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이 명확하지 않은 이들은 ‘다양성’이라는 변명을 자주 찾는다. 미스틱 엔터테인먼트의 7인조 걸그룹 빌리도 그랬다. 사라진 소녀를 찾는 스릴러와 추리물 서사라는 미명 하에 댄스팝 ‘Gingamingayo’, 팝 록 트랙인 ‘Ring ma bell’ 등 매 활동마다 장르 널뛰기가 이어졌다. 청신호가 된 것은 단호한 결단력이다. 아이돌의 관습이 대거 해체되던 격변의 시대에 ‘Eunoia’로 이지리스닝 시류를 살짝 따르며 세계관 요소를 상당수 걷어냈다.
‘부록(appendix)’이라는 제목처럼 신보는 새 페이지에서 밑그림을 그린다. 이런 경우는 보통 하나씩 간을 보다가 끝나기 쉽지만 빌리는 알앤비 스타일 가창을 중심에 놓아 확실한 기틀을 잡았다. 타이틀곡 ‘기억사탕’에서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난다. 피아노의 리드 위에 가성으로 처리한 후렴을 얹은 곡은 아리아나 그란데의 데뷔 초 프로덕션에 < Eternal Sunshine >의 보컬을 합친 모양새로, 한동안 완전체로 활동하지 못했던 그룹의 이야기와 어우러져 다정한 감정이 새어 나온다.
< The Billage Of Perception: Chapter Three >와의 유사성은 신시사이저 대신 일렉트릭 베이스 위주의 사용으로 선을 그었고, 재즈 스타일로 일괄적 기조를 제시하여 개별 트랙이 각개전투에 나서는 아이돌 EP의 클리셰 또한 피하고 있다. 세찬 기타 리프로 난입하는 ‘Bttb (Back to the basics)’가 더욱 당황스러운 이유다. 장르의 온도차도 그렇지만, 그간의 곡명을 억지로 끼워 맞춘 구간은 과거를 잠시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지금 그룹의 상황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기억사탕’을 보조할 쌍끌이로 삼을 정도의 인상을 가진 곡은 없으나 ‘Trampoline’의 시니컬하게 낙하하는 훅, ‘Bluerose’의 고풍스러운 퓨전 재즈 사운드, ‘Shame’의 부드러운 보컬 디렉팅 등 앞으로 참고할 단서는 든든하게 심어 놨다. ‘Eunoia’가 감행한 일차적 리부트 이후 굳히기에는 성공한 음반이다. 남은 것은 확실한 채색. 지금의 안정적인 스케치를 토대로 빌리라는 그룹 자체의 매력을 끄집어내는 것이 다음 단계의 관건이다.
-수록곡-
1. 기억사탕 [추천]
2. Trampoline
3. Bluerose
4. Bttb (Back to the basics)
5. Shame [추천]
6. Dream diary ~ etching mémoires of midnight rêver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