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석 인터뷰
김영석
1990년대의 음악 작가 신해철과 초절 기교 기타리스트 김세황, 에너자이저 드러머 이수용과 더불어 넥스트에 슈퍼그룹의 위용을 불어넣은 베이시스트 김영석은 명반 < The Return Of The N.EX.T Part 2: World >의 히트곡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로 존재감을 드높였다. 이지훈과 에메랄드 캐슬, 미스 미스터의 프로듀서 정체성도 확립한 그는 ‘왜 하늘은’과 ‘발걸음’, ‘널 위한 거야’처럼 1990년대 굵직한 록 발라드를 써낸 탁월한 작곡가기도 했다.
장호일-신성우가 결성한 펑크(Punk) 밴드 지니를 십수 년 만에 묶어준 구심점도 35년 경력의 베테랑 음악가. ‘거북이’와 ‘로그(Log)’를 수록한 2025년 4월 미니 앨범 < Time Leaper >로 귀환한 비주얼 로커들은 < 쇼! 음악 중심 > 두 차례 출연으로 중년 밴드의 무게감과 여전한 기동성을 표출했다. 향후 단독 공연을 비롯해 다양한 무대를 통해 관객들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는 김영석의 복귀가 개인적으로도 무척이나 반가웠다. 1990년대 록음악계 숨은 주역과의 2시간은 경험치 못한 향수(鄕愁)를 강렬하게 자극했다.

근황은 어떠한가.
노바소닉 보컬이 김진표에서 이현섭으로 바뀐 뒤 약 1년 활동을 더하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아버지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보살펴 드려야 했다. 2010~2011년 노바소닉 결성 10주년를 맞아 기념 음원에 참여한 것 빼곤 대부분 베이커리와 카페에 주력했다. 아무래도 사업과 음악 병행은 어렵다. 주변 음악인들이 곡이 간절할 경우 긴 시간을 거쳐 한 두 곡 작업하는 것과 약간의 세션 연주 이외에 뚜렷한 활동은 없었다.
지니의 재결성이 화제다. 장호일, 신성우와는 어떤 인연으로 뭉치게 되었나?
장호일은 프로듀서로 일할 때 곡 작업을 한번 같이 한 것 이외엔 접점이 없었다. 십년 전 신성우의 주선으로 셋이 만났을 때 “함께 음악하지 않겠냐”라고 제의했고 “지니 이야기가 아닐까” 추측했다. 신해철이 돌아간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점이다. 다시 한동안 교류가 없었다.
노바소닉 시절 이수용의 소개로 신성우와 가까워졌다. 작년에 사석에서 신성우가 들국화 ‘그것만이 내세상’을 열창하는 거 보면서 뮤지컬과 교수 이면의 “로커 신성우”를 재확인했고 선뜻 “같이 음악할래?”제안했다. 10년 전 장호일의 프로포즈를 되살리는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에 서로 동의해 지니가 재탄생했다.
"넥스트와 공일오비, 지니가 1990년대 경쟁 구도라 친해지기 어려웠다. (웃음)"
두 사람을 묶어주는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인가?
