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않은 흥행대박을 터뜨린 영화 <드림걸스>로 인해, <레이>가 그랬고 <앙코르>가 그랬듯, 영화의 사실상 모델이 된 1960년대의 여성 3인조 그룹 슈프림스(Supremes)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상승곡선을 긋고 있다. 우리는 슈프림스에 대해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가 솔로 이전에 몸담았던 그룹쯤으로나 여기고 있지만 사실 실제 영향력에 있어서나 역사의 위상으로 보나 오히려 슈프림스가 다이애나 로스에 비해 우위를 갖는다. 슈프림스를 따라서 '다이애나 로스가 전에 있었던 그룹'이 아닌 '다이애나 로스를 나중 배출한 그룹'으로 인식하는 것이 정당하다.
1960년대를 얘기할 때 슈프림스의 중력은 거대하다. 최강 비틀스가 있던 시절, 영국침공의 주체에 맞설 미국의 대항마는 흔히 버즈(Byrds), 마마스 앤 파파스(Mamas & Papas) 그리고 비치 보이스(Beach Boys)가 거론되곤 했지만 인기차트 실적과 싱글 음반시장 파괴력에서는 그 남자그룹들은 감히 슈프림스에 견줄 바 못되었다. 우선 비틀스시대에 슈프림스처럼 무려 12곡의 싱글 넘버원을 기록한 그룹이 없다.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여성그룹 가운데 사상 최다 1위곡을 보유한 존재는 여전히 슈프림스다.
활동기간도 정확히 비틀스와 맞물렸다. 일례로 1965년 'Stop! in the name of love'는 비틀스의 'Eight days a week'을 1위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등 그들은 인기차트에서 자주 비틀스와 충돌하며 용호상박의 경쟁을 벌였다. 영국에게 된통 뒤통수를 맞아 기분이 상한 미국의 자존심이 그들에게 투영되었다. '미국의 비틀스'라는 타이틀은 슈프림스가 가져야 했다.
이런 연유로 나중 3인조의 여성그룹이 나오기만 하면 미국인들은 제2의 슈프림스라는 수식을 들이댔다. 포인터 시스터스(Pointer Sisters), TLC, SWV 등이 그러했고 가장 최근의 사례인 비욘세의 그룹 데스트니스 차일드(Destiny's Child)는 대놓고 슈프림스의 현대판임을 내외적으로 표방했다. 비욘세가 영화 <드림걸스>에서 다이애나 로스 역을 맡으리라는 것은 지 알고 내 알고 하늘도 아는 당연코스였다.
슈프림스와 관련해서 동시에 언급해야 할 인물은 미국 디트로이트 소재의 '흑인음악의 메카' 모타운(Motown) 레코드사의 베리 고디(Berry Gordy) 사장이다. 그는 당시 존슨 대통령의 슬로건인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에 맞춰 모타운 설립을 통해 흑인의,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 이른바 흑인 자본주의의 기치를 들어올렸다. 그는 백인에 눌리지 않은 흑인의 위세를 음악으로 구현하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 백인사회를 관통하는 전미(全美)적 히트가 필요했다.
스모키 로빈슨 앤 더 미래클스(Smoky Robinson & The Miracles), 마빈 게이(Marvin Gaye), 포 탑스(Four Tops), 템테이션스(Temptation)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등이 잇달아 미국 사회에 평지풍파를 일으켰고 마침내 가장 대중적인 실체 슈프림스를 맞으면서 베리 고디는 백인가수를 이기고 비틀스와도 맞먹는 모타운 제국의 꿈을 완성했다. 이를 위해 그는 완벽한 엔터테인먼트 퍼스낼리티 창조를 위해 처음으로 그들을 공식 차밍스쿨을 거치게 했다. 그곳의 학교장인 맥신 파월에 따르면 “단 두 곳, 버킹검 궁전과 백악관에 설 수 있는 가수로 양성한다!”는 방침을 확립했다.
모타운 음악의 미학도 슈프림스에 쏟아냈다. 사상 최고의 작곡 프로듀서 팀인 홀랜드 도지어 홀랜드(Holland Dozier Holland) 이른바 HDH 팀에게 전적으로 콘텐츠를 의뢰했다.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는 짧고 간결하고 곡마다 유사한 패턴의 멜로디를 구사하는(같은 화성의 틀에서 멜로디만 조정해 대중적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이었다. 1964년 'Where did our love go'부터 이듬해 'Back in my arms again'까지 8개월 동안 5연속 1위곡이라는 금자탑을 쌓았고 1966년 'You can't hurry love'부터 'The happening'까지 8개월간 다시 네 곡이 연타석으로 1위를 차지하는 대성공이 재현되었다.
다이애나 로스와 플로렌스 발라드(Florence Ballard), 메리 윌슨(Mary Wilson)으로 이뤄진 슈프림스는 처음에는 다이애나 체제가 아니었다. 엄연히 초기 대표는 강성 보컬을 가진 플로렌스 발라드였다. 하지만 비주얼의 파괴력을 고려한 베리 고디가 섹시한 외모에 뇌쇄적인 보이스를 가진 다이애나를 그룹의 상징으로 내세우면서 구도는 바뀌었고 이후 첫 스매시 'Where did our love go'부터 리더 다이애나 시스템은 고착되었다(급기야 다이애나 로스는 베리 고디의 2세를 낳는 비공식 모타운의 영부인이 된다).
