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행은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 행운이다. ‘위아래’ 이후 답습의 비판을 피하지 못한 이엑스아이디, 청량한 댄스와 희망 서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이도 저도 아닌 길을 택한 브레이브걸스의 사례가 말해준다. 작년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로 차트 등반의 기회를 얻은 하이키는 이 딜레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대중의 호응을 얻은 요인이 중소 걸그룹의 악전고투 처지를 대변하는 듯한 가사와 이를 정직하게 전달하는 가요 작법이었기 때문이다.
타이틀곡 ‘뜨거워지자 (Let it burn)’로 하이키는 꾸준히 함께했던 작곡가 홍지상과의 협업을 이어간다. 블루지한 도입부에서 화끈한 기타로 향하는 노래는 신시사이저 위주의 기존 구성과 확실히 결이 다르나 하이키만의 강점은 그대로 이식했다. 비록 ‘건사피장’에 이어 ‘Seoul (Such a beautiful city)’, ‘기뻐 (Deeper)’의 작사를 담당한 영케이는 빠졌지만, 정확한 멤버들의 발음과 고저를 명확히 갖추되 지나치게 폭주하지 않는 후렴이 만나 단어 하나하나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한 번 삐끗하면 바로 경로를 트는 패턴은 영세 기획사 소속 아이돌에게 익숙하다. 기세를 크게 잇지 못한 ‘Seoul’ 이후 택한 팝 록으로의 선회는 팀의 캐릭터 파악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비교적 높은 설득력을 보유한다. K팝 내 기타 운용의 점진적 증대를 의식한 결과물이긴 해도, 노래 하나를 이끌어 갈 기본 하드웨어 역량이 장착된 덕분에 대중가요의 특색이 유지된다.
2023-2024 시즌 아이돌의 통과의례가 된 UK 개러지 기반 ‘♥︎ Letter’, 위켄드의 ‘Out of time’이 얼핏 생각나는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만의 이야기 (Iconic)’가 크게 불편하지 않은 원인이기도 하다. 모두가 선봉장이 되지 못하고 후발주자가 대다수인 시장에서 < Love Or Hate >는 유행을 골고루 삼키되 명확한 보컬로 이를 꼭꼭 씹어 소화해 낸다. 특히 슬픔에 비를 빗대는 상투적 비유를 가요 문법으로 상쇄하는 ‘국지성 호우’는 그룹의 어필 대상을 협소한 K팝 이상으로 넓히는 트랙이다.
“요즘 음악은 감동이 없어.” 기성세대의 흔한 푸념이다. 품종 개량에 애쓰는 오늘날 K팝이 전통적 요소를 청산해야 할 적폐로 삼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이키는 역으로 그 뿌리를 파고드는 방법론을 통해 ‘탈 K팝’으로 획일화된 추세에 반기를 든다. 이 또한 고루한 록키즘(rockism)에 입각한 시선일 수도 있으나 아직 또렷한 목소리와 따라 부르기 쉬운 음악만이 해소할 수 있는 갈증이 있는 법이다. 짜릿한 충격에 절여진 우리에게 뜨거운 공감을 선물하는 음반이다.
-수록곡-
1. 뜨거워지자 (Let it burn) [추천]
2. ♥ Letter
3.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만의 이야기 (Iconic)
4. 국지성호우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