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물결치는 스테이지의 열락, 제이미 엑스엑스(Jamie xx) 내한 공연
제이미 엑스엑스(Jamie xx)
2020년대 초반을 지배했던 팬데믹은 모든 아티스트에게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더 엑스엑스(The xx)의 배후에서 소리를 매만지다 솔로로 명성을 떨친 제이미 엑스엑스(Jamie xx, 이하 제이미)도 마찬가지다. 2015년 < In Colour >를 통해 대중과 평단 양쪽을 매료시키며 일약 전자음악 신의 스타로 떠올랐던 제이미는 한때 도통 감을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급격히 바빠진 스케줄로 인해 이렇다 할 작업물을 내지 못하며 시간이 흘러간 탓이다. 그를 수렁에서 꺼낸 구세주는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인을 방 안에 가둔 코로나19였다. 비로소 숨을 고르며 창작욕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자 ‘Idontknow’에서 ‘Kill dem’으로 이어지는 댄서블한 싱글을 내놓았고 이는 곧 신보 < In Waves >의 청사진으로 발전했다.
댄스 뮤직은 몸을 가만히 둘 때보다 신나게 흔들 때, 또 혼자보다 여럿일 때 그 가치가 극대화된다. 포스트 팬데믹 시대가 열리자마자 사람들을 물결치는 스테이지 속으로 이끈 제이미의 생각도 동일했을 것이다. 허울뿐인 월드 투어가 아니라 진정으로 지구 전체를 돌며 춤판을 열겠다는 원대한 계획엔 다행히 대한민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니아들에게 섬짓했던 해프닝으로 기억되는 2013년 ‘옥타곤 강판 사태’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모욕적이었던 십여 년 전 일과 더 엑스엑스로서의 공연을 제외하면 사실상 첫 내한이었기에 그를 기다려 왔던 수많은 팬들은 달력만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다.
오프닝 액트는 일렉트로닉 듀오 살라만다(Salamanda)의 일원으로 이름을 알린 디제이 예츠비(Yetsuby). 지난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일렉트로닉 음반 부문을 수상할 만큼 뛰어난 음악적 역량을 갖춘 아티스트지만, 이날 밤은 보다 개성적인 개인 작업물 대신 주인공을 위해 미리 열기를 달구어 놓는 데 집중했다. 하우스로 시작해 개러지, 댄스홀, 그라임 등 여러 장르를 오가는 수준급의 믹스셋이 인상적이었으며 곡이 넘어갈 때마다 그 신선함에 매료되어 샤잠(Shazam)을 연거푸 켜야만 했다. 이어 무대에 올라온 제이미는 마치 백 투 백 셋처럼 덱을 넘겨받아 ‘Wanna’로 출발을 알렸다.
레이브, 댄스 플로어, 클럽 신 - < In Waves >를 설명할 때 으레 동원되는 단어들이다. 그 수식어에 걸맞게 제이미의 공연 역시 오롯이 춤과 음악에만 몰두할 수 있게끔 설계된 미니멀한 구조가 돋보였다. 고대의 4원소설을 댄스 뮤직에 적용하면 첫 번째로 음악, 이를 재생하는 디제이, 이에 맞추어 춤을 추는 관객, 마지막으로 흥을 돋우는 빛이라고 분류할 수 있겠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가 창조한 홀은 네 요소를 빼놓지 않고 만족하는 완벽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종종 간과한 나머지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둑어둑하거나 반대로 쉽게 과해지곤 하는 라이트 쇼 또한 중용의 미덕을 충실히 따랐다.