누구 한 명은 앨범 작업을 끌고 나가야지, 안 그러면 술만 마시다가 끝난다. 2월 완수를 목표로 작년 11월부터 작업해 ‘거북이’와 ‘로그(Log)’를 완성했다. 꼭 정규 음반이나 EP를 내놓겠다는 거창한 마음보다도 무대에 서는 걸 꿈으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나이가 좀 있다 보니 설 무대가 적고 페스티벌에도 고령의 밴드를 만나기 어렵다. 우리가 그런 존재로 남고 싶었고 결국 MBC < 쇼! 음악중심 >까지 두 차례 출연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프로듀서는 제작자 느낌이 강해서, 오인을 방지하기 위해 가급적 그 용어를 조심했지만, 음악적 방향성의 키를 잡는 프로듀서 역할을 한 셈이다. 워낙 장호일과 신성우가 무대에 강한 체질이기에 뒷바라지와 살림살이할 구성원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음악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장호일과 나는 프로그래밍과 편곡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보니 각각 ‘거북이’와 ‘로그(Log)’의 기초를 잡았다. 가사는 신성우가 맡았고 그로부터 보컬 멜로디도 나왔다. 코러스와 에디팅, 각종 튠 작업 등 후반 작업은 대부분 내가 맡았다. 음악하는 후배들이 두 곡을 들으면 누가 장호일의 곡이고 누가 김영석의 곡인지 바로 알아챈다. 간결하고 본능적인, 기타와 앰프만 있으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과거 지니의 음악 색깔을 보존하려 했지만 역시나 군더더기와 더빙 많은 김영석 스타일과 섞이고 말았다. 마치 노바소닉과 지니의 결합이랄까. 최근 지니 음악 준비하면서 DAW 프로그램 로직을 처음 수학했다. 단축키와 창도 많아 아직 적응 중이다.
지니의 향후 계획을 공유해 달라.
분기 별로 음원을 낼 계획이며 이미 발라드 하나 포함 두 곡이 마련되어 있다. 본격적인 음원 장사로 오인할까봐 걱정이다. 우선적으로는 과거 지니를 사랑했던 이들을 위한 선물로 지니 기존곡과 공일오비, 넥스트를 섞은 공연을 기획 중이다. 아시다시피 모객이 중요하고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공연장을 관객들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상황을 추구한다. 젊은 밴드들처럼 록 페스티벌 무대에 서는 것도 꿈꾼다.
신성우가 부르는 넥스트도 궁금하다.
그가 넥스트 전성기를 좋아한다. 1년에 한 번씩 여는 신해철 추모공연 < 시월 >에 신성우가 ‘Lazenca, save us’로 참여했다. 둘 다 파 샵까지 올라가는 저음역대고 음계와 두성 사용 지점, 샤우팅 포인트까지 유사하다.
예전부터 컴퓨터 음악에 익숙했는가?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않다 보니 악보상에선 편곡을 할 줄 모른다. 기본적인 정도는 볼 수 있지만, 손으로 악보 위에서 표현을 못 하다 보니 컴퓨터 음악을 익혀야 했다. 시인성이 약해 말 그대로 “한 땀 한 땀” 따야 했던 롤랜드 MC-500같은 시퀀서로 시작해 디스크 운영 체제 도스(DOS)의 “케이크 업”이란 프로그램으로 편곡 작업에 전념했다. 워낙 시퀀싱 작업하는 사람이 적었고, 뮤지션 입장에서 세션 연주자를 사용하는 것보다 가격 측면에서 효율적이다 보니 의외로 불러주는 곳이 많았다.
본격적인 음악 경력의 시작이 궁금하다.
대학교 2~3학년 무렵 밴드 하얀그림자를 시작했고 1989년 1집 <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슬픔 >을 발매했다. 원래 서울에 있는 영동 고등학교와 경기 고등학교 연합 스쿨 밴드였다. 밤무대스러운 그룹명부터 소프트 록 기반의 기성 음악의 터치와 자작곡 수록 등 나름 다채로운 시도를 기울였다. 일본 음악의 영향이 강했으며 세션 연주자였던 학교 선배들의 도움으로 멤버들에게 버거운 부분을 다수 해결했다. KBS에서 방영하던 < 젊음의 행진 >이란 신인 등용 프로그램에 “통큰아이”란 이름으로 김건모와 ‘디디디’의 김혜림과 더불어 하얀그림자가 선발되었다.
기타에서 베이스로 넘어간 것도 이 무렵이다. 하얀그림자 1집에서 베이스를 연주한 김현규를 스승님으로 생각한다. 이은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편곡에도 참여한 분이다. 1집선 ‘그대 눈물’이란 곡이 각별하다. 메이저 세븐 코드로 만든 첫 작품이다.
