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일 인터뷰
정재일
음(音) 예술이 할 수 있는 모든 지점의 극(極)에 도달하려는 듯, 정재일의 스펙트럼은 다채로움 그 이상이다. ‘슈퍼밴드’라 불리는 긱스(Gigs)부터 국악과 월드뮤직, 연극 음악과 더불어 박효신, 보아, 아이유 등의 작업에도 숨결을 불어 넣었던 과거를 보자. 폭넓은 커리어를 톺아볼수록 현재 < 기생충 >, < 오징어 게임 >으로 대표되는 영상 음악 작업자로의 정재일이 무엇보다 자연스러워 보인다. 존재하는 장르 전부가 혼연되는 게 사운드트랙이니 말이다.
정재일의 연주를 직접 본 사람이라면 그의 손길에서 몰입을 느낀 바 있을 것이다. 그 밀도 높은 기운은 삼청동 모처에서 나눈 대화에서도 이어졌다. 상체를 인터뷰어에게 기울인 채 눈을 맞추며 경청하고 나지막이 답했다. 때로는 고심 끝에 떨어진 그의 목소리가 또 하나의 기품 있는 연주처럼 느껴졌다. 건반을 두드리듯 생동감 있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다른 형식의 음악이었다.
많은 활동을 했지만 현재는 영화, 드라마 음악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영상 음악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중요한 생계 수단이다. 여러 활동 속에서 여타 예술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음악의 힘을 절실히 느꼈다. 더불어 존재할수록 불어나는 그 힘의 이점을 잘 구사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20대 때는 팝 음악을 주로 했지만 표현하고 싶은 드라마를 모두 함축하기에 3분대 러닝 타임은 너무 짧았다. 절대적인 시간이 주어져야 감동을 느낄 수 있다고 여겨서 호흡을 길게 가져갈 수 있는 영상 음악에 더 마음이 간다.
본인의 음악을 자평하자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음악으로 돈을 번지 30년 정도 된 것 같다. 지금까지는 다 클라이언트가 있는 음악을 해왔다. 예컨대 팝은 가수가, 영화는 해당 극이 주인공인 식으로. 다시 말해 누군가를 위한 음악을 해왔기 때문에 ‘내 음악’을 말하기엔 아직도 초보 단계인 것 같다. 감사하게도 데카(DECCA)라는 클래식 레이블에서 솔로 음반을 내게 돼서 ‘음악만을 위한 음악’을 골똘히 고민하는 중이다.
그럼 거슬러 올라가서 ‘음악만을 위한’을 떼고, 음악 세계에 발을 들인 경로는 무엇인가.
중학교 2학년쯤 재즈 아카데미라는 기관에서 작곡가 김기표 선생께 작곡을 배웠다. 고등 교육을 빨리 수료하고 싶은 마음에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 시험을 쳤는데 불합격한 거다. 그래서 재수를 준비하는 와중에 밴드 긱스에 합류 제의를 받았고, 그 후부터 직업인으로서 음악을 하게 됐다.
긱스에서 받은 배움도 많았을 것 같다.
정말로 그렇다. 꼬마일 적에 시작해서 학교 같은 느낌의 팀 활동이었다. 음악 생활의 전부를 배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영상 음악에 필요한 호흡을 학습하기에도 밴드 경험이 유효했다. 하지만 유능한 사람들이 모여서 협업하는 과정에는 어려움도 많다. 좋은 시간이었지만 혼자 작업하는 걸 선호하는 스타일이어서 현재는 영상 음악 작곡에 힘을 쏟게 됐다.
클래식 음악 또한 많이 듣는 편인가.
바흐 등 고전 음악부터 시작해 현재 만들어지는 것까지, 클래식이라고 통칭하는 서양 전통 음악은 감상을 포함해 공부를 위해서라도 다 듣는다. 특히 에스토니아 음악가 중에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라는 인물의 음악에서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구도자적인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런 종교적이고 규율이 있는 음악을 많이 흡수했다.
공연 음악 또한 많이 작업했다. 그중에서도 다수가 극단 ‘학전’에 올린 연극인데, 얼마 전 작고한 김민기와는 어떤 연이 있었나.
긱스가 김민기 트리뷰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게 첫 연이었다. 당시 김민기의 음악을 깊숙이 알게 되면서 노랫말의 기준을 알려주신 영웅 같은 분이 됐다. 또 오랜 시간이 지나 나에게 해주셨던 옛날얘기가 생각난다. 1970년대 살벌하던 시절에 노동자들을 위한 뮤지컬을 공장에서 만들었던 이야기다. < 공장의 불빛 >이 당시에는 불법으로 만든 뮤지컬이었는데, 그걸 호적 없는 자식처럼 여겨 “호적을 만들어주고 싶다”며 나에게 리메이크를 맡기셔서 개인적인 인연이 시작됐다. 그 후로 작년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학전’에서 올린 어린이극은 전부 음악 감독을 맡았다.