때문에 제이미의 커리어 전체에서 제일 칠한 무드를 자랑하는 ‘Loud places’가 흘러나오는 장면은 단순한 감동보다도 하나의 황홀한 체험에 가까웠다. 그전까지 정체를 감추고 있던 무대 뒤편의 미러볼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후 총천연색의 섬광을 쏘아내는 순간 모든 관객이 춤추는 것마저 잊은 채 넋을 잃고 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한국을 찾았던 로미(Romy)의 아련한 보컬과 빛이 한데 뒤섞여 만든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두 정규작 사이 9년의 공백기만큼 앨범 분위기의 간극도 극명했으나, 제이미는 노련한 믹싱으로 < In Colour >의 무지개와 < In Waves >의 흑백을 섞어 냈다. 투스텝 리듬을 바탕으로 베이스 뮤직 사이 ‘Gosh’를 절묘히 연결하거나 ‘Obvs’의 신시사이저 멜로디를 슬쩍 밀어 넣는 방법으로 올드 팬들에게 선물을 건넸다. 앨범에 수록되지 않았으나 빼어난 싱글 'Let's do it again'이 그 파괴력을 여실히 드러냈으며 한국 팬들을 위한 페기 구(Peggy Gou)의 ‘I go’도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무대를 한바탕 뒤집어 놓은 제이미는 이내 도파민의 결정체를 향해 군중을 이끌었다. 바로 < In Waves >의 세 뱅어 트랙으로 마무리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다. 시작을 끊은 곡은 아발란치스(The Avalanches)와 협업한 ‘All you children’.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뻔한 전개로 일관하지 않으며 브라이언 케슬러(Bryan Kessler)의 ‘Team closing’을 매시업해 강렬하면서도 독특한 드롭으로 포문을 열었다. 아직 ‘We will dance together’라 되뇌는 최면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돌연 들려온 ‘The house of rising sun’ 속 라틴 기타는 사실 예측 가능에 더 가까웠다. ‘Life’의 메인 브라스 루프를 해당 곡에서 샘플링한 까닭이다. 이미 다들 레퍼토리를 알고 있건만, 제이미는 마치 살살 애태우는 듯한 믹싱으로 천천히 흥분을 더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그 인트로가 등장한 순간 플로어는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다.
앞선 2연타에 혼이 쏙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킬링 트랙인 ‘Baddy on the floor’가 남아 있음을 깨달았기에 멈출 여력 따위는 없었다. ‘Life’ 후반부를 그대로 전주와 접붙이는 정공법으로 다가온 제이미는 남은 힘마저 다 빼놓겠다는 듯 스테이지를 한 차례 더 흔들고 에필로그 격인 ‘I know there’s gonna be (Good times)’로 넘어갔다. 영 떡(Young Thug)의 경쾌한 래핑을 듣고 나서야 끝이 다가왔음을 자각하고 가까스로 숨을 돌렸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던 앙코르 ‘I wanna be your dog’ 역시 일렉트로닉의 경계를 넘어서는, 음악 전반에 대한 제이미의 관심이 내다보이는 대목이다. 월드 투어의 다른 공연에선 레드 제플린의 ‘Whole lotta love’, 조이 디비전의 ‘Atmosphere’ 등을 틀며 록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기 때문. 관객들은 형형히 울리는 이기 팝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희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밤 10시라는 늦은 시간에 종료되었기에, 그리고 제이미가 일본에서 연속으로 일정을 진행한 후 당일 오후 피곤한 몸으로 입국했기에 이후 팬 서비스가 한층 각별했다.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해 그를 잠시라도 더 보고자 예스24 라이브홀 근처를 서성이는 사람들을 향해 흔쾌히 다가간 그는 모인 이들에게 따뜻이 말을 걸며 결코 잊지 못할 추억을 새겨 주었다. 삼삼오오 CD, 바이닐과 머천다이즈를 든 관객 가운데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기까지, 제각기 다양한 겉모습을 가진 채 사회 곳곳을 누비는 이들이지만 이날만큼은 제이미와 댄스 뮤직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다.
오랜 단독 내한의 부재와 이로 인한 아쉬움을 단박에 날려 버릴 만큼 감격스러운 쇼였다. 또 제이미 엑스엑스라는 아티스트의 커리어와 그가 줄곧 지켜 왔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 더욱 의미 깊었다. 한 음반에 많은 정성을 쏟는 성격상 그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필자는 2024년 11월 28일의 소중한 기억을 간직한 채 희망을 안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날 즐거움을 함께했던 관객들도 필자와 같은 마음이리라.
취재 및 정리: 박승민
사진: 염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