1990년대 초반 비트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군 복무 마친 하얀그림자 멤버 중 상황이 허락하는 이들끼리 조직한 밴드다. 1993년 비트 1집 < Tough Guy > 활동 당시에 이미 신해철로부터 밴드 제의가 왔다. 일전에 신해철 < Myself > 투어에 참여하기도 했고. 김영석 중심으로 기획한 집단이다보니 내가 떠나면 비트도 붕 뜰게 분명했지만 1995년 2집 < Propose >가 마지막이 되었다. 2집도 1집과 비슷한 록 앨범이지만 제작사의 부탁으로 하우스, 댄스 뮤직 한 곡을 수록했다.
김태환은 하얀그림자 구성원으로서 훗날 미스 미스터 ‘널 위한 거야’ 제작에 가담했다. 장기순은 넥스트 4집 < Lazenca (A Space Rock Opera) >에 키보디스트로 참여했고 라이브 앨범과 투어도 함께 했다. 비트 2집 멤버인 기타 김상환과 드럼 강상호는 에메랄드 캐슬이 되었다. 비트는 진짜 장사는 안되더라. (웃음)

"라디오부스에 키는 작은데 고급스럽게 생긴 애가 있는 거다. 달변에 친절해서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고 신해철과의 인연이 궁금하다.
1992년 < 91 Shin Hae Chul Myself Tour >라는 라이브 앨범으로 출반된 투어를 비롯해 솔로 작품에 가끔 연주로 참여했다. 1989-90년 무렵 하얀그림자 홍보를 위해 출연한 라디오의 디제이(DJ)가 신해철이었다. 김현규에게 전수받은 베이스 슬랩을 보고 반했는지 “나중에 꼭 같이 음악하자”라는 말도 건네왔다. ‘나에게 쓰는 편지’와 ‘내 마음 깊은 곳의 너’가 수록된 신해철 정규 2집 < Myself > 전국 투어 때 “세션 비 많이 주겠다”란 설득에 넘어가 버렸다. 그가 프로그램해 놓은 베이스 트랙이 연주하기 너무 어려웠다.
‘재즈 카페’는 그렇다 쳐도 넥스트 1집 < Home >에 들어 있는 ‘외로움의 거리’는 특히 베이스라인이 복잡했다. 그룹명도 요상했고 선배다 보니 아무래도 대하기 어려운 기타리스트 정기송에 깐깐한 신해철로 인해 넥스트 가입 제안은 고사했다. 그래서 신해철-정기송-이동규 라인업으로 출범했다. 1기 넥스트는 이동규의 전자드럼과 신해철의 신시사이저 등 전형적인 밴드 구성이 아니었지만 TV에도 나왔던 ‘도시인’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렇다면 넥스트 가입 계기는 무엇인가?
기존 베이시스트 이동규 탈퇴 이후 1995년에 급하게 부산 공연 제의가 왔다. 김세황과 이수용이 가입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는데 그들의 놀라운 연주에 매번 감탄했다. 수락하고 나서 연주 목록 중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껍질의 파괴’가 나오는데 테이프를 잘못 튼 줄 알았다. 수많은 청중 앞에서 급작스레 “새로운 멤버 김영석 군입니다” 공표를 해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넥스트의 도전적이고도 실험적인 음악색은 어떻게 받아들였나?
데모 트랙에 충격받았으며 리코딩에 어려운 점도 많았다. 당시 국내에선 스튜디오 사용료를 아끼기 위해 베이스 연주를 빨리 녹음했으나 넥스트는 반대로 “원하는 만큼 연주하는” 기조였다. 그런 상황을 모르고 ‘Hope’를 비롯해서 2~3일에 녹음을 마쳤다. 보컬 트랙이 없던 ‘The age of no god’은 기타와 드럼 트랙에 맞춰 베이스라인을 상상해 가며 연주했다. 완성본 속 랩에 가까운 싱잉이 충격파였다.
넥스트에 신해철 이외에도 프로듀서가 하나 더 있던 셈이다.
