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오한 세계관으로 대형 기획사의 간판과 낙수효과 없이 굳건한 팬덤을 형성했던 걸그룹 이달의 소녀는 K팝이 본래 가졌던 얼터너티브로서의 지위를 상징하는 그룹이다. 소속사와의 소송을 거쳐 열두 명이 네 갈래로 나뉘어졌지만 그중 다섯은 커리어 초반을 지휘한 제작자의 손을 잡아 아르테미스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3인조 유닛과 두 멤버의 솔로 작품을 거쳐 마침내 탄생한 팀의 첫 번째 정규 앨범 < Dall >은 이들의 주된 무기였던 '서사'를 핵심으로 펼쳐진다.

음반은 전반기 이달의 소녀의 색채였던 일렉트로 팝을 바탕으로 이들이 꾸준히 강조한 연대의 메시지를 곳곳에 심었다. 주제는 미디어 속 허상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그리는 타이틀곡 'Virtual angel'처럼 팬과 아이돌의 유대로 표현되기도 하고, 'Butterfly'의 정식 후속작으로 공표한 'Butterfly effect'와 쌍둥이 자매 격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처럼 자체적인 역사의 계승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탐구 정신을 지닌 팬덤에게는 매혹적일 요소다.

정작 스토리텔링과 음악 간 화합은 부족하다. 'Butterfly effect'는 웅장해진 분위기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날카로운 드롭으로 'Butterfly'의 아우라를 재현하려 하나 그때만큼의 감동은 찾기 힘들고 'Virtual angel'도 초반의 매서운 기세에 비해 후반부는 부각되지 않는 후렴에 흐릿해진다. 그라임스와 율(yuele)의 미학이 합쳐진 난폭한 뮤직비디오는 분명 매력적이나 시청을 동반해야 감상과 이해가 완료되는 세계관 접목형 K팝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서사를 위한 음악의 희생은 그룹 내부 차원의 통합을 담당하는 선공개 싱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비교적 무난한 'Candy crush'는 원본이 되는 하슬의 'Plastic candy'에 기댄다는 느낌이 크며 오드아이써클 유닛의 곡 'Air Force One'에서 하필 가장 안일했던 후렴을 따와 이를 에스닉한 리듬에 접붙인 'Air'는 당혹스러울 정도. 개별 프로젝트를 재구성한다는 발상 자체는 신선할 수 있어도 기획에 음악이 소모적으로 끌려가는 형국이다. 희진의 '개화'와 'Algorithm'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합본 리믹스 'Flower rhythm'만이 그나마 흥미롭다.

과거와의 접점 마련에 크게 개의치 않는 노래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그래도 다음을 기대하게 된다. UK 개러지 유행에 가볍게 올라타는 'Sparkle', 멤버들의 보컬 역량을 믿고 따르는 'Unf/air'와 '조난 (Distress)'은 아르테미스만이 가진 강점을 조명하는 예시다. 특히 압도되는 순간은 빌리 아일리시의 스타일에서 모티프를 따온 'Birth'. 퍼플키스 등 몇몇 그룹이 시도한 만큼 K팝에서 종종 탐냈던 레퍼런스지만 대폭 키운 규모와 진하게 덧칠한 공포적인 분위기로 전무후무한 트랙을 완성했다.

의미심장하게도 '탄생'을 뜻하는 'Birth'는 앨범의 시작이 아닌 끝에 놓여있다. < Dall >이 지난 이야기에 작별을 고하고 새 페이지를 여는 분기점이라고 해석하게 된다. 과거의 유산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이에 지나치게 함몰되지 않는 것이 그룹의 장기적인 과업이다. 그룹 프로젝트의 출범을 알리며 사용한 문구 '우리는 함께, 다시 달과 그 너머를 향해 나아갑니다'처럼 아르테미스가 수복한 달 또한 종점이 아닌 출발지여야 한다.

-수록곡-

1. Url

2. Virtual angel

3. Sparkle [추천]

4.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5. Flower rhythm

6. Candy crush

7. Air

8. Unf/air [추천]

9. 조난 (Distress) [추천]

10. Butterfly effect

11. Birth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