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희 인터뷰

김상희

by 신동규

2026.02.11

언젠가 브라운관에서 한국 영화 명작선 정도의 이름으로 코미디언 구봉서와 서영춘 주연의 < 단벌 신사 >를 본 적 있다. 1968년 작품이었다. 우연히 얻은 천만 원 상당의 복권, 그것을 모셔둔 양복 재킷을 찾아라. 이이 저이 손을 타며 묘연해진 단벌의 행방을 찾는 고군분투기였다. 과한 욕심과 헛된 꿈의 경계, 일장춘몽 등의 익숙한 교훈에 앞서 음악이 흘렀다. ‘단벌 신사 우리 애인은 서른한 살 노총각님···’ 김상희의 ‘단벌 신사’였다. 동일한 출연진의 또 다른 영화 < 대머리 총각 >과 함께 당해 김상희의 노래를 영화로 제작한 히트작이었다는 건 뒤늦게 안 사실이다. 


학사 출신 여성 가수 1호이자 국내 최초의 여성 MC 김상희. 그는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내내 시대를 관통하는 톱 여가수로 사랑받았다. 가곡과 번안곡을 넘나들며 트로트, 포크, 팝, 발라드는 물론 민요, 심지어는 신중현 사단에 몸을 실어 사이키델릭 록까지 그야말로 전방위적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신중현뿐만 아니라 김강섭, 박춘석, 정민섭, 남국인 등 내로라하는 우리 가요사의 전설적인 작곡가와 호흡을 맞췄다. 가요대상이나 10대 가수상 수상과 같은 기록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여유 속에서도 김상희의 노래는 항상 민중을 향했다. 그것은 분명 잰 척 없는 우리네 음악이었다. 우리가 김상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새해의 설렘이 가시지 않은 1월의 어느 날, 이즘은 김상희를 만났다. 지난날을 추억하는 그의 눈빛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투명했고, 음악을 대할 때는 여전히 겸손했으며 반세기를 훌쩍 넘긴 아득한 세월 속 잠깐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그는 모두가 놀랄 만한 젊은 에너지를 내뿜었다. 우리 대중음악사 한편을 뜯어본 값진 시간, 그날의 이야기를 전한다. 



1961년 KBS 전속 가수로 데뷔했다. 유복한 집안의 고대 법대 출신 여성이 가요계에 뛰어든다는 건 지금 생각해 봐도 쉬운 결정이 아닌데, 그 시작이 궁금하다.

한 친구가 KBS에서 전속 가수와 전속 합창단을 모집한다며 지원을 권유했다. 마침 고등학교 시절 합창단 경험이 있었고, 무엇보다 전속 개념이다 보니 월급이 나온다는 말에 용돈벌이 정도로 생각했다. 원서도 친구가 제출했다. 며칠 후에 시험 보러 오라고 연락받았고, 아무 경험이 없던 대학교 1학년의 나는 교복 바지에 어머니 외투를 빌려 입고 갔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합창단 면접자 명단에 내가 없는 거다. 여기저기 물어보니 친구가 잘못 지원한 것이었다. 전속 가수로 말이다. 


그런대로 우선 면접에 갔다. 근사한 차림의 지원자들 사이 홀로 학생이었다. 잘못 지원했다고 말했더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노래 한번 불러보라고 하시더라. 손석우 선생님, 김강섭 선생님 등이 계셨다. 당시 학교에서 마리오 란자가 출연했던 영화를 단체로 보러 갔는데, 그것이 떠올라 불렀다. 당연히 반주는 없었다. 하나 더 없냐 하시길래 영문학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조 스태포드의 ‘It’s almost tomorrow’를 불렀다. 얼떨결에 와서 하라는 대로 그냥 한 거다.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는데 며칠 뒤 합격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더군다나 1등으로 뽑혔다고 들었다.


나중에 만나 무엇 때문에 뽑았다고 들은 적 있었나.

들어올 때부터 달랐다는 거다. 이야기하는 것 보면 어리숙한 면이 있는데, 그러면서 자기 할 말은 다 하고, 또 노래는 곧잘 하는데 남들이 모르는 곡을 부르고, 가요는 아는 게 없다 그러고. 무언가 개성 있어 보였다고 하셨다.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을 것 같다.

처음에는 법대에 노래 잘하는 애 하나 있다 정도의 소문이었다. 그러다 결정적인 계기가 생기는데, 버스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난 거다. 순경이 와서 증언하면 기사를 구속할 수 있다고 했다. 조금 다치긴 했지만, 내가 볼 때 기사는 정상으로 운전했다. 바퀴가 말썽이었던 걸 어쩌겠나. 분명 고의는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나름 큰일을 겪은 것이다 보니 집에서도 다 알게 되었고, 한 기자가 저 학생은 누굴까 해서 조사해 봤더니 KBS 전속가수였던 거다. 마침 ‘삼오야 밝은 달’이 나온 시점이라 더욱 빠르게 퍼졌다. 


집안의 반대가 엄청났을 텐데.

말도 못 한다. 처음 ‘삼오야 밝은 달’로 시작할 적에는 집에서 쫓겨날까 봐 TV 출연을 안 했다. 그러다 언젠가 손석우 선생님과 어머님이 담판을 지으셨다. 어머님은 더 못 시킨다고, 선생님은 재능이 너무 아깝다고. 그렇게 오가다 어머님께서 정말 친아버지처럼 봐줄 것을 약속할 수 있으면 보내겠다고 하셔서 간신히 나아갈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정말 아버지라고 불렀다. 실제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반대가 극심하셨다. 가수 활동을 아시게 된 후 실제로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밥도, 학비도 못 준다고 하실 정도로 굉장히 엄하셨다. 