원래 꿈이 프로듀서였으며 베이스가 대표적인 표현 도구였을 뿐이다. 원래 기타리스트로 시작했지만 선천적 재능과 운동 신경이 부족했다. 대신 베이스 연주가 리듬과 편곡 연구에 일조했다. 프로듀싱에 입각해서 빙(BEING)과 비그램 레코드(B-Gram Records) 관련된 튜브와 완즈 같은 일본 밴드음악을 많이 들었다. 이 계열 사운드를 표현하고 싶어서 노바소닉 때는 당시 리코딩 드럼 세션과 마스터링까지 알아봤지만 몇 가지 요소를 확보한다고 해서 해당 사운드를 완전하게 구현할 수 있는 건 아니더라.
발라드 명곡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작곡 배경이 궁금하다.
과거에 스케치해 둔 선율이 있어 비교적 금방 완성했다. 사실 우리끼리는 “이렇게 길 노래가 아니었어!”라고 농담했다. 딱히 기타나 키보드 솔로 없이 테마 반복으로 6~7분까지 늘어뜨리는 외국 록넘버의 풍습을 재현하고자 했다. 대중가요다운 멜로디에 넥스트적인 연주를 더해 관습적인 패턴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동성동본 메시지는 작사가 신해철의 의도다. 타이틀로 밀었던 ‘Money’보다 외려 이 곡이 대중적 지지를 얻어 상황이 애매해졌던 기억이다.
이 곡 이외에 베이스가 강조된 아무래도 그루비하고 리드미컬한 ‘Komerican blues’와 ‘Money’, 상기한 'The age of no god'이 기억에 남는다. 전자는 사전에 준비된 베이스 데모에 애드립을 얹었다. 신해철이 “형 아니면 그 사운드 안 나와!” 라며 1997년 해산 이후 웬만하면 두 곡은 안 했다고 한다. (웃음)
넥스트 활동 당시에도 프로듀싱을 병행했는데.
해철에게 고마운 점이다. 넥스트의 곡 작업 비중에서 살짝 물러날 테니 외부 작업을 용인해 달라라는 요청에 호의적이었고 심지어 지원까지 해줬다. 넥스트 가입쯤 이미 미스 미스터가 나왔고 ‘왜 하늘은’을 수록한 이지훈 1집 < Rhythm Paradise >(1996)와 리아 1집 < Diary >(1997), 신해철과 공동 제작한 에메랄드 캐슬 1집 < Emerald Castle >(1997)까지 이어졌다. 이 음반 대부분에 김세황, 이수용 등 멤버들이 그대로 참여했다. 본디 게스트가 안 서는 넥스트 콘서트에 이지훈이 올라올 만큼 이런 가수들을 챙겼다. 팀 분위기가 가장 좋았을 때다.

"내가 쓴 곡들이 1990~2000년대 록 발라드 문법에 영향 주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미스 미스터 ‘널 위한 거야’와 이지훈 ‘왜 하늘은’, 에메랄드 캐슬 ‘발걸음’같은 히트송을 써냈다.
솔직히 ‘발걸음’이 인생곡이 될 줄 몰랐다. 야다와 얀처럼 한국형 록 발라드가 인기를 끄는 상황에서 상업적 타개를 위해 쓴 작품이다. 사실 에메랄드 캐슬과 이지훈 둘 다 본인들의 능력도 출중했지만, 넥스트 팬덤이 밀어준 덕택에 인지도가 상승했다. 앨라니스 모리셋처럼 개성적인 창법을 구사했던 빡빡머리 여가수 리아도 ‘개성’과 ‘4가지 하고 싶은 말’로 소폭의 인기를 획득했다.
1990년대 가요 작곡자 혹은 편곡자들은 너무 강력한 사운드로 청자들이 부담스워한다는 이유로 가요 발라드에 디스토션 기타를 지양했다. 미스 미스터 ‘널 위한 거야’에 이런 공식에서 탈피, 김세황의 휘몰아치는기타와 이수용의 공격적인 드럼을 넣었다. 신해철 몰래 넥스트 멤버를 고대로 갖다써 그가 분개했던 기억도 난다.
