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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금통
이센스(E SENS)
2023

by 장준환

2023.08.01

달라진 포부가 제목에서 나타난다. 최고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 '밑 빠진 독'처럼 쏟아붓던 과거에서 벗어나, 이제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과정 하나하나를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결심. 밑이 막혀있기에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 저금통 >의 서사는 여기서 시작한다.

< The Anecdote >의 아성에 필적할 고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은 더 이상 원동력이 아니다. 오래 속해있던 회사를 떠나 홀로서기를 감행한 첫 작품이자, 프로듀서 허키 시바세키(Hukky Shibaseki)와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가볍게 착수한 프로젝트라는 배경부터 태생이 다르다. 그만큼 이센스 본인이 주체가 되어 방향추를 조율한 직관적인 스낵 트랙이 즐비하다.

여러 매체와 평단에서 < 저금통 >을 두고 '원초적인 랩 앨범'이라 일컫는 이유가 그렇다. 먼저 정직한 올드스쿨 풍의 붐뱁 비트 위로 플레이어가 마음껏 뛰어노는 구조가 철저히 유지된다. '맛'보다 '멋'을 위한, 여느 난해한 음악적 장치나 기교 어린 퍼포먼스는 전무하다.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은 래퍼와 프로듀서 중 어느 하나가 주도권을 점유하려 들지 않기에, 둘의 상호 교류가 자아내는 순수한 청각 쾌감에 집중할 수 있다.

도끼와의 협업으로 과거 'Rhyme king'의 기억을 호출하는 첫 트랙 'No boss'만으로 작품의 핵심 무기인 랩에 대한 설명이 끝난다. 대표곡 중 하나인 '꽐라'로 대변되는 특유의 취권 스타일의 플로우가 유영하듯 가사를 넘나들고, 짧은 단어와 고도의 라임을 공격적으로 빠르게 연타하는 래핑이 쉴 새 없이 귀를 잡아끈다. 무서울 정도로 확실한 기본기. 왜 '이센스'라는 브랜드가 오늘날에도 유효한지에 대한 대답이다.

나머지 삼박자를 이루는 가사와 비트의 존재감 역시 명확하다. 머리 위 떠다니는 보편적 상념을 잡아챈 듯한 쉽고 소소한 화두에는 어떠한 배경지식도 필요 없다. 현시대 래퍼 가운데 차붐과 더불어 한글의 속어를 적소에 섞어내는 작사 방식 또한 감칠맛을 더하는 요소다. 이에 둔중한 베이스와 킥 스네어를 재료 삼지만 공백을 극대화해 건들거리는 분위기를 자아낸 '저금통'과 'What the hell', 1980년대 힙합 소스를 적극 운용해 과거의 질감을 복각한 'Piggy bank'와 '줘' 등 작품이 가진 '반항성'과 '원초성'을 강조한 사운드메이킹이 몰입을 더욱 배가한다.

혜성처럼 등장해 국내 힙합 신에 큰 충격을 안긴 믹스테이프 < New Blood Rapper Vol. 1>의 고차원적 발전작처럼 다가온다. 정통을 추구한 덕에 누구나 흥겹게 즐길 수 있지만, 동시에 높은 완성도와 독자성으로 그 누구도 쫓아가기 힘든 새로운 정통을 제시했기 때문. '오리지널리티'를 골몰히 고민해 본 자만이 재생산할 수 있는 질서가 여기에 있다. 앨범아트 속 난간에 걸터앉은 그의 뒷모습에서 오로지 자신의 실력을 증거 삼아 2000년대 흐름을 재배열한 제이 지(Jay-Z)의 < The Blueprint >의 단상이 떠오르는 이유다.

낯선 환경에서 부분적 구상으로 작업에 임할지언정 실력과 신념이 단단하다면 걸출한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돋보인 작품이다. 하지만 이 앨범의 가치는 단순 우수한 테크닉이나 귀감이 될 베테랑 마인드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 저금통 >이라는 시의적절한 퍼즐 조각의 합류 소식은 그의 커리어와 캐릭터에 거대한 입체성을 부여하며 수많은 가능성의 갈래를 낳는 분기점이 되었다. 이센스의 다음 행보가 다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흰 의복의 사색가가 어느덧 한 손에 소주병을, 다른 한 손에는 타들어 가는 담배를 든 채 홍조 띤 고주망태로 돌아왔지 않은가. 그것도 더욱 근사한 모습으로.

-수록곡-
1. No boss (Feat. Dok2) [추천]
2. 저금통
3. A yo (Feat. Beenzino)
4. What the hell [추천]
5. Piggy bank [추천]
6. Gas (Feat. Jibin)
7. 줘 [추천]
8. How to love
9. 열심히 해 (Feat. Hukky Shibaseki) [추천]
10. Vanilla sky
11. 기분 (Feat. DeVita)
12. I'm back (Feat. 언에듀케이티드 키드)
13. Real Ones (Feat. 장석훈)
장준환(trackcam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