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행 인터뷰

안치행

by 신동규

2026.07.18

레전드의 레전드. 안치행 선생이 지나온 발자국은 그 길이만큼이나 깊고도 선명하다. 그가 음악계를 호령하던 전성시대는 우리가 으레 일컫는 권불십년의 벽을 뛰어넘는다. 영사운드의 기타리스트로 출발해 당대 밴드 신 일선을 담당했던 1970년대, 그는 플레이어로서의 독보적 발걸음에 그치지 않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편곡을 시작으로 최헌의 ‘오동잎’, 윤수일이 부른 ‘사랑만은 않겠어요’, 김트리오 '연안부두', 희자매 '실버들’ 등 당대 별들의 작곡자이자 프로듀서 제작자로 활약했다.


1980년대에도 나훈아, 김연자, 주현미 등에게 히트곡을 안기는가 하면, 이규석과 박남정의 청사진을 그리는 등 장르와 세대를 포괄했다. 사업가로서의 성공을 이어간 1990년대까지 자신의 이름을 딴 안타프로덕션의 파급력은 말 그대로 연속 안타 행렬이라 할 만큼 가공할 정도였으며 그것은 그의 천재적 안목, 그 광대한 시야에서 비롯되었다. 무심히 흐른 세월 속 노년이 된 오늘날에도 그는 매일 작곡과 연주 연습을 거르지 않는다. "곧 발매될 신곡인데 들어볼래요?" 그날의 경이로운 '포에버 영' 분위기와 흥분을 전한다. 



‘등불’과 ‘달무리’ 등 안치행이 직접 쓴 영사운드의 대표곡은 유독 한국적인 느낌이 강했습니다.
시골에서 논농사 짓고 자랐던 점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한때는 어른들이 심심하면 새 구경 다녀오라고 그러셨다. 석양녘의 빨간빛을 온몸에 품고 있는 논과 들판에 새들이 일제히 낱알을 쪼아먹는 경치를 보면서 어린 나이에도 기가 막힌다고 생각했다. 아마 이러한 향수가 작곡 활동에도 자연히 발휘된 것 같다. (우리 정서에 대한 이해도가 생래적으로 높았나 봅니다) 동의한다. 어느 날, 기 치료사 한 분이 나의 몸을 만지며 속에 슬픈 선율이 많다더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어떤 느낌인지 단번에 알았다. 우리나라에서 눈물 없는 멜로디는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슬픈 노래 부르면서 가장 신나게 노는 국민이 우리 아닌가. 곡을 쓸 때 이러한 맥락에 집중했던 건 사실이다.

음악가의 삶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음악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니 달랑 기타 하나 메고 서울로 올라왔다. 1966년쯤이었는데, 당시 삼각동 근처에 이인성 기타학원이 유명했다. 기타에 관한 한 전설적 인물이다. 원래 삼천 원 정도 받는 개인 지도비를 두 배 부르더라. 짧게 올려 친 스포츠머리에 옷도 후줄근하니 꼭 깡패 같다는 게 이유였다. 기타 치겠다고 멀리서 말썽부리던 놈이 왔다 이거지. 안 받으려고 터무니없는 금액을 부른 거였지만, 어떻게든 벌어서 그 금액을 다 지불하고 배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선생님 부부께서 "골치 아픈 자식 하나 들어왔다"고 고민이 많으셨다더라.

며칠을 배우고 연습하다 얼마 안 돼 여기선 더 배울 게 없다고 하시더니 코미디언 서영춘과 그 일행이라는 악극단의 기타리스트 자리를 소개해 줬다. 시골 살 적에 그렇게 멋있어 보이던 기타 자리를 용케 하나 얻었으니 꿈이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극단의 일원으로 당시 태평 극장이나 영동 극장같이 제법 큰 곳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악극단 활동하다가 직접 자기 밴드를 만들고, 전면에 나섰습니다. 계기는요?
동경하던 기타리스트의 모습과는 다름을 느꼈다. 전보다 욕심도 생기기 시작했고. 때마침 이인성 기타학원의 조로라는 가수가 보컬 밴드 결성을 제안했다. 건반, 베이스, 기타, 드럼에 가수 하나 껴서 노래하고 연주하면 된다는 거다. 곧 베이스 치던 오덕기까지 합류해 남산 팔각정 근처에 방을 얻어 몇 달간 연습했다. 퍼시 슬레지의 ‘When a man loves a woman’ 같은 곡을 외던 게 기억난다. 그러다 사정이 생겨 조로는 팀을 일찍 떠나고, 두리번거리던 와중 히파이브 출신의 유영춘과 건반 치는 장현종, 드러머 이용호가 찾아왔다. 

