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들어도 멋진 애니메이션 주제가 15

얼마 전 쥬니어네이버가 5월 27일부로 운영을 종료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Z세대의 추억이 하나둘 사라진다니! 안타까움이 밀려왔지만 공허한 감정은 글감이 되기도 한다. 번쩍 떠오른 아이디어 하나. ‘쥬니버 세대’인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 출생은 또한 소위 ‘투니버스 세대’ 아니겠는가. 코로나19를 기점으로 국내의 애니메이션 시청자가 확연히 늘어난 것과 반대로 한국어 주제가는 많이 사라진 시대, 이즘의 과반을 이루고 있는 Z세대 에디터의 일원으로서 그 시절 각별하게 남아있는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뽑아봤다.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음악이야 차고 넘치나 지면을 고려해 나름의 선별 과정을 거쳤다. 먼저는 번안곡이 아닌 순수 국내 작곡가의 창작곡, 두 번째는 조금 모순적이지만 ‘애니메이션 음악’ 타이틀을 떼고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음악, 세 번째는 다양성을 위해 가수당 하나로 제한했다. 마지막은 당연히 개인 선호도다. 주제가 전문 가수와 기성 가수, 상징적인 음악과 비교적 숨겨진 곡 등 밸런스를 맞추려 열심히 머리를 굴렸으니 몇 노래가 없다고 해서 너무 아쉬워 마시길. 객관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리스트를 소개한다.

김수철 ‘치키치키 차카차카’ (< 날아라 슈퍼보드 >)
작곡/작사: 김수철
당시 어린이에게는 최초의 랩 음악 아니었을까. ‘사랑하고 살면은/평화는 올 거야’ 교훈을 주는 가사와 빠르게 글자를 내뱉는 세미 랩 파트의 대비가 범상치 않다. 지난 인터뷰에서 2024년 DMZ 피스트레인 페스티벌의 젊은 관객들을 보고 이 노래를 즉석에서 골랐다 말했을 만큼 ‘치키치키 차카차카’는 김수철의 히트 넘버 중에서도 남다른 세대 관통력을 지닌 곡이다. 순수하고 흥겨운데 쉽기까지. 장수의 요건을 다 갖췄다. 정작 나는 어릴 때 ‘치키치키차카차카쵸코쵸코쵸’를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워했다. 아버지가 참 많이도 놀리셨다.

박상민 ‘너에게로 가는 길’ (< 슬램덩크 >)
작곡: 방용석/작사: 김주희
490만 명이 관람한 <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에 모이는 아쉬움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너에게로 가는 길’이 삽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신규 관객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기획된 작품이긴 하나 그만큼 박상민의 주제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느끼기 힘든 ‘열혈’의 정서 아닌가. 다들 잊고 있던, 땀 흘리는 낭만이 노래 안에 살아 숨 쉰다. 이에 화답하며 박상민은 싱어롱 상영회에서 관객과 함께 노래를 불렀고, 이후 박응식이 부른 엔딩곡 ‘너와 함께라면’과 함께 바이닐과 디지털 음원으로 재발매되기도 했다.

박완규 ‘Alone’ (< 카우보이 비밥 >)
작곡: 이창희, 김준범/작사: 송재원
재밌는 조합이다. 제목의 ‘비밥’부터 작중 삽입된 음악까지 전부 재즈인데 정작 국내 엔딩곡을 부른 가수는 한국의 대표 록커 박완규라니. 이 무슨 미스매칭인가 싶지만 트집을 잡기에는 애니메이션의 쓸쓸한 분위기와 노래가 정말 잘 맞았다. 좋은 곡을 다 들려줘야 한다는 책임감이었을까, 이례적으로 TV 방영 시에도 편집 없이 4분이 넘어가는 전체 버전을 엔딩에 실어주곤 했다. 늦은 시간 낮에 보던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어른의 향기를 느끼며 어렸던 나는 잠에 들었다. 사실 지금도 진짜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

장숙희 & 정여진 ‘Catch you catch me’ (< 카드캡터 체리 >)
작곡: 방용석/작사: 배숙현, 김주희
첫 20초면 끝난다. ‘만날 수 없어/만나고 싶은데/그런 슬픈 기분인걸’ 초등학생 주인공 체리에게는 사실 발랄하고 귀여운 일본판이 더 어울릴지 몰라도 한국판만의 독보적인 감성이 있다. 아련한 선율과 청아한 피아노도 중요하나 세심한 목소리의 장숙희와 깨끗한 정여진의 음색이 차지하는 지분이 절대적으로 크다. 그 덕에 ‘내 사랑에 마법의 열쇠가 있다면/그건 바로 이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라는 어이없는 가사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2018년 재더빙에서는 일본 주제가를 번안하여 이제 이 노래는 세대를 구분 짓는 기준점이 되기도 했다.

