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임필성 감독의 단편영화 < 보금자리 >에서 전도연과 호흡을 맞췄던 아역배우 김푸름의 스릴러 연기는 꽤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배역을 위해 긴 머리를 자르고 버림받은 소년으로 변신한 그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 기복과 섬찟할 만큼 냉소적인 속내를 들추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랬던 그가 십 년이 채 되지 않아 어쿠스틱 기타를 집어 들고 싱어송라이터가 되어 나타난 사실은 사뭇 놀랍다. 성숙의 외피를 장착한 열여덟의 나직한 울림은 모난 곳 없이 반듯한 분위기를 빚어 평안을 전하는 동시에 잊고 살던 기억을 소환한다.
199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 MTV 언플러그드 >의 공연 실황을 동경했다는 그는 이를 앨범 제목에 못 박아둔 채 자신만의 아날로그 방식으로 응답한다. 과거의 질감을 살리려 리본 마이크를 비롯한 장비 세팅과 녹음 기법 마련은 물론 기타 연주와 노래를 함께 진행하는 원테이크 형식을 택하며 숨소리마저 자연스러운 오마주를 창조해냈다. ‘빛’에서 ‘두 배로 야단’으로 이어지는 연계는 잘 다듬어진 사운드 아래 상술한 환경과 최소한의 편곡이 돋보이는 음반의 백미다.
물론 공감과 위로를 주제로 젊은 층을 겨냥한 인디 뮤지션의 음악은 허다하다.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본다면 그가 직접 쓴 가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 출발점이 달랐던 만큼 폭넓은 경험을 쌓아둔 덕일까. 수필의 문법과 동시의 언어를 두루 갖춘 일상의 노랫말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을 쓰다듬는다. 곡마다 강점을 둔 한 줄의 문장과 그 순간에 담아낸 처절한 정서 표현. 김푸름은 타이밍 잡기에 성공했다. 평범함을 벗어나기 위해 문학적 시도에 공을 들인 그의 점잖은 발길질이 유별점을 마련한 셈이다.
결은 비슷하나 색은 이채롭다. 일찍 철이 든 십 대의 정형을 벗어난 가사가 초반부를 점유하며 흐뭇한 웃음을 안겼다면 종반에 다다르며 점차 변주를 두고자 하는 욕심이 보인다. ‘우산도둑’과 ‘Mamagirl’은 통기타 중심의 원테이크-언플러그드 콘셉트를 유지하되 박자와 연주법을 달리하고, ‘Romeo & Juliet’은 변칙된 리듬 위에서 음색을 부각한다. 나아가 영어 제목을 가진 위 두 곡은 작품을 통틀어 한글을 쓰지 않은 유이한 곡으로 김푸름이 오늘날의 인디 팝과 포크 음악에 받은 영향이 비치는 대목이자 앞으로의 방향성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한 곡의 강한 자극보다 열 곡의 담백한 뒷맛을 택한 김푸름의 소작(所作)은 비어 있어 매력적이다. 애초의 기획 의도와 솔직함으로 승부한 그에게는 공백을 채워나갈 여력이 충분해 보이고, 세월의 꺼풀을 쌓아가며 더욱 농익어 갈 꾸밈없는 노랫말은 차기작의 기대감을 키운다. 조용히 훔쳐본 소녀의 일기장에는 예상치 못한 위문이 깃들어 있었다. < ‘푸르스름’ 언플러그드 > 속 아기자기한 문구과 포근하고도 진중한 음악이 지난날의 순수했던 우리를 일깨운다.
-수록곡-
1. 길 헤는 밤
2. 날고양이
3. 소라게
4. 빛 [추천]
5. 두 배로 야단 [추천]
6. Romeo & Juliet [추천]
7. 우산도둑
8. Mamagirl
9. 가죽
10. 더 얼마나 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