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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Oppenheimer)
루드비히 요란손(Ludwig Göransson)
2023

by 김진성

2023.08.01

영화는 독일 나치당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해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하겠다는 일념으로 일급 기밀 군사 프로그램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이론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의 생애를 다룬다. 1942년 미국에 영입된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 과학자들은 수년에 걸친 연구와 실험 끝에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고, 1945년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상공에서 두 개의 폭탄을 투하해 일본의 항복을 앞당김으로써 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교전으로 인한 더 이상의 인명 살상을 방지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오펜하이머는 그러나 초기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발명을 둘러싼 윤리적 문제에 시달렸고, 이후 몇 년 동안 개인적, 정치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이 후자의 문제는 오펜하이머가 생애 초기에 친공산주의적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 공산당의 다수 의원과 우호적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악화하였다. 이는 하원 반미활동 조사 위원회(HUAC)와 매카시즘 광풍이 휘몰아친 1950년대 미국 정치판에서 오펜하이머의 지위를 박탈할 수 있는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그의 측근들까지 궁지에 모는 상황을 초래했다.

역사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밀도 있게 전개되는 개인의 전기를 성공적으로 완성한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은 네 개의 시기를 교차 편집하여 이야기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학업과 결혼, 그리고 과학자로 명성을 쌓기까지 초기의 삶, 히틀러 나치에 앞서 핵폭탄 제조에 나선 맨해튼 프로젝트의 수장으로서 1942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 공산주의 동조자로 심문받고 정부 보안 허가가 취소된 1954년, 그리고 정치적 야망을 위해 오펜하이머를 궁지로 내몬 음모가 밝혀져 몰락한 루이스 스트라우스가 상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1959년의 상원 인준 청문회까지, 놀란 감독은 예의 본인의 장기인 시간 순서 배열은 물론, 흑백과 천연색의 교차, 과학적 이론과 실험의 시각화까지 이전 작품목록에서 보여준 연출력의 총화로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중대한 네 시기를 매끄럽게 넘나들며 감독은 서로 다르지만 상통하는 시나리오의 상호 연관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면서, 종극에는 이 영화가 결국 한 천재적 과학자의 초상을 흥미진진하게 담아냈다는 걸 증명한다. 그 안에는 역시 양자 이론, 핵물리학, 이념, 정치적 독단주의와 같이 다양한 논쟁거리가 공존하며, 관객 각자의 다양한 시각과 생각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과 논의가 이뤄질 수 있게 중립적 태도를 보인다.

영화는 지구 파멸의 유산을 남긴 충격으로 괴로워하는 한 인간, 오펜하이머 역을 맡은 실리언 머피가 주인공으로 중심에 서지만, 내로라하는 명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든든하게 뒤를 받쳐준다. 에밀리 블런트가 오랜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헌신적인 아내 키티 역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교활하지만 강인한 매력을 가진 정치인 스트라우스 역을 연기했고, 맨해튼 프로젝트를 끈질기게 성사해낸 솔직한 군인 레슬리 그로브스역의 맷 데이먼, 오펜하이머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내연녀 진 태틀록 역의 플로렌스 퓨, 그리고 노벨 수상 미국 핵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렌스 역에 조시 하트넷, 미 육군 정보장교 보리스 패쉬 역에 케이시 애플렉, 미국 핵물리학자 데이비드 로렌스 힐 역에 라미 말렉,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 역에 케네스 브래너, 미 육군 장교 데이비드 니콜스 역에 데인 드한, 미국 기술자이자 아날로그 컴퓨터의 선구자 버니바 부시 역에 매튜 모딘, 미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역에 게리 올드먼 등, 명배우들이 오펜하이머가 일생 만나는 수많은 정치인, 과학자, 군인, 사상가들로 등장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부터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엔리코 페르미, 리처드 파인먼, 닐스 보어와 같은 전설적 과학자들을 모두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특전.

