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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Pulp)
2025

by 한성현

2025.06.20

펄프의 음악은 늘 일종의 선언이었다. < His ‘N’ Hers >로 소시민적 삶을 해부한 그들이 무명 시절을 끝낸 직후 발표한 < Different Class >는 아예 제목부터 자본 계급 타파 항쟁 시도 아닌가. 성공의 기쁨과 그보다 더한 명성의 부작용을 겪고 나온 밴드는 1998년 < This Is Hardcore >에서 ‘브릿팝’ 열풍의 몰락과 스스로의 노쇠를 받아들였고, 약간의 긍정주의를 틔운 2001년 < We Love Life >와 함께 펄프는 아이러니하게도 끝을 알렸다.

‘나는 공연을 위해 태어났어/천직이지/내 존재 이유는/소리 지르고 춤추는 것’ (‘Spike island’ 中)

신보는 간단하다. < More >. 아직 더 들려줄 말이 있다는 뜻이다. 물론 프론트맨 자비스 코커는 계속해서 음반 활동을 지속했고 2017년에는 새 밴드 자브 이스(JARV IS…)도 차렸다. 이번 작품에도 자브 이스의 멤버들이 참여했고, 클래식 퓨전 앨범을 공동 제작한 피아니스트 칠리 곤잘레스 또한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지만 < More >는 어디까지나, 그리고 당연히 펄프의 음악이다. 흘러간 아우라의 힘겨운 재현은 아니다. 24년 만의 정규작은 중단되었던 연대기의 자연스러운 재개를 지향한다.

1990년대 브릿팝으로 묶이나 펄프는 동시기 다른 팀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만큼 그들에게는 중후함이 있었다. 악틱 몽키스, 제시 웨어, 블러 등 쟁쟁한 아티스트와 협업한 프로듀서 제임스 포드의 느긋한 사운드 투영에 힘입어 < More >는 중년 너머 장년의 인생을 그린다. 소꿉친구 데보라를 애타게 부르던 ‘Disco 2000’의 추억은 거리에서 스친 티나(‘Tina’)에 대한 외로운 상상으로, < We Love Life >의 끝에서 맞이한 해돋이(‘Sunrsie’)는 해가 가라앉는 풍경(‘A sunset’)이 되었다.

세월 앞에 굴복한 이들의 항복 표시? 마냥 그렇게 치부할 수는 없다. 늙어감에 대한 경계는 떨칠 수 없으나(‘Grown ups’) 불가피한 성장은 냉소주의를 온정으로 바꿨다. 두 번째 싱글 ‘Got to have love’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긴박한 리듬이 식어버린 남녀 관계를 조롱하던 ‘Lipgloss’를 닮았지만 주제는 정반대다. '사랑 없는 관계란 그저 남의 몸 안에서 자위하는 꼴'이라 말하는 짓궂은 유머에는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결론이 담겨있다.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지듯 앨범은 뒤로 갈수록 감정적이다. 늘 기발한 비유를 일삼던 자비스 코커는 ‘Background noise’로 사랑을 없어져야 눈치채는 배경 소음에 빗대고, 떠나더라도 눈에 보이게 있어달라 간청하는 ‘The hymn of the north’ 속 그의 목소리는 꽤 촉촉하다. 체온을 더하는 것은 재밌게도 전성기 음악의 요소다. 바이올리니스트 러셀 시니어의 탈퇴 이후 비중이 줄었던 현악기의 부활이 감정을 덧대고, 그렇게 여전히 부릅뜬 눈동자로 펄프는 사람과 사람이 뒤엉킨 사회 이상의 더 큰 세계와 관념을 담는다.

‘세상에 하고 싶은 게 있다면/약간의 시간을 벌어주고/선택지를 주는 일’ (‘A sunset’ 中)

‘Spike island’ 싱글 발매에 맞춰 펄프는 < Different Class > 당시 포토슛에 AI 애니메이션을 적용한 뮤직비디오를 내놓았다. 사진이 괴상하게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공지능에 맞서 직접 돌아오겠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종말을 앞두고 일상을 찾는 ‘A sunset’처럼, 비극의 발생 빈도가 계속 높아지는 세상에 복귀한 펄프는 거센 혁명 대신 이제 보다 인간적인 방식을 택했다. < More >는 비록 유해지더라도 굳어지지 않겠다는 결심이 보이는 앨범이다. 멋지게 늙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큰 축복이다.

-수록곡-
1. Spike island [추천]
2. Tina [추천]
3. Grown ups [추천]
4. Slow jam
5. Farmers market
6. My sex
7. Got to have love [추천]
8. Background noise [추천]
9. Partial eclipse
10. The hymn of the north (Feat. Chilly Gonzales)
11. A sunset [추천]
한성현(hansh9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