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ZM이즘 x 문화도시부평] #59 이규영

이규영

by 임선희

2025.07.31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부평과 함께 하는 < 애스컴 아카이브 부평사운드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쉰아홉 번째 주인공은 인디 레이블 루비레코드의 대표 이규영이다.

 



지난 7월 8일 인천 중구에 위치한 ‘인천여관X루비살롱’에서 이규영 대표를 만났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60여 년의 역사가 스민 옛 여관의 흔적과 1, 2층을 가득 채운 LP와 CD에 필자들은 잠시 본분을 잊은 채 특유의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이곳은 이제 매년 50팀 이상의 인디 뮤지션들이 무대를 펼치는 등용문으로 새로운 시간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루비살롱은 어쩐지 그와 꼭 닮아 있었다. 수많은 LP를 하나하나 꺼내듯 밴드 푸펑충 시절부터 인천에 얽힌 추억 그리고 루비레코드의 현재를 펼쳐보았다. 그런가 하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건물처럼 후배를 위한 든든한 디딤돌이 된 그의 모습 또한 포착했다. 담백한 언어로 풀어낸 이야기 사이에는 음악을 향한 깊은 애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푸펑충, 락타이거즈, 더 하이라이츠 등 참여 이력이 화려한데 밴드를 시작한 계기는?

초등학교 당시에 좋아하는 팝 음악을 테이프로 사고 라디오를 녹음해서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음악을 계속 들어왔고 고등학교 때 밴드부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노느라 잘 안됐다. (웃음) 그러다가 1996년도에 물 박쥐라는 밴드의 베이스로 처음 공연에 참여했다. (베이스 관련 공부는 어떻게 했는지?) 그때는 인터넷이 없으니 책 사서 공부했다. 한두 달 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다 독학으로 연습했다.


1990년대 ‘조선펑크’ 열풍에 직접 몸담은 바가 있다. 펑크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한데. 

연주를 잘 못해서였다. (웃음) 당시 사회에 불만 많던 20대의 혈기와 잘 맞고, ‘Do it yourself’의 에티튜드도 좋아 펑크록에 빠졌다. 때마침 홍대에서 ‘스팽글’, ‘드럭’ 등의 클럽이 생기기 시작할 때였다. 활동 직전 시기인 1993년도부터 얼터너티브 록이 한창 유행이었고 대다수의 밴드가 펑크 혹은 얼터너티브 록을 선보여서 자연스럽게 펑크로 흘러가게 된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밴드 더 하이라이츠 활동 당시 정통 로큰롤, 컨트리, 블루스, 보사노바 등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였다. 

차승우와 함께한 EP < Highlights >를 발매하고 차승우가 일본으로 유학갔다. 그래서 혼자 남기도 했고 갓 서른 넘었을 때라서 음악을 메인으로 둘 수 없었다. 회사와 음악을 병행하면서 직장인 밴드처럼 활동하다 보니 음악에 관한 관점이 아예 바뀌었다. 음악으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하게 되면서 오히려 편하게 ‘듣다가 좋았던 걸 다 해보자’라는 마인드로 바뀌게 되더라. 


특히 본인과 잘 맞는 장르가 있었는지?

계속 변하는 것 같다. 최근에는 DJ로 음악을 틀다 보니 관련 음악을 많이 듣게 되었다. 내가 뭘 하느냐에 따라서 스펙트럼이 확장된달까. 그래서 스스로에게 미션을 주는 편이다. 특히 올해 7월 말에 밴드 사우스 카니발과 함께 후지 록 페스티벌에서 참여했다. 밴드 사우스 카니발은 금요일(25일)에, 나는 토요일(26일)에 블루갤럭시 텐트와 페스티벌 전후로 세 군데 클럽에서 디제잉을 하고 왔다.


더 하이라이츠 이후로 플레이어로서 앨범을 낸 지 시간이 오래 흘렀다.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 소스가 쌓여야지 창작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여러 밴드 활동을 통해 ‘내 욕망만 가지고서는 안된다’라는 걸 느꼈다. 창작은 밀어붙여서 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은 물이 찰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다만 10년 정도 기다린 셈이긴 하다. (웃음)


물론 밴드 창작곡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계속 만들고 발표하고 있다. 꼭 펑크 음악을 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루비레코드에서 공연이나 레코드 페어를 여는 것도 창작에 속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공유하는 방식만 바뀌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아티스트 활동 시기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다면?

1999년 펑크 프로젝트인 글로벌 코포레이션 팀을 결성했다. 2001년 발매한 < Return To The 77 Punx >를 정말 좋아한다. 사실 나의 옛날 음악은 창피해서 손이 잘 안 간다. 근데 글로벌 코포레이션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임했고 지금까지 참여한 밴드 중 제일 마이너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한국 인디 레이블에서 루비레코드를 빼놓을 수 없다. 설립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사장이 도주해서 급여를 받지 못했다. 돈을 벌기 위해 회사에 다녔는데 또 돈을 못 벌게 되었으니 이렇게 된 거 하고 싶은 거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고용노동부에서 6개월 이상 월급을 못 받으면 3개월 치를 주는 제도가 있어 어느 정도 자금이 생긴 생황이었다. 부평 모텔촌에 문 닫은 호프집을 작업실로 인수했고 개인 작업을 하는 중이었는데, 그때 오랫동안 부평에서 자리를 지키던 클럽 락캠프가 강화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공연할 곳을 잃은 팀들이 내 작업실에 와서 “여기서 공연 좀 하면 안돼?”라며 모이더라. 그렇게 작업실이 루비살롱으로 다시 태어났다.