오펜하이머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내면을 관통하는 음악은 스웨덴 작곡가 루드비히 요란손(Ludwig Goransson)이 맡았다. 2020년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 테넷 >(Tenet) 이후 놀란 감독과의 협업을 재개한 그는 우선 연출가의 취향과 의중을 간파한 것으로 보인다. 데이비드 줄리언(David Julyan)과 한스 짐머(Hans Zimmer)가 놀란의 영화 세계에 새겨넣은 음악의 일반적 질료뿐 아니라, 장점을 흡수했고, 진일보한 단계로 업그레이드해냈다. 관현악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는 압도적인 불협화음과 대기를 공진하고 공감각적인 분위기를 창출하는 전자음의 결합, 그 결과물은 인간의 내면, 즉 감정과 감각, 심리의 변화에 밀접하게 조응하는 한편, 차원을 초월한 공간과 상상의 저편을 음표로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

요란손은 모 음악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크리스가 가진 초기 아이디어 중 하나는 바이올린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생각과 일상이 복잡한 천재였습니다. 솔로 바이올린을 사용하면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비브라토를 연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활을 세게 누르고 속도를 바꾸면 순식간에 끔찍한 조증적이거나 신경증적인 소리를 낼 수 있죠. 크리스와 저는 서로 다른 감정을 오가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덧붙여 닐스 보어가 대학에서 젊은 오펜하이머에게 대수와 음악을 비교하며 강의하는 장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템포가 4마디마다 바뀌고 점점 빨라져서 마지막에는 처음 시작할 때보다 세 배나 빨라집니다. 처음에는 연주할 수 없는 곡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시퀀스 하나에 사흘을 보냈죠. 어떻게 나왔는지 믿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여러 가지 연속 장면에 대해 괴란손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영화 장면 전개에 따른 음악의 반주는 "바이올린의 친밀하고 잊히지 않는 멜로디로 시작됩니다. 수업 시간에 한 명이 등장하고 그 뒤에 네 명이 합류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래서 바이올린 4대를 추가했고, 반 전체가 등장할 때는 하프와 피아노를 더한 오케스트라 전체가 등장합니다."

뉴멕시코 사막에서 트리니티 시험용 폭탄이 터지기 직전까지 이어지는 영화의 중간 부분에서 요란손은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면서 쿵쾅거리는 베이스와 시계처럼 똑딱거리는 금속성으로 긴장감을 높이고 싶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영화는 침묵으로 전환하죠.”라고 말을 이었다. "버튼을 누르고 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 침묵을 향해 쌓여가죠."

이러한 고전적인 음악은 오펜하이머라는 한 인간의 인생 여정에 관객들이 친근하게 접속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탁월한 선택, 주제적 악상, 친근한 현악이 내는 온화한 하모니는 감정적으로 오펜하이머와 공감대를 형성해주는 한편, 후회와 도덕적 가책에 휩싸인 그의 인생 후반부를 더욱 강렬하게 느끼도록 한다.

오펜하이머의 스코어는 막스 리히터(Max Richter), 리게티(Gyorgy Ligeti), 필립 글라스(Philip Glass), 존 애덤스(John Adams), 요한 요한손(Johann Johannsson)과 같은 음악가들의 미니멀리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와 존 케이지(John Cage),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 그리고 조니 그린우드(Jonny Greenwood)를 포함한 일련의 현대 음악 작곡가들이 자주 사용한 추상적이고 거친 현악기 작곡, 1980년대 방겔리스(Vangelis)와 탠저린 드림(Tangerine Dream) 같은 음악예술가들의 신시사이저 주도 스코어에서 유행한 음악 질료들을 혼융해 놓은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거기에 < 인터스텔라 >(Interstellar)와 < 덩케르크 >(Dunkirk)를 위한 한스 짐머의 작곡과 < 테넷 >에 쓴 요란손의 장쾌한 화음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개인적인 미학에 더해져 이 스코어가 탄생한 셈.

'Fission', 'Can you hear the music', 'Gravity swallows light', 'American Prometheus'와 같은 지시 악곡들에서 현악기는 서사의 매우 과학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으며, 전반적으로 전위예술적이다. 예리하고 자극적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음악은 극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과학 개념 자체처럼 감정적으로 연결하기 어렵다. 요란손은 여러 장면에서 현악의 다양한 주법을 이용해 핵폭탄의 구조를 묘사하려는 듯 매우 도전적이고 강렬한 시도를 했다.

부드럽고 섬세한 질감의 하프와 피아노가 간간이 어우러진 현악의 온화한 음색은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와 내연녀 진, 그리고 동료들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언급한 'Fission', 'A Lowly Shoe salesman', 'Quantum mechanics', 'Groves', 'American Prometheus', 'Power Stays in the shadows'와 같은 지시 악곡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현저히 드러난다.

