엄스에게는 “멜로디 주변에 무엇을 넣든 취향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멜로디 라인이다.”라 강조했다. 그의 유산이 대중음악 역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 흐름에 큰 힘을 보탠 것은 사실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눈으로 바라본 팝의 태동은 어땠는지 음악을 들으며 직접 느껴보길 바란다.


임동엽(sidyiii33@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