다섯이서 새롭게 시작한 밴드는 남영동 근처에 있던 미8군 주식회사 화양을 찾아가 6개월짜리 계약을 따냈고, 가수 김계자와 무용수 김호경을 붙여 이른바 패키지 쇼를 나섰다. 곧 무대에 서야 하니 무작정 만든 이름이 '실버코인스'였다. 이 팀이 바로 영사운드의 전신인 셈이다. 부단히 노력한 끝에 미8군 오디션에서 최고 등급 더블A를 받았고, 덕분에 5년여간 전국 미군 부대에 안 가본 곳이 없이 돌아다녔다.

본격적인 영사운드의 시작은 미8군을 나오면서부터군요.
그렇다. 1971년에 시장으로 나오면서 팀 이름을 영사운드로 바꾸고, 조선호텔 나이트클럽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우리가 B밴드, 이봉조 악단이 A밴드였다. 미국인이 운영하던 그곳에서 방도 두 개나 받고 티본스테이크도 심심찮게 먹는 등 대단히 대우받았다. 또 그때가 우리나라에 밤 문화가 막 형성되기 시작할 적 아닌가. 비교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다 이곳에 와서 놀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때 이미 음반 제작에 뜻이 있으셨나요?
전혀 없었다. 그럴 여유를 가질 수 없던 시대이기도 했고, 설령 그럴 생각이 있었다 하더라도 성공할지 못할지 모르는 불안정함에 모든 걸 투자하긴 어려웠다. 

1975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편곡해 엄청난 히트를 거두셨습니다. 
영사운드의 시계가 멈추고 퍼시픽 호텔의 나이트클럽에서 홀로 무대에 서던 때, 대마초 파동이 터졌다. 신중현과 더멘에서 베이스 치던 이태현과 친했는데, 어느 날 한 신문에 김추자의 대마초 공급책이 그라고 일면에 나온 것이다. 갈 곳이 없다길래 내 호텔방에 재워준 적도 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킹 레코드의 박성배 사장이 찾아와 당시 월급의 절반이었던 삼만 원을 바닥에 던지더라. 언제나 을일 수 없다고 생각한 끝에 이태현에게 우리가 직접 프로덕션을 만들자고 음반 제작 사업을 권유한 것이 시작이었다.

마침 25시로 활동하던 조갑출이 축구선수 이회택을 소개해 줬고, 그와 가까이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조용필을 만나게 됐다. 박 사장은 왜색 조의 가창을 우려했으나 나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일었고, 알아서 할 테니 녹음실만 잡아달라고 했다. 그렇게 ‘돌아와요 충무항에’로 일전에 나왔던 곡을 ‘부산항에’으로 바꾸고 ‘정’, ‘너무 짧아요’ 등 다섯 곡을 편곡해 뒷면의 영사운드 기존 곡과 합쳐 발매했다. 대마초 파동으로 트로트 고고가 주류에 오르고, 또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동포들이 고국방문을 위해 부산항으로 들어올 때였으니 모든 게 맞물려 홍보 하나 없이 큰 성공을 거뒀다. 몇 개월 전, 최헌과 호랑나비의 ‘오동잎’이 들어간 앨범이 내 음반 제작의 시작이었는데도 다음 해 조용필의 이 곡이 모든 걸 삼켰다. 


작곡가이자 제작자로서 안치행 선생님의 1970년대 중후반은 성공 퍼레이드가 따로 없으셨습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수십만 장씩 팔리던 와중 대마초 흡연 사실로 그가 활동을 중단하게 됐다. 마지막 무대가 1977년 5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던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였다. 입장료가 490원이었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그룹사운드는 다 출연했다. 거기서 골든그레이프스라는 혼혈 친구들로 구성된 팀이 눈에 띄길래 아무나 부르라며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선물했다. 다 록 밴드들인데 누가 트로트를 하고 싶어 하겠나. 막내였던 윤수일이 결국 부른 거다. 완성도는 참 좋은데 이름이 어려우니 아예 윤수일과 솜사탕으로 바꾸고 새출발하자는 데 다들 동의했고, 그렇게 윤수일은 스타로 뛰어올랐다. 

