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절대 독학으로 배울 수 없다. 문헌을 독파하듯 수많은 사람들을 참고 자료로 끌어 쓸 때 진정한 결심에 닿는다. 이 사실을 깊이 이해한 영국의 15년차 일렉트로닉 듀오는 두 번째 앨범으로부터 7년에 달한 연구를 마치고 혼란을 애정으로 극복한다. 이들이 속한 레이블 닌자 튠이 페기 구, 박혜진 그리고 블랙 컨트리, 뉴 로드 등을 영입해 인디 명가로 더 견고해질 만큼의 시간이었다. 본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머리가 빠질 만큼” 험난했다고 하지만,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간의 과정이 헛된 고뇌가 아니었음을 첫 트랙부터 증명한다. 큰떡갈나무를 뜻하는 ‘Blackoak’는 흔치 않은 작명만큼 신선한 바람을 불며 찾아온다. 보컬 샘플처럼 기계적인 소리가 이끄는 와중에도 차임벨, 퍼커션 등 각종 아날로그 악기가 감칠맛을 더해 고유의 색을 띤다. 음과 양 같은 ‘디지로그’적 합심은 앨범 전체에 흩뿌려진 힘으로, 신시사이저와 현악기가 혼재하는 ‘Rolling stone’까지 이어진다. 두 곡은 각각이 음반에서 가장 중요한 도입과 마무리를 아름답게 장식해 낸다.
성장의 보폭은 초기부터 꾸준한 협업을 이어온 보컬리스트 할리 워커와 함께한 곡들에서 도드라진다. 거친 리듬이 상충했던 1집 < Portraits >, 보다 세련된 소리 체계를 구축했지만 리믹스 같은 재창조물처럼 느껴지던 2집 < Kingdoms In Colour >을 지나온 이번 앨범, ‘Otherside’와 ‘Peace talk’는 각자의 개성을 살릴 정 가운데를 드디어 찾았다. 특히 후자에서 목소리와 현악은 유려하게 흐르되, 일렉트로닉 특유의 세밀한 질감까지 놓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 완성에 가까운 정형시의 탄생이다.
열 곡의 깔끔한 배치는 자연스러운 풍경 속으로 청자를 스며들게 한다. 사진처럼 구체적인 재질의 기타, 피아노 음이 아로새겨진 ‘Il remember’와 추상화나 초현실적 영화 속 클럽 같은 배경을 떠올리게 하는 ‘Dance on the world’는 지닌 성질 자체가 판이하지만 한 작품 내에 엮여 위화감 없이 묶인다. 이 또한 오랜 실험의 성과이리라. 후반의 ‘Passing clouds’에서 해가 저무는 언덕을 내려다보는 듯하다가 ‘Eko’s’에서 어두워진 거리를 차로 내지르는 심상을 준다. 보이지 않는 음악이 시각적 내러티브를 그려보게 만드는 것, 앨범이 주는 미학은 이런 지점에서 온다.
도로 위 가로수와 모래사장 위 야자수는 뿜어내는 기운부터가 다르다. 차트 위에서 여유를 표방한 음악들이 전자라면, 이 앨범은 분명한 후자다. 낯선 여행을 떠나듯 홀가분한 멜로디가 만연해 복잡한 세상사의 스위치를 끌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사용자의 느슨한 생각을 유도하는 프로세스는 속을 뜯어보면 굉장히 많은 선을 품을 테다. 듣기 편안한 소리를 직조한 이면에는 다채로운 악기 레이어가 숨어 있다. 마치 내부 스프링이 여럿 존재할수록 더 아늑한 자리를 만드는 매트리스처럼, 한 땀씩 만든 다단한 소리가 침대 같은 편안함을 선물한다.
-수록곡-
1. Blackoak [추천]
2. Otherside (With. Holly Walker) [추천]
3. Il remember
4. All I need (With. Andreya Triana)
5. Dance on the world (With. North Downs)
6. Bloom (With. Gaidaa)
7. Peace talk (With. Holly Walker) [추천]
8. Passing Clouds
9. Eko’s
10. Rolling Stone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