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세계의 공주가 돌아왔다. 이번엔 지상의 햇빛을 받으러 말이다. < Serotonin II >와 < Glitch Princess >의 독창적인 글리치 팝과 걸맞은 기괴한 비주얼로 팬들의 컬트적 지지를 끌어모은 싱가포르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율(yeule)은 세 번째 정규작 < Softscars >에서 스스로의 독보적인 색채를 더욱 넓은 방면으로 확장한다.
확장의 방향은 인디 록의 현재를 조준한다. 마치 인공지능이 인간의 데이터를 학습하듯, 본작의 율은 실물 악기의 비중을 증대, 인디 록의 정수를 추출 및 재조립하며 기존의 감정선을 더욱 친근한 형태로 빚어낸다. 전작 < Glitch Princess >의 가장 이질적인 트랙 ‘Don’t be so hard on your own beauty’의 방법론을 앨범 단위로 확장, 기존의 기조와 절충했다고 봐도 문제는 없다. 일견 비바두비를 연상시키는 ‘Sulky baby’, 달콤한 파워 팝 향취의 ‘4ui12’, 파란노을과 웬즈데이(Wednesday) 등 인디 슈게이즈의 서정성을 따온 ‘Dazies’까지, 성공적인 거푸집을 따라 율은 특유의 불안정한 사운드와 정서를 양껏 부어내어 전혀 새로운 질감의 작품을 완성한다.
동시에 마냥 인디로 파고들지만은 않기에 작품은 더욱 강한 전달력을 획득한다.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선이 분명한 멜로디 라인이 귀를 쉽게 끌어당기고, 작품 전반에 뿌리내린 베드룸 팝의 정서, 주가가 오를 대로 오른 팝 펑크의 사용 등 장르 단위의 본질적인 친화력도 눈에 띈다. 이와 함께 더욱 인상적인 것은 역시나 보컬 비중의 변화인데, 목소리를 거의 기계음의 일부로 취급하던 작법에서 벗어나 < Mercurial World > 속 미카 테넨바움(Mica Tenenbaum) 수준의 자유도와 존재감을 부여한 이번의 방향 수정은 자연스레 표현력과 표현 범위의 증대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변화를 단순 변화가 아닌 확장, 혹은 발전이라 평하는 이유는 그 과정에 기존의 기술적 감각까지도 조금의 훼손 없이 온전히 녹여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디 록을 위시한 넓은 방향성에 힘입어 특유의 날카로운 표현력은 그 몸놀림이 더욱 가벼워졌다. 소리의 독창성은 보다 형체가 분명해졌고, 더불어 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구성미까지 존재감을 드러낸다. 메탈에 가까운 초장의 처절한 절규부터 ‘Merry christmas Mr. Lawrence’의 류이치 사카모토를 비추어 보이는 피아노 연주곡 ‘Fish in the pool’까지, 광활한 반경의 소리를 하나의 떨리는 호흡으로 집중시킬 수 있는 것도 아티스트의 음악적 완력이 그 가동 범위를 늘렸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에 기계음 자체가 기존 무채색 근처에서 자연스러운 유채색으로의 변화를 가져갔다는 점은 결정적이다. 해상도를 실물에 가까운 수준으로 높이며 파스텔 풍의 따뜻함을 칠한 사운드 구성은 글리치 팝에 따라붙는 불쾌한 골짜기로부터 작품을 벗어나게 하고, 되려 인간적이라는 인상까지 만들어낸다. 영화 < 그녀 >에서 인공지능 사만다의 목소리가 그랬듯, 세심하고 인간 친화적인 음악적 연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결과다.
상처를 기꺼이 드러내며 승화하는, < Be The Cowboy > 속 미츠키(Mitski)의 찬란한 상흔을 학습하며 < Softscars >의 율은 비로소 현실 세계의 핵으로 뛰어들었다. 테오도르에게 인간의 마음을 배운 ‘그녀’처럼, 인간과의 비교를 거부하던 고성능 AI가 결국 ‘인간의 좋은 친구’로 거듭나는 순간. 이제 율은 두 번 다시 전기양의 꿈을 꾸지 않는다.
- 수록곡 -
1. x w x [추천]
2. Sulky baby [추천]
3. Softscars
4. 4ui12 [추천]
5. Ghosts 6. Dazies [추천]
7. Fish in the pool
8. Software update
9. Inferno
10. Bloodbunny
11. Cyber meat [추천]
12. Aphex Twin fl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