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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quilizer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Oneohtrix Point Never)
2025

by 박승민

2025.12.29

기술의 발전이 야기한 정보 범람은 인류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사각의 화면에서 무한히 쏟아지는 자료에 의해 트랜스 상태에 빠지는 체험은 어린 시절의 다니엘 로파틴에게도 대단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빚어낸 < Replica >와 베이퍼웨이브의 시초 < Chuck Person’s Eccojams Vol. 1 >은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이하 OPN)라는 이름을 일렉트로니카 신의 거대한 상징으로 만들었다. 허나 그는 해묵은 미디어를 뒤적이던 유년기에서 기인한 유산으로부터 갑작스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괴기한 콘셉트의 7집 < Garden Of Delete >와 동료의 조력을 받아들인 8집 < Age Of >는 모두 기존의 성취를 전복함으로써 나아가려는 움직임이다. 이어 노골적으로 커리어 전반을 묶어내 답습을 매듭짓고자 했던 시도를 거쳐 그는 끝내 전날의 자신과 손을 잡는다.


전작 < Again >에서 장대한 규모만을 빌려왔다. 유실될 위기에 놓였던 1990년대의 샘플 CD를 토대로 과정 중심적인 작업을 해 나갔다는 소개처럼 < Tranquilizer >의 방법론은 OPN이 그토록 떨쳐내려 분투한 지난날의 방식과 닮았다. 각종 샘플을 절묘하게 병치하고 잘라내어 희미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수법은 < R Plus Seven > 이후의 작품에 도사리는 보컬과 미디 드럼을 걷어내며 더욱 고도화되었다. 다만 절제의 미학에 따라 주된 요소의 질감에 집중했던 이전과 다르게 철저히 의도한 포화가 샘플과 배경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 < Tra >라는 제목의 EP로 선공개한 첫 세 트랙이 방향 전환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너른 공간감 위로 효과음을 겹겹이 배치해 세밀히 쌓아 올린 사운드스케이프가 자아내는 감흥은 회귀 속에서의 진보라는 주요한 이정표를 제공한다.


초입을 통과한 노스탤지어의 영역에는 집요한 변주가 빼곡히 자리한다. 소스를 파편화한 앰비언트에서 옅은 색소폰으로, 다시 꿈틀대는 신시사이저로 이행하는 ‘Modern lust’는 예고편에 불과할 뿐이다. 점차 긴장의 끈을 조이는 전개에서 사람의 웃음을 기점으로 더한 두터운 베이스가 기막힌 굴절을 만든 ‘Vestigel’과 반복되는 피아노에 여러 악기를 수놓은 ‘Cherry blue’에서 발휘한 솜씨는 원형을 유지한 채 주변을 비트는 변용의 문법을 따른다. 심지어 완급 조절의 목적으로 사이사이 투입한 넘버, 가령 ‘Bell scanner’ 중후반부의 부드러운 솔로에서도 번뜩이는 센스가 여전하다. 플런더포닉스의 선구자 애벌랜치스(The Avalanches)가 그러하듯, 그가 소리를 어루만지는 태도는 지극히 따뜻하며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포근한 세상은 자각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붕괴해야만 한다. 넓게 펼친 신시사이저가 공격적인 글리치로 변모하는 ‘D.I.S.’의 현현을 목도하라. 더블 베이스가 울린 직후 울부짖는 듯한 전자음이 디스토피아를 묘사하면 질세라 뒤따른 피아노에서 아련한 멜로디가 흘러나오니, 사운드 콜라주에 가까운 작법이 물질계의 순환 구조를 청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이에 필적하는 ‘Storm show’는 그가 구현한 세계관의 결정체다. 도입부의 현장감 가득한 앰비언스는 물소리를 연상케 하는 마림바와 합쳐져 광활한 풍경을 그려내지만 이윽고 신시사이저의 폭풍에 휘말려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잠깐의 정적을 뚫고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새의 지저귐과 기계음이다. 자연과 문명이 충돌하며 발생한 격정적 혼란 또한 오래 가지 못하고 진정되는 대목에서 탄생과 파괴를 되풀이하는 창조주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종전의 진행을 무너뜨리고 내딛는 발걸음을 그 자신조차 멈출 수 없다. 느릿한 비트를 돌연 테크노의 광란에 밀어 넣는 ‘Rodl glide’는 특유의 유머 감각이 여실히 발현된 트랙이다. 마냥 엄숙함으로 일관하기보다 익살을 섞는 편이 효과적임을 잘 알고 있기에 ‘Petro’의 잔잔함에 돌을 던지는 균열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이러한 환기는 종점의 다층성과 절정에 오른 감정선을 예비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고의로 이음매를 거칠게 처리한 앞선 변주와 달리 처음의 에스닉한 분위기에 퍼커션을 덧붙여 고조되는 ‘Waterfalls’의 구성은 마치 유기체와도 같은 생명력을 지녔다. 즐겨 사용하는 하프시코드가 등장하고 나서도 갈무리되지 않고 이어지는 확장이 일견 과하게 느껴지기도 하나, 마지막으로 짤막한 ‘Up’ 샘플과 함께 애수 넘치는 선율이 흘러나올 때 마침내 도달한 평정은 그가 결국 자기 부정을 마치고 자아의 통합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그렇게 엔딩은 스스로에게 보내는 최초의 악수가 된다.


OPN의 지난 10년은 과거의 망령과 작별하기 위한 투쟁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탐구해 왔던 음악의 정수를 지난한 굴레 끝에 발견해 냈다. 이 값진 결실은 비단 예술가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속의 반작용으로 무수한 사료가 유실되고, 뇌를 썩게 만드는 가짜가 난립하는 상황에서 필요한 자세는 무엇인가? 그의 대답은 많은 이들이 잊고 있었던 소리의 조각을 가리킨다. 끊임없이 퇴적되는 역사를 퍼내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비로소 생겨난 가치는 시간을 초월한 산물로 실체화된다. 무미건조하다는 오해를 받아 온 전자음악이 세월의 궤적을 지닌 인간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 Tranquilizer >는 과잉의 시대에 투여하는 안정제인 동시에 각성제로도 기능한다. 이미 터져 나온 거센 물결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라도 괜찮다. 기나긴 고비를 넘어 극한에 선 한 인간을 보며, 우리는 무정형의 공포에 맞설 자그마한 희망을 찾는다.


-수록곡-

1. For residue [추천]

2. Bumpy

3. Lifeworld [추천]

4. Measuring ruins

5. Modern lust 

6. Fear of symmetry

7. Vestigel [추천]

8. Cherry blue [추천]

9. Bell scanner

10. D.I.S. [추천]

11. Tranquilizer

12. Storm show [추천]

13. Petro

14. Rodl glide [추천]

15. Waterfalls [추천]

박승민(pvth05m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