< 오징어 게임 >의 스코어는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졌다. 대중성을 고려한 결과였나.
대중성을 크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니다. 시리즈에 걸맞은 음악을 최우선으로 작업에 임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시청자가 느낄 감명에 음악이 협조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상 음악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중성이라고 생각한다.
시즌 2 또한 여러 곡을 만들었다.
사실 시리즈라 시즌 1 음악을 재사용할 수 있을 테니 편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재활용하지 못하고 새로운 음악이 많이 탄생했다. 시즌을 이루는 게임이 다 달라져서 기존 테마를 적용할 수 있는 지점이 적었다.
이번 작업에서 가장 흡족한 부분이 있다면.
5인 6각 게임을 하는 장면에 쓰인 음악이다. 죽고 죽이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서로를 응원하는 정서를 느끼는 플롯. 그런 따뜻함과 인간성을 표현할 때 몰입이 돼서 더 잘 만들게 된 것 같다. 감독 또한 한 번에 OK 사인을 주셨다. 반대로 잔인한 묘사가 들어간 부분은 ‘이렇게 할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도 든다.
안드레아 보첼리, 사라 브라이트만 ‘Time to say goodbye’나 무한궤도 ‘그대에게’ 등이 극 안에 사용되기도 했다.
해당 곡들의 선곡은 황동혁 감독이 스크립트 작업 때부터 직접 하신 거다. 집필한 사람이 염두에 둔 선곡이기 때문에 스코어보다 훨씬 더 강력한 각운이 있었던 것 같다.
영상 업계 내 OTT의 존재감이 더욱 크게 다가오고 있는 요즘이다. 음악가의 입장에서는 여러 플랫폼의 부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굉장히 좋게 생각한다. 넷플릭스를 예로 들자면, 봉준호 감독의 < 옥자 > 음악을 맡으며 처음 함께 일하게 됐다. 상업성을 우선시해야 하는 곳 같아 보이지만 그보다 예술가의 자유를 존중해준다. 그래서 좋은 작품이 많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 오징어 게임 > 또한 마찬가지로 묵혀뒀던 영화 시나리오를 황동혁 감독의 의도를 해치지 않도록 투자해 주며 엄청난 성공을 거둔 셈이고. 안 좋은 점도 있겠지만 장점이 더 깊게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큰 자본 속 음악인 K팝에 대해서는 어떤 시각을 가지는지도 궁금하다.
음악적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큰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많은 연구와 유능한 인물들이 모였다는 증거다. 물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분야는 아이돌 팝을 위시한 K팝이지만 그로 인해서 싱어송라이터 혹은 밴드 음악도 같이 성장하고 있지 않나. 마치 서양 음악이 고대 종교 음악에서 시작해 전 세계적 음악이 됐듯 K팝과 더불어 올곧게 이은 한국 정서가 많은 나라에 설득력을 가지는 중이라 여긴다.
곧 개봉하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영화 < 미키 17 >에도 음악 참여하는 걸로 안다. 어떤 음악을 만들었는지 힌트를 줄 수 있나.
굉장히 클래식한 곡들이 수록될 거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은 걸 말하진 못하지만, 영화를 위해 쓰인 작업 중 개인적으로 아끼는 음악이 만들어졌다.
음악 외적인 예술에서도 영향을 받는가.
물론이다. 예술이라면 전 분야에서 다 받는다. 특히 무대 예술, 그중에서도 무용을 좋아한다. 모든 인간의 몸짓, 전통 및 현대무용, 발레 등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이즘 공식 질문이다. 작곡가로서 음악을 만들 때 본인에게 영향을 준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류이치 사카모토다. 예술가로서 흔치 않은 행보를 걸은 사람이다.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라는 팀으로 시작해 실험적인 음악을 하면서도 아이돌 그룹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고, 영화 음악이나 본인 고유의 예술 작품을 동시에 끊임없이 이어온 작곡가가 전 세계를 통틀어 그리 많지 않다. 여러 활동을 통한 영향으로 독특한 음악과 사카모토만의 언어가 확실하게 있다고 느낀다. 그렇게 장르적인 실험을 많이 할수록 좋은 영화 음악가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행: 임진모, 염동교, 한성현, 정기엽, 박승민, 신동규
정리: 정기엽
사진: 정다은 (#2 사진 제공: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