'Manhattan project', 'American Prometheus', 'Fusion', 'Theorists'와 같은 곡에는 로스앨러모스의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시간과 경쟁하며 과학적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 분주한 순간을 공격적이고 규칙적으로 순환하는 구조로 표현해냈다. 맥동하는 전자음과 동일 성부를 반복해 연주하는 현악이 활기찬 타악기를 주도하며, 특히 'Fusion'의 중후반부 불길하고 위협적인 브라스와 둔중한 저음 베이스 음향이 효과적으로 장면을 포착한다.

운명적인 폭탄 실험 자체를 강조하는 'Ground zero'와 'Trinity'는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전자는 어두운 전자 배음과 공격적으로 맥동하는 전자리듬, 가이거 계수기의 표본 추출 음향이 결합하여 있으며, 후자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악이 여러 층위로 긴장감 넘치고 기교 넘치는 스케르초(Scherzo)를 연주하고, 폭탄이 터지는 순간까지 거의 8분 동안 천천히 증축된다. 이러한 대목은 때로 오페라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이는 음향 혼합에서 전면에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The Trial', 'Dr. Hill'은 현악과 타악기를 중심으로 방겔리스(Vangelis) 스타일의 부드러운 일렉트로니카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장면의 정치적 내용을 묘사하고자 했다. 건반 화음과 현악으로 도입해 반복하는 전자음, 관현악 협주와 결합해 웅대해지는 'Kitty comes to Testify'는 'Meeting Kitty'와 함께 재즈적인 주제 악상을 공유함과 동시에 키티와 오펜하이머의 관계에 걸친 인간적 내면을 강조하고,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악보의 주제선율을 재현하는 'Destroyer of Worlds'와 'Oppenheimer'는 현란한 현악기 연주로 고양하지만, 후회와 친밀감을 주는 악상으로 마무리한다.

클래식 바이올린, 감상적인 신시사이저, 그리고 불협화음을 내는 오케스트라의 생생함을 특징적인 주요소로 < 오펜하이머 >의 스코어는 타이틀 캐릭터 내면의 여러 측면을 영리하게 다뤄냈다. 지적이면서 미묘하고 주제가 명확하면서 추상적이고, 신경질적이면서도 감성적인 면이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핵무기를 창출하고 죽음의 신이 된 한 천재 과학자의 인생역정을 독특한 영화적 시각과 각본으로 표출해낸 놀란 감독에게 요란손은 외관보다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등장인물 간의 내관에 더 집중한 음악으로 영혼을 불어넣었다. 위대하거나 고통스럽거나, 인물의 독백과 대사에 덧붙여 끈질기게 과학적 아리아를 투영하는 음악적 공감과 체험의 선택은 자유다.

-오리지널 스코어 목록-
01. Fission(핵분열) (4:38)
02. Can You Hear the Music(음악이 들리나) (1:50)
03. A Lowly Shoe Salesman(비천한 신발 판매원) (3:34)
04. Quantum Mechanics(양자 역학) (3:00)
05. Gravity Swallows Light(중력, 빛을 삼키다) (3:30)
06. Meeting Kitty(키티를 만나다) (5:47)
07. Groves(그로브) (3:03)
08. Manhattan Project(맨해튼 프로젝트) (3:01)
09. American Prometheus(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2:37)
10. Atmospheric Ignition(대기 점화) (3:28)
11. Los Alamos(로스앨러모스) (2:38)
12. Fusion(융합) (3:55)
13. Colonel Pash(파시 대령) (4:57)
14. Theorists(이론가들) (3:14)
15. Ground Zero(피폭 중심지) (4:21)
16. Trinity(삼위일체) (7:52)
17. What We Have Done(우리가 지금 뭐한 거야) (5:45)
18. Power Stays in the Shadows(그림자 속의 권력) (4:10)
19. The Trial(재판/시련) (5:32)
20. Dr. Hill(힐 박사) (4:23)
21. Kitty Comes to Testify(키티가 증언하러 나오다) (4:52)
22. Something More Important(더 중요한 것) (3:25)
23. Destroyer of Worlds(세계의 파괴자) (2:54)
24. Oppenheimer(오펜하이머) (2:16)
김진성(saintopia0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