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희 인터뷰
김상희
언젠가 브라운관에서 한국 영화 명작선 정도의 이름으로 코미디언 구봉서와 서영춘 주연의 < 단벌 신사 >를 본 적 있다. 1968년 작품이었다. 우연히 얻은 천만 원 상당의 복권, 그것을 모셔둔 양복 재킷을 찾아라. 이이 저이 손을 타며 묘연해진 단벌의 행방을 찾는 고군분투기였다. 과한 욕심과 헛된 꿈의 경계, 일장춘몽 등의 익숙한 교훈에 앞서 음악이 흘렀다. ‘단벌 신사 우리 애인은 서른한 살 노총각님···’ 김상희의 ‘단벌 신사’였다. 동일한 출연진의 또 다른 영화 < 대머리 총각 >과 함께 당해 김상희의 노래를 영화로 제작한 히트작이었다는 건 뒤늦게 안 사실이다.
학사 출신 여성 가수 1호이자 국내 최초의 여성 MC 김상희. 그는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내내 시대를 관통하는 톱 여가수로 사랑받았다. 가곡과 번안곡을 넘나들며 트로트, 포크, 팝, 발라드는 물론 민요, 심지어는 신중현 사단에 몸을 실어 사이키델릭 록까지 그야말로 전방위적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신중현뿐만 아니라 김강섭, 박춘석, 정민섭, 남국인 등 내로라하는 우리 가요사의 전설적인 작곡가와 호흡을 맞췄다. 가요대상이나 10대 가수상 수상과 같은 기록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여유 속에서도 김상희의 노래는 항상 민중을 향했다. 그것은 분명 잰 척 없는 우리네 음악이었다. 우리가 김상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새해의 설렘이 가시지 않은 1월의 어느 날, 이즘은 김상희를 만났다. 지난날을 추억하는 그의 눈빛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투명했고, 음악을 대할 때는 여전히 겸손했으며 반세기를 훌쩍 넘긴 아득한 세월 속 잠깐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그는 모두가 놀랄 만한 젊은 에너지를 내뿜었다. 우리 대중음악사 한편을 뜯어본 값진 시간, 그날의 이야기를 전한다.

1961년 KBS 전속 가수로 데뷔했다. 유복한 집안의 고대 법대 출신 여성이 가요계에 뛰어든다는 건 지금 생각해 봐도 쉬운 결정이 아닌데, 그 시작이 궁금하다.
한 친구가 KBS에서 전속 가수와 전속 합창단을 모집한다며 지원을 권유했다. 마침 고등학교 시절 합창단 경험이 있었고, 무엇보다 전속 개념이다 보니 월급이 나온다는 말에 용돈벌이 정도로 생각했다. 원서도 친구가 제출했다. 며칠 후에 시험 보러 오라고 연락받았고, 아무 경험이 없던 대학교 1학년의 나는 교복 바지에 어머니 외투를 빌려 입고 갔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합창단 면접자 명단에 내가 없는 거다. 여기저기 물어보니 친구가 잘못 지원한 것이었다. 전속 가수로 말이다.
그런대로 우선 면접에 갔다. 근사한 차림의 지원자들 사이 홀로 학생이었다. 잘못 지원했다고 말했더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노래 한번 불러보라고 하시더라. 손석우 선생님, 김강섭 선생님 등이 계셨다. 당시 학교에서 마리오 란자가 출연했던 영화를 단체로 보러 갔는데, 그것이 떠올라 불렀다. 당연히 반주는 없었다. 하나 더 없냐 하시길래 영문학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조 스태포드의 ‘It’s almost tomorrow’를 불렀다. 얼떨결에 와서 하라는 대로 그냥 한 거다.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는데 며칠 뒤 합격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더군다나 1등으로 뽑혔다고 들었다.
나중에 만나 무엇 때문에 뽑았다고 들은 적 있었나.
들어올 때부터 달랐다는 거다. 이야기하는 것 보면 어리숙한 면이 있는데, 그러면서 자기 할 말은 다 하고, 또 노래는 곧잘 하는데 남들이 모르는 곡을 부르고, 가요는 아는 게 없다 그러고. 무언가 개성 있어 보였다고 하셨다.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을 것 같다.
처음에는 법대에 노래 잘하는 애 하나 있다 정도의 소문이었다. 그러다 결정적인 계기가 생기는데, 버스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난 거다. 순경이 와서 증언하면 기사를 구속할 수 있다고 했다. 조금 다치긴 했지만, 내가 볼 때 기사는 정상으로 운전했다. 바퀴가 말썽이었던 걸 어쩌겠나. 분명 고의는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나름 큰일을 겪은 것이다 보니 집에서도 다 알게 되었고, 한 기자가 저 학생은 누굴까 해서 조사해 봤더니 KBS 전속가수였던 거다. 마침 ‘삼오야 밝은 달’이 나온 시점이라 더욱 빠르게 퍼졌다.
집안의 반대가 엄청났을 텐데.
말도 못 한다. 처음 ‘삼오야 밝은 달’로 시작할 적에는 집에서 쫓겨날까 봐 TV 출연을 안 했다. 그러다 언젠가 손석우 선생님과 어머님이 담판을 지으셨다. 어머님은 더 못 시킨다고, 선생님은 재능이 너무 아깝다고. 그렇게 오가다 어머님께서 정말 친아버지처럼 봐줄 것을 약속할 수 있으면 보내겠다고 하셔서 간신히 나아갈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정말 아버지라고 불렀다. 실제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반대가 극심하셨다. 가수 활동을 아시게 된 후 실제로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밥도, 학비도 못 준다고 하실 정도로 굉장히 엄하셨다.
아버지의 반대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선 당시는 가수에 대한 이미지가 정말 안 좋을 때였다. 직업 취급이라도 해주면 다행일 정도였다. 더구나 아버지가 당시 극장 사업을 하셨다. 그때는 상영작 사이에 극장 쇼라는 실연 무대가 있었다. 당연히 여유롭지 않은 가수가 많았다. 갈 데가 없으니 무대 뒤에서 밥 먹고, 극장에서 자고 이러는 걸 숱하게 보신 거다. 선지급도 많이 해주시고, 못 받은 돈도 눈감아주시고 그러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 그 사람들의 사정을 뻔히 아는데, 내 딸이 그 길로 간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뒤집어질 일도 맞겠다 싶다. 돌아가실 때까지 김상희는 내 딸 아니라고 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