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미국 대중음악 신의 키워드는 역주행이었다. ‘Good luck, babe!’의 성공이 데뷔 앨범의 뒤늦은 히트를 이끈 채플 론, 10년 무명의 설움을 청산하며 슈퍼스타가 된 사브리나 카펜터, 그리고 세 번째 주자는 그레이시 에이브럼스다. 그전에도 약간의 인지도는 있었으나 테일러 스위프트의 ‘에라스(The Eras)’ 투어 오프닝을 계기로 그는 지금 급격한 상승세를 겪는 중이다. ‘I love you, I’m sorry’가 빌보드 19위, 영국 4위를 기록한 것에 이어 ‘That’s so true’는 한술 더 떠 자국에서는 6위에 올랐고 영국에서는 8주간 1위를 지켰다.
팝 차트를 점거한 ‘테일러 키즈(kids)’ 중 그레이시 에이브럼스는 선배를 가장 똑 닮은 케이스다. 정규 데뷔작 < Good Riddance >와 이번 < The Secret Of Us > 모두 < Folklore > 이후 테일러 스위프트의 단짝이 된 밴드 내셔널(The National)의 멤버 아론 데스너(Aaron Dessner)가 메인 프로듀서를 맡았고, 음악도 포크/컨트리 팝 안에서 맴돈다. 텍스트는 물을 것도 없이 굉장히 사사로운 사랑과 이별 이야기. 팬들이 앨범의 뮤즈로 추정되는 배우 폴 메스칼과의 복잡한 타임라인을 헤집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 그에게 가장 거슬리는 것은 ‘네포 베이비(nepo baby)’ 칭호일 테다. 유명 영화감독인 아버지 J. J. 에이브럼스의 지원을 등에 업은 ‘금수저’라는 뜻이다. 앨범은 일각의 비판을 성공적으로 변론하지 못한다. ‘Blowing smoke’와 ‘I love you, I’m sorry’, 현재까지는 최고 히트작인 ‘That’s so true’ 등 팝 문법을 짜임새 있게 따르는 트랙이 더러 존재하고 업비트 곡의 비율이 대폭 늘어나 전작보다 하품이 덜 나오기는 하나, 동일 비교군 내에서 아티스트만의 특색이 턱없이 옅은 탓이다.
솔직하고 털털한 가사를 특기라 말하기엔 올리비아 로드리고 이후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고백에 몰두하고 있는 시국이니 특별히 눈에 띄는 화법은 아니다. 외관도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감정을 꾹꾹 눌러 담다가 고함치는 브릿지로 귀결되는 크레센도식 얼개가 거의 모든 곡에 일괄 적용되고 있어 찰나의 감정적 동요도 금세 무뎌진다. 그나마 ‘Free now’처럼 약간의 변주를 시도하는 경우가 있지만 어이없을 정도로 힘 빠지는 절정부는 곡을 그저 피비 브리저스 대표 넘버 ‘I know the end’의 엉성한 패러디로 만들뿐이다.
그레이시 에이브럼스의 소구력은 어느 하나 모난 것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폭넓게 공감할 수 있는 연애 이야기, 어렵게 꼬지 않은 작법, 쉽게 따라 흥얼거릴 수 있는 음역대 등 그는 일정 수준의 대중적 반응을 보장하는 안전 범위 내에 머문다. 덕분에 상당한 규모로 투어를 돌며 인기를 끌고 있지만 개별 아티스트로서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수없이 축적된 선례를 감안하더라도 “로드가 부르는 테일러 스위프트 노래”로 요약할 수 있는 음악관이 매력적이라 말하기에는 힘들지 않나. 시대의 대변자가 되기보다는 세태와 유행의 흔적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수록곡-
1. Felt good about you
2. Risk
3. Blowing smoke [추천]
4. I love you, I’m sorry [추천]
5. Us (Feat. Taylor Swift)
6. Let it happen
7. Tough love [추천]
8. I knew it, I know you
9. Gave you I gave you I
10. Normal thing
11. Good luck Charlie
12. Free now
13. Close to you
14. Cool
15. That’s so true [추천]
16. I told you things
17. Packing it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