BK 프로젝터 ‘야야야’ (< 그 남자 그 여자 >)
작곡: 이창희/작사: 송재원
항상 늦은 시간에 TV에 나온 탓에 < 그 남자 그 여자 >를 실제로 시청한 적은 없다. 다만 애니메이션 장면을 짜깁기한 뮤직비디오만은 노래가 자연스레 귀에 익을 정도로 자주 접했다. 특히 학교에서 미녀로 등장하던 여주인공이 집에서 무장해제가 되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곡에 참여한 보컬 모두 전문적인 가수의 느낌은 덜하지만 오히려 그런 가창이 곡의 풋풋한 가사와 더 잘 어우러진다. ‘이 세상이 터질 것 같아’ 정말 귀엽지 않나? 내 또래에게 ‘야야야’는 베이비복스의 노래가 아니라 이 만화 주제가다.

방대식 & 툴라(TULA) ‘내일을 찾아’ (< 파워 디지몬 >)
작곡: 방용석/작사: 김주희
주제가 라인업이 참 알찬 ‘디지몬’ 시리즈다. ‘찾아라 비밀의 열쇠’로 시작하는 홍종명의 < 디지몬 어드벤처 > 오프닝은 말할 것도 없고 장숙희의 ‘안녕! 디지몬’ 등 순수하고 예쁜 노래가 많다. < 파워 디지몬 >의 ‘내일을 찾아’는 국내 애니송 신의 대표 남성 가수 방대식과 툴라가 함께 불러 더욱 특별한 곡이다. 기상 알람으로 쓰여도 무방할 만큼 에너지를 북돋는 가사와 힘 넘치는 보컬은 항상 막연한 용기를 준다. 그러니 늘어지는 주말에는 삼가도록 하자. 다가오는 월요일을 멈추고 싶을 때는 정여진이 부른 엔딩 ‘To my wish’라는 대체제가 있다.

김연정 ‘내게 와 줘’ (< 다!다!다! >)
작곡/작사: 김정배
아직도 유튜브 댓글을 보면 남자 주인공 우주를 짝사랑했던 여성들의 간증을 찾아볼 수 있다. 평범한 고등학생 남녀가 외계 동물과 함께 우주에서 온 갓난아이를 키우며 산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순정 만화 작화로 그려낸 것이 < 다!다!다! >의 정수였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두 주연 예나와 우주의 본심은 두 번째 오프닝으로 쓰인 ‘내게 와 줘’에 녹아있다. 경쾌한 리듬에 산뜻한 멜로디가 꼭 그 시절 둘의 케미스트리를 닮았다. 노래를 부른 가수 김연정이 누구냐고? 바로 에스파의 ‘Supernova’를 쓴 SM 엔터테인먼트의 작곡가 켄지다.

윤공주 ‘너에게만’ (< 미소의 세상 >)
작곡: 이창희/작사: 신동식
다양한 사람들이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맡는다. < 미소의 세상 > 오프닝 ‘너에게만’은 뮤지컬 배우 윤공주가 맡은 노래로 당시 작품에 쓰였던 음악으로는 유일한 오리지널 창작곡이기도 하다. 노래는 어른의 시각이 묻어나는 엔딩 ‘...Of you’와 ‘그래 그래’보다는 확실히 발랄한 편이다. 비범한 일을 척척 해내는 과묵한 주인공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다 큰 지금 보면 미소 또한 여느 아이처럼 순수함을 품고 있는 다섯 살 유치원생이었다. ‘너에게만’을 들으며 ‘남들이 모르는 소중한 꿈’을 가진 세상 모든 외강내유 캐릭터의 속마음을 이해해 본다.

김예니 ‘소녀의 로망’ (< 아즈망가 대왕 >)
작곡/작사: http 404 errors
참 기묘했다. 여고를 배경으로 나사 하나씩 빠진 캐릭터들이 기행을 일삼는 내용, 의미조차 알 수 없는 제목과 이상한 주문처럼 들리는 오프닝 ‘환청 케이크’까지. 정체 파악이 불가능한 요소의 조합은 < 아즈망가 대왕 >을 기억 속에 확실히 남겼다. 작품의 지향점은 엔딩 ‘소녀의 로망’이 대신 설명한다. 엉뚱함이란 학생 시절에만 허용되는 로망 아니겠는가. 시원한 록 사운드도 좋지만 신랄한 가사도 발군이다. ‘살며시 손 내밀어 볼까/그런다고 고양이가 오나’, ‘안경을 슬쩍 벗어 볼까/그런다고 몸무게가 주나’. 핵심은 여기다. ‘아주 망가지지는 마~’

코요태 ‘우리의 꿈’ (< 원피스 >)
작곡: 박요한/작사: 이원희
‘순정’, ‘파란’, ‘비상’ 등 두 글자 히트곡만이 코요태의 전부가 아니다. < 원피스> TV 애니메이션 오프닝 ‘우리의 꿈’이 있다. 작품 자체가 국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덕에 현재는 그룹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오래 그리고 넓게 사랑받는 곡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보통 코요태 하면 신지의 허스키한 고음이 알파와 오메가지만 ‘우리의 꿈’에 한해서는 김종민이 맡은 벌스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다. 듣기만 해도 파란 대양을 향해 나아가는 고잉메리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출항 이후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원피스를 찾게 만드는 동력이다.