(영화 <드림걸스>에서도 잘 묘사되었듯이) 나중 1967년 플로렌스 발라드는 팀 내 역할 축소에 따른 갈등과 불안정으로 결국 쫓겨나고 패티 라벨 앤 블루 벨스 출신의 신디 버드송(Cindy Birdsong)이 대타로 들어오는 소용돌이를 겪는다. 앤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의 주제가인 'The happening'은 신디가 들어온 뒤 첫 차트 1위곡이다. 1982년 뮤지컬을 영화화한 <드림걸스>는 이렇듯 슈프림스의 그림자라고 할 플로렌스 발라드의 시각에서 슈프림스와 모타운 그리고 연예산업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와 달리) 방출된 플로렌스는 궁핍의 늪에 빠진 채 1976년 33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플로렌스가 나가면서 팀명은 다이애나 로스 앤 슈프림스로 바뀌었고 여전히 히트퍼레이드는 계속되었다. 'Reflections' 'Love child'(처음으로 슈프림스가 HDH와 작업하지 않은 곡), 그리고 템테이션스와 호흡을 맞춘 'I'm gonna make you love me' 등이 인기차트 정상을 누볐다. 하지만 마지막 1위곡이자 슈프림스를 대표하는 곡으로 남아있는 'Someday we'll be together'를 끝으로 간판 다이애나도 팀을 떠나게 된다. 무주공산이 된 슈프림스는 이후 R&B 차트 1위에 오른 'Stoned love' 등 히트가 없지 않았지만 위세는 땅에 떨어졌고 결국 1976년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베리 고디는 홀로서기에 나선 다이애나 로스를 단지 가수로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다이애나를 진정한 문화산업의 스타로 비상시키기 위해 다단계 접근법을 동원한다. 이때부터 다이애나는 대중 콘서트 활동만이 아니라 스크린에도 진출, 주연배우로 활약한다. 대표적인 것이 1972년 빌리 할리데이의 전기영화로 아카데미에 최우수여우로 노미네이트되기도 한 < Lady Sings The Blues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었다)와 1975년의 < Mahogany >였다. 고매한 카바레무대에도 빈번하게 나섰다. 대중에게 더욱 살을 붙이려는 베리 고디의 원대한 비전에 따라 다이애나는 1970년대 들어 세기의 연인으로 일반의 뇌리에 각인되기에 이른다.
1970년대 솔로 시대에도 그녀의 차트활동은 눈부셨다. 1970년 리메이크인 'Ain't no mountain high enough'를 시작으로 기성세대가 잊지 못할 1973년의 'Touch me in the morning'과 1975년의 'Do you know where you're going to' 그리고 1981년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와 함께 부른 'Endless love'까지 1위곡만도 여섯이나 되었다. 빌보드 실적에 따르면 1970년대 히트평점 2위(올리비아 뉴튼 존 다음으로), 1980년대 3위(마돈나와 휘트니 휴스턴에 이어)를 차지하는 찬란한 영광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실로 음악 팬들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30년간 다이애나 로스라는 이름과 같이 살았다.
솔로시절 노래는 변화하는 음악 트렌드에 맞춰 멜로디 중심의 곡만이 아니라 리듬형 곡에도 심혈을 기울인 것이 특징. 디스코 유행을 적절히 의식한 1976년의 1위곡 'Love hangover'와 1980년의 빅 히트송 'Upside down'이 대표적이다. 보이스 칼라는 당대의 섹시스타 이미지와 어울림을 갖는 윤기와 섹시함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명징함을 한층 강조했다. 영화 < Mahogany >의 주제가로, 선율을 타는 절제의 가창력을 과시하는 'Do you know where you're going to'이 생생하게 말해준다.
그룹과 솔로 시절의 히트를 망라한 이번 < The No. 1's >는 제목과 달리 영미, 혹은 R&B 차트 기준의 1위곡 모음집은 아니다. 슈프림스의 1위곡 12곡과 다이애나 솔로 시절 6곡을 합친 18곡의 넘버원에 덧붙여 슈프림스와 다이애나 로스하면 떠오르는 5곡을 추가해 그녀의 세계를 탐색하는데 좀더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사실 리오 세이어도 부른 슈프림스의 'Reflections'나 절정의 가창을 선사한 'The Boss'와 'I'm coming out'이 빠졌다면 넘버원 카테고리에 아쉬움을 표했을 것이다.
밴드 바닐라 퍼지(Vanilla Fudge)와 킴 와일드(Kim Wilde)가 리메이크해 널리 알려진 1966년의 'You keep me hangin' on'은 원곡과 함께 마지막으로 흥겨운 댄스 리믹스 버전을 삽입해 방점을 찍고 있다. 30년에 걸친 다이애나 로스의 궤적을 읽기에 손색이 없는 앨범이다. 설령 그녀의 존재를 모르더라도 막상 들으면 '곡의 대중성'이라는 게 뭔지 순식간에 터득할 수 있을 만큼 다이애나 로스의 음악은 대중음악의 전형이다. 신세대들은 'Back in my arms again'과 'I'm coming out'를 통해 지금 음악의 대중적 감각이 42년 전의 곡과 27년 전의 곡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건 분명하다.
-수록곡-
1 Where did our love go
2 Baby love
3 Come see about me
4 Stop! in the name of love
5 Back in my arms again
6 I hear a symphony
7 You can't hurry love
8 You keep me hangin' on
9 Love is here and now you're gone
10 The happening
11 Reflections
12 Love child
13 I'm gonna make you love me
14 Someday we'll be together
15 Stoned love
16 Ain't no mountain high enough - Diana Ross
17 Touch me in the morning - Diana Ross
18 (Theme from Mahogany) Do you know where you're going to - Diana Ross
19 Love hangover - Diana Ross
20 The boss - Diana Ross
21 Upside down - Diana Ross
22 I'm coming out - Diana Ross
23 Endless love - Diana Ross
24 You keep me hangin' on(dance rem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