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itor (Deluxe)
시에나 스파이로(SIENNA SPIRO)
SNS를 매개로 찰나의 관심을 붙잡는 오늘날의 음악계에서 ‘Die on this hill’이 파고든 지점은 분명하다. 건조한 피아노 선율 위로 흐르는 허스키하면서도 격정적인 보컬부터 복고적 콘셉트가 자아내는 특유의 분위기까지. 이 모든 요소는 20살의 신예를 영국 소울 계보를 잇는 기대주로 떠오르게 했다. 같은 계열의 올리비아 딘과 레이가 산뜻한 리듬을 취하거나 압도적인 스케일을 앞세운 반면 전통적인 발라드를 택한 그는 한동안 팝 음악에서 자취를 감췄던 애절함을 되살린 것이다. 아직은 증명할 게 많은 가수가 일찌감치 아델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캐피톨 레코드에서 발매한 1집 < Visitor >는 이 신인의 음악관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있는지를 가늠할 첫 시험대다. 우선 야심 찬 프로덕션이 눈에 띈다. 흑인 예술 운동의 선구자 니키 지오바니의 낭독을 차용한 ‘This is my house’와 묵직한 질감을 살린 ‘Great expectation’에서 피어나는 소울의 향취만 보더라도 그의 급부상이 우연은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진중한 탐색과 정교한 설계가 작품의 기틀을 단단히 다진 덕에 선공개 곡 ‘Die on this hill’의 울림도 여전히 강렬하다. 그렇게 공들여 지은 이 고풍스러운 저택은 문을 연 순간부터 낯선 방문객을 사로잡는다.
다만 확고한 취향은 이내 본인의 가능성을 제약했다. 인테리어가 독특하더라도 비슷한 풍경이 반복되기에 감상의 밀도가 떨어진다. 현악기의 비중을 높인 ‘The visitor’나 끈적한 리듬의 ‘Time, you & me’ 등 편곡만 바뀌었을 뿐 보컬의 톤은 변함이 없고 절정을 빚어내는 방식마저 유사하니 상당한 피로감이 몰려 온다. 싱글과 EP 단위의 활동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어도 긴 러닝타임의 음반에서는 음악의 긴장감이 쉽게 무뎌지는 탓이다. 목이 갈라지도록 부르짖는 ‘You stole the show’와 뒤틀린 사랑을 갈망하는 ‘He’s not my baby, I’m his’가 결과적으로는 밋밋한 것 역시 스스로 세운 견고한 울타리 안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재즈 스탠더드를 호기롭게 재해석한 ‘Autumn leaves’나 경쾌한 소울 넘버이자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의 사운드트랙 ‘Material lover’와 같은 디럭스 버전에 추가된 인상적인 곡들은 그가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이 너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표현의 폭을 넓힐 여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정체성을 고수한 나머지 안정적인 흐름 속에서 끝내 풍부한 잠재력을 드러내지 않은 음반인 것이다. 어쩌면 이 어린 뮤지션의 미래를 좌우하는 건 치밀한 계산보다는 나이대에 걸맞은 과감함일지도 모른다. 감정선의 순도만으로 승부를 본 ‘Die on this hill’의 성공처럼 때로는 망설임 없는 한 걸음이 예상치 못한 반향을 불러오는 법이니까.
-수록곡-
1. This is my house
2. We’re not in love
3. Great expectation [추천]
4. Die on this hill [추천]
5. He’s not my baby, I’m his
6. Pure
7. The visitor
8. Time, you & me
9. You stole the show
10. Mono no aware
11. Maybe.
12. Material lover [추천]
13. Autumn leaves [추천]
14. You stole the show (Revisited)
15. Die on this hill (Unplugg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