아버지의 반대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선 당시는 가수에 대한 이미지가 정말 안 좋을 때였다. 직업 취급이라도 해주면 다행일 정도였다. 더구나 아버지가 당시 극장 사업을 하셨다. 그때는 상영작 사이에 극장 쇼라는 실연 무대가 있었다. 당연히 여유롭지 않은 가수가 많았다. 갈 데가 없으니 무대 뒤에서 밥 먹고, 극장에서 자고 이러는 걸 숱하게 보신 거다. 선지급도 많이 해주시고, 못 받은 돈도 눈감아주시고 그러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렇게 그 사람들의 사정을 뻔히 아는데, 내 딸이 그 길로 간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뒤집어질 일도 맞겠다 싶다. 돌아가실 때까지 김상희는 내 딸 아니라고 하셨다.



학사 출신 여성 가수 1호 타이틀만 보더라도 일반 대중에 비해 확실한 여유가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김상희의 음악은 언제나 서민, 민중과 가까웠다. 의도한 전략이었던 것일까.
당시 사회상이 그랬다. 그때는 모두가 배고플 시절이라 후줄근한 옷에 굶어도 좋다고 말하던 때였다. 그래도 머릿속만은 꿈으로 가득 차 반짝거렸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노래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해외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무대 의상도 화려하지 않은 일상복을 주로 입었다.

손석우를 시작으로 정민섭, 남국인, 김학송, 신중현, 원희명 등 엄청난 작곡가와 작업을 했다. 짓궂은 질문일 줄 알지만,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사람은 누구였나.
김강섭 선생님. 눈만 봐도 안다. (정말 엄하기로 유명한데) 엄청 무섭다. 소리도 엄청나게 지르셨고,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 화도 많이 내셨다. 그런데 애정도 그만큼 있으셨다. 잘해주실 때도 많았다. 음악인으로서 음 하나하나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멋 부리지 않는 기본과 태도, 그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이 김강섭 선생의 작품 아닌가. 김상희의 영원한 히트곡으로 남았다. 이 곡의 첫인상은 어땠는지.
지금도 그렇지만, 꽃 이름을 잘 모른다. 코스모스가 피어 있다는데 이걸 어디서 볼 수 있냐고 여쭤보니 시골에 가면 길가에 많이 있을 거라 하셔서 버스를 타고 가 한참을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계절의 덕을 본 것도 있지만, 음악이 원체 좋으니 지금까지 사랑해 주시는 게 아닐까 싶다. 감사할 따름이다. (이참에 김강섭 선생과 함께한 대표작 몇 개를 말해달라)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빨간 선인장’, ‘즐거운 아리랑’ 정도. ‘홍콩 엘레지’라는 곡도 참 아낀다.

1977년 동경 가요제에 우리나라 대표로 출전해 ‘즐거운 아리랑’으로 특별상을 받았다. 앞서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나의 의견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김강섭 선생님이 다 알아서 하셨다. 불러보라고 하시니 그저 불렀다. 그러더니 몇 월 며칠에 일본 가서 할 거란다. 더구나 우리나라 대표로 가는 거니까 준비 잘 하라고 하시더라. 

사실 해외 진출에 있어 반예문 신부님을 꼭 언급하고 싶다. 국제가요제인 만큼 영어로도 부를 수 있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신부님이 내 곡을 다 번역해 주셨다. 나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 가수가 국내를 넘어 활동 반경을 넓히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신 분이다.

1961년에 데뷔해 1980년대 초반까지의 긴 전성기, 김상희가 가진 힘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서민이다. 김상희는 서민과 함께 있어야만 빛이 난다. 어렵지 않은 노래에 위로를 많이 받으셨다고 지금도 말씀하신다. 그 말 한마디가 나의 힘이자 원동력이었다. 어머니의 뜻을 꺾어가며 시작한 일이었으니 이 악물고 노래만 해왔는데, 그게 강점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이제는 그만해야 하나 생각한 적도 근래에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만류하더라. 자주 뵙는 의사 선생님부터 펄쩍 뛰셨다. 고쳐드릴 수 있다고, 더 하실 수 있는 몸이라고. (웃음) 그게 김상희라는 가수가 가진 힘인 듯하다. 덕분에 먹고 살았다.

가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고른다면.
일본에선 팝 가수로 많이 알려졌다. 그 덕에 LA의 한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 계약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집안의 반대에 결국 무산됐지만, 그 시절에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돌아보니 큰 영광이었다. 그 이후 미8군에서도 공연을 많이 했는데, 모두 초청이었다. 그곳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반대로 나를 부른 거다. 그런 전례가 없었다.

요즘 눈여겨보고 있는 후배가 있다면 알려달라.
음악도 음악이지만, 무엇보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김수찬이나 박서진이 생각난다. 이름이 알려지기 전, 봉사단에서부터 인연이 있다. 매사에 열정적이고, 누구에게나 배려심이 깊다. 

마지막 공식 질문이다. 김상희의 인생 음악은 무엇인가. 
어떤 형식이든 손석우 선생님을 고를 수밖에 없다. 아버지 같은 존재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아버지 몸 괜찮으시냐고 안부를 물었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김상희는 없다. 우리 한국 가요계의 품격을 올려주신 분이다. 외국 가수 중에서는 일본에서 같이 활동했던 모리 신이치가 떠오른다. 일본의 국민 가수다. 교류도 많았고, 추억도 많다. 버팀목이 돼주어 해외 활동에 큰 힘이 됐다.



진행: 임진모, 임동엽, 한성현, 신동규
정리: 신동규
사진: 한성현
신동규(momdk7782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