본격 루비레코드의 프로젝트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음악계의 보석을 찾는다는 의미의 ‘레이블픽’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보완 중인 시스템의 일환이다. 전속 계약은 보통 7년이지만 맘에 든다고 바로 시작하다 보니 문제가 생기더라. 모르는 사람과 일할 때 가치관의 차이 등 여러 부분에서 합을 맞춰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1년 정도 같이 해보고 서로 좋으면 전속계약을 하는 방식을 만들었다. 결혼 전 동거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주요 사업 목록에 LP 레코드 마켓이 있다. 젊은 층에서 꾸준히 바이닐 수집 문화가 취미로 이어지고 있는데 어떤 생각이 드는지. 

원래 시장이라는 것이 등락을 거듭한다고 본다. 5년 전까지는 활발했는데 지금은 거품이 살짝 빠졌다. 어쨌건 나는 LP, 테이프 세대이기에 원래 갖고 있는 것과 소장품도 많이 있다 보니 마켓을 하게 되었다. 루비살롱 2층까지 LP와 CD가 꽉 차 있기에 음악을 틀기도 하고 팔기도 한다.


최근 인디 밴드 리바이벌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클럽을 계속 운영해 온 입장으로서 지켜보니 젊은 뮤지션들이 음악을 잘하더라. 많은 이가 실용음악과를 다니고, 음악을 스트리밍으로 들어서 그런지 음악을 많이 알기도 한다. 뮤지션, 관객 모두 상향 평준화된 것 같다. 하루는 2003년생의 어린 대학생이 루비살롱에 와서 음악을 신청하는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좋은 옛날 음악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몰래 신청곡 쪽지를 빼놨다가 나중에 또 들어본다. (웃음)


약 20년간 루비살롱을 꾸려온 가치관이 궁금하다.

이 공간도, 프로그램도 계속 보완 중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버스킹 또는 유튜브 등등 밴드가 자기를 홍보할 방법이 늘어났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클럽에서 처음 시작을 했다. 클럽을 통해서 아티스트의 입문, 즉 신인 발굴까지는 가능했지만 다음 단계가 없었다. 음반을 내거나, 영상을 찍어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관계자에게 음반을 돌리는 등 대중에게 밴드를 선보이게 할 역할도 필요하지 않은가. 나라도 그 역할을 해야겠다는 마음에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인천에서 나고 자랐다고. 어린 시절 어떤 추억이 있는지.

루비살롱을 인천여관에 설립한 것도 어머니의 친정댁이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출장을 자주 다닐 때마다 여기로 왔으니, 이곳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홍대에서 일할 때 스트레스받으면 인천으로 넘어와 술도 마시고 자유공원에 올라 바닷가도 보고 그랬다. 그러다 보니 인천여관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천여관 X 루비살롱’을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 주인공이다.

이곳은 원래 1960년대부터 선원들이 주로 묵는 여관 골목이었다. 그러다 대형 숙박시설에 밀려 문을 닫게 되었는데, 루비레코드 10주년을 기념해 루비살롱을 되살려보자는 취지에서 여관 건물을 새로운 공간으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기존 건물이 갖고 있는 역사를 살리기 위해 원형을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인천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록 페스티벌이 된 펜타포트에 2011년부터 2018년까지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한창 펜타포트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자리를 잡아가려고 할 때쯤부터 제작에 참여했다. 그전에 작은 프로그램에도 계속 참여를 했으니 약 9년 정도 함께 한 것이다. 당시에는 정말 무식하게 열심히 참여했다. 2019년 대행사가 바뀌면서 그만두게 되었고, 그때 작더라도 내 것을 만들어가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밴드, 인디 레이블, 그리고 축제 기획, DJ 등 다양한 음악의 길을 걸었다. 루비레코드만 해도 20년이 다 되어간다.

일단 음악과 관련된 일들이 계속 생긴다. 그래서 지금까지 왔다. 예를 들어 8월에 인천시도시재생 프로젝트 < 2025 인천레코드마켓 DISC & DISCO >가 열릴 예정인데 어떻게 하면 유니크하게 기획할지 고민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그러면 또 다음 미션이 생긴다. 결국 재미있게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지금까지 많은 후배를 양성해 왔다. 관련 에피소드를 풀어보자면.

최근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위아더나잇이 우리 회사에 있었을 당시 10년 전 발매한 ‘티라미수 케익’이 작년에 역주행했다. 그때 그냥 재미있는 걸 한 건데 갑자기 인기가 많아져서 깜짝 놀랐다. 


마지막으로 이즘 공식 질문이다. 인생 음악을 소개해달라.

인생도 성격도 변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음악도 변한다. 최근에는 쿰비야 등 비영미권 노래들을 찾아듣는 중이고, 레게는 늘 좋아했다. 굳이 인생 노래를 정해야 한다면 폴 사이먼 작곡의 'Still crazy after all these years'. 이 제목 그대로를 살고 있다.




진행: 임선희, 정기엽, 이재훈, 장대휘

정리: 임선희

사진: 정기엽

임선희(lumanias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