박혜경 ‘카누를 타고 파라다이스에 갈 때’ (< 정글은 언제나 맑음 뒤 흐림 >)
작곡: 이창희/작사: 신동식
‘공기청정기’ 수식어가 붙는 박혜경의 카랑카랑한 보컬이 돋보이는 곡이다. 정글을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의 괴상하고 때로는 오싹한 분위기와는 참 딴판이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정신을 놓은 듯한 비상식적인 세계가 막을 내리고 나오는 박혜경의 목소리는, TV가 꺼진 후 우리가 마주할 삭막한 세상도 즐거운 모험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가사는 퍽 일상적이다. 아직 할부 남은 새 차, 매주 가슴 졸인 복권... 모두 버리고 카누를 탄 채 파라다이스로 향하자! 나는 겁이 많아서 좀 힘들겠지만.

유정석 ‘질풍가도’ (< 쾌걸 근육맨 2세 >)
작곡: 박정식/작사: 신동식
이제는 애니메이션 주제가임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로 유명해진 곡이다. 스포츠 응원가는 물론이요 남자들의 노래방 가창력 검증 레퍼토리기도 하다. 그만큼 첫 소절부터 울림이 남다르다.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유정석의 직진하는 보컬은 항상 힘 넘치는 격려를 선사한다. 그의 또 다른 대표곡 < 행복한 세상의 족제비 > 엔딩 ‘출사표’도 그렇고, 우리는 의외로 어렸을 적부터 멋진 록 넘버를 듣고 자랐다. 부침 많은 삶을 살아온 유정석은 계속 이 노래를 부르며 청년들을 응원하는 중이다.

이용신 ‘나의 마음을 담아’ (< 달빛천사 >)
작곡: 이창희/작사: 신동식
여자아이들은 떠들며 전날 본 < 달빛천사 >를 얘기했고, 남자아이들은 놀림당할 것이 무서워 숨죽이고 있다가 집에 가서 몰래 TV를 켰다. 주변에서 꽤 찾아볼 수 있는 고백이다. 그만큼 병약한 소녀 루나가 금발의 가수 풀문으로 변신해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모습은 아이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가히 팝스타의 원형이었다. 작품만큼이나 ‘나의 마음을 담아’도 이용신의 훌륭한 가창력으로 오래도록 사랑을 받았다. 비록 2019년 음반 펀딩 관련 논란으로 추억이 살짝 구겨졌지만 세상에 사랑을 전하려는 노래의 메시지만은 순수하게 남아있다.

토리(Tori) ‘사랑의 구조신호’ (< 꼬마마법사 레미 비바체 >)
작곡: 이창희/작사: 신동식
2기는 ‘샵(#)’, 3기는 ‘포르테(f)’, 4기는 ‘비바체(Vivace)’... < 꼬마마법사 레미 > 시리즈 덕분에 그때 어린이들은 음악 용어를 일찍이 접할 수 있었다. 그중 마지막 ‘비바체’는 MBC에서 방영한 기존 시즌과 달리 투니버스로 편성을 옮기면서 번안곡 대신 오리지널 주제가를 새로 얻었다. 긴박하게 달려가는 박자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명랑한 꼬마들의 이야기에 딱 맞는다. 같은 가수가 < 나루토 > 엔딩 ‘너는 내게...’를 불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 ‘울랄라’나 ‘으쌰’, ‘야호!’같은 추임새가 다소 유치하지만 꼭 따라 불러줘야 한다.

버즈(Buzz) ‘활주’ (< 나루토 >)
작곡: 이세형/작사: 장동준
도입부부터 가슴이 웅장해진다. 민경훈의 애끓는 톤이 마음을 자극하는 ‘활주’는 작중 닌자들처럼 두 팔을 뒤로 뻗고 들판을 달리고 싶게 만드는 노래다. 버즈는 ‘겁쟁이’,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가시’ 등으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며 남자들의 노래방 필수 아티스트로 활약하던 때 두 번째 오프닝 ‘투지’까지 두 곡을 담당했다. 당시 투니버스가 음악 제작에 굉장한 공을 들였음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밴드 신이 활력을 얻은 지금 버즈가 언급되는 일은 많지 않지만, 촌스럽다 한들 가끔은 이런 2000년대 만의 멋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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