노바소닉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넥스트 해산 후 해철은 영국 유학을 떠났다. 애당초 모두 뿔뿔히 흩어지기로 했지만 막상 예전 연습실엔 늘 세황과 수용이 와 있더라. 어차피 자석처럼 모이는데 그냥 “우리끼리라도 밴드 하는게 낫지 않겠어”란 마음으로 결성한게 노바소닉이다. 물론 신해철은 싫어했지만. 보컬 공개 오디션에 “이런 사람이 우리에게 데모 CD를 보냈다고?” 할 만큼 유명한 싱어도 많았다.
어느 날 엔지니어를 비롯한 제작 팀과 패닉 콘서트를 보러 갔고 거기서 김진표를 발견했다. 마침 랩 코어에 관심 있을 때라 그의 저음과 비트 쪼개기가 귀에 확 들어왔다. 그 다음 패닉 공연에 멤버들과 다같이 가서 김진표에게 노바소닉 가입을 제안했다. 진표의 랩 뮤직과 내 헤비메탈을 서로 추천해 주곤 했다. 람슈타인같은 밴드를 자주 들을 때라 노바소닉에게서 어느 정도 레퍼런스가 느껴질 수밖에 없다.
노바소닉의 작업 과정은 어땠는가.
철저하게 연주 트랙을 먼저 만들고 그 후에 후렴구 혹은 훅을 더했다. 멜로디에 따라 코드 진행을 하지 않고 먼저 자유롭게 앙상블을 이루다보니 연주하는 입장에선 외려 넥스트보다 더 쉽고 재밌었다. 김세황은 곡 만들기보단 기타 플레이를 선호했다. 그렇다보니 전체적인 방향성을 주도했던 나와 부딪힐 일이 없었다. 되려 김진표가 종종 직접 프로그래밍한 데모를 가져왔다. 본인이 직접 고른 랩하기 용이한 비트를 기초로 응용 및 발전시킨 곡이 더러 있다.
김영석이 꼽는 노바소닉 베스트 트랙은?
아무래도 오락실 게임 펌프 덕에 유명세를 얻은 ‘마지막 편지…그것조차 거짓: 또다른 진심’과 ‘Slam’이다. 기타 리프 중심의 단순하고 신난한 넘버들이라 어느 정도의 대중성도 확보했다. 가장 첫 번째로 만들고 작업 시간도 길게 가져간 ‘태양의 나라’에도 애착이 간다.
‘낭만고양이’를 편곡해 준 체리필터와 인연이 궁금하다.
기획 및 제작한 마지막 가수가 ‘눈물’과 ‘고정관념’의 개성파 가수 리아고 딱 음악 프로듀싱만 맡은 처음이자 마지막 팀이 체리필터다. 2000년에 나온 데뷔 앨범 < Head-Up >의 흥행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낭만고양이’는 대중적으로 설계했다. 트랜스나 하우스처럼 전자음악 스타일이었던 기존 버전을 멤버들의 동의를 받고 밴드 풍으로 바꿨다. 다행히도 김밥천국 아주머니가 흥얼거릴 만큼 대중에게 친숙해졌다. 가사는 크라잉넛 한경록이 썼다. 개인적으론 마찬가지로 편곡을 맡은 후속작 ‘오리 날다’가 더 만족스럽다.
김영석이 존경하는 베이시스트는?
국내에선 하얀그림자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간 김현규를 들고 싶다. 국외론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플리(Flea)다. 스피릿과 실력을 동시에 갖춘 괴물 같은 플레이어다.
김영석의 인생 음악을 공유해 달라.
< Hi Infidelity >(1980)으로 잘 알려진 미국 록밴드 알이오 스피드왜건이다. 학창 시절부터 즐겨들었으며 처음으로 밴드 음악에 관심을 갖게 해준 팀이다.
진행: 염동교, 신동규, 임동엽
정리: 염동교
사진: 신동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