그때 최헌과 윤수일을 비롯해 운 좋게 희자매, 서유석 등 많은 히트를 낳았다. (단순한 히트가 아니라 연말 시상식까지 휩쓸었지요) 내 입으로 말하긴 머쓱하지만, 1978년 연말이었다. 한창 TBC와 MBC가 경쟁할 때라 이쪽에서 상을 받으면 저쪽에선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MBC에서 최헌이 ‘앵두’로 가수왕을,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최고 인기가요상을 받았고, 동시에 TBC에서도 최헌이 가수왕을 받고 윤수일이 남자 신인상을 받았다. 당시로선 대단한 성과였다. 꿈만 같았다. 

1980년대부턴 제작자로 맹위를 떨치셨습니다. 그때 프로듀싱했던 가수는 누가 있을까요.
우선 주현미의 ‘울면서 후회하네’가 1985년 선풍적이었다. 물론 그 앞에 임채무, 오기택, 위금자 등이 있었지만 영향력이 조금 애매해질 시기에 트로트가 터진 것이었다. 그때 여고생이었던 문희옥이 찾아왔고 < 8도 사투리 디스코 메들리 >를 취입해 초대형 대박이 났다. 얼마 후 박남정이 문을 두드렸고, 무얼 잘하냐 물어봤더니 춤에 자신 있다고 하더라. 나는 생전 보지도 못한 춤이었다. MBC 합창단 출신이기도 해서 노래도 곧잘 했다. 그렇게 ‘아 바람이여’를 써 데뷔시켰더니 텔레비전 출연 한 번에 스타가 됐다. 이외에도 소리새, 이규석, 김용임 등 수많은 가수의 음반을 녹음했다. 

1990년대를 지나 21세기 오늘날까지 수십 명의 스타와 작업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음악적 이상에 가장 부합했던 가수는 누구인가요.
故 최헌이다.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정말 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다. 그거 하나로 충분하다. 

음반 판매량 면에서는 어떤 작품이 기억나시나요.
판으로 생각한다면 역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겠지만, 내가 직접 작곡한 곡에선 최헌의 ‘오동잎’과 '앵두',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많이 팔렸다. 단순히 숫자만 보면 앞서 말한 문희옥의 < 8도 사투리 디스코 메들리 > 테이프가 어림잡아도 3백만 장은 나갔다. 모름지기 정품 아닌 복제품도 그만큼 팔렸을 거다. (웃음)

2000년대 들어서도 활동의 고삐를 늦추시지 않고 작업 활동에 매진하고 계십니다.
2004년 불교 반야심경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 심경 >에 애착이 간다. 찬불가를 탈피해 어려운 불교 경전을 누구나 부를 수 있게 대중가요화 한 것이다. 목탁소리와 힙합 리듬이 기막히게 어울리더라. 그런데 불교음악을 기성가수가 부르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불렀지" (웃음) 언론에 화제가 많이 됐다. 

최근 뮤지컬을 준비 중이시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춘향전이다. 춘향, 몽룡, 향단, 월매, 변사또 등 등장 인물들이 하나하나 다 스타 아닌가. 그런데도 실체가 와닿지 않아서 이걸 한 번 리얼하게 끌어내 보고 싶었다. K팝 아이돌의 형식을 빌려 와 여자 멤버 셋과 남자 멤버 셋으로 그룹을 만들어 뮤지컬로 올려보는 기획이다. 기대해달라.

꼭 호흡을 맞추지 않으셨더라도 60년 넘도록 자리를 지켜오면서 선생님이 인정하는 최고의 가수들을 꼽아주세요. 
남자 가수 중에는 나훈아, 조용필, 최헌. 여자 가수에서는 이미자, 심수봉, 주현미가 떠오른다.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 면에선 최진희도 뛰어나고, 철저한 준비성과 무대 매너를 생각한다면 남진도 빼놓을 순 없겠다.



진행: 임진모, 임동엽, 신동규
정리: 신동규
사진: 임동엽
신동규(momdk7782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