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K팝 동향조사] 포스트 K팝의 시대를 알리는 블랙핑크의 솔로 출격
블랙핑크(BLACKPINK)
바야흐로 K팝 전성시대다. 올해는 유난히도 자극적인 이슈와 기록적인 성과가 수면 위로 앞다투어 떠올랐다. 연일 차트와 기록을 갈아치우며 문화콘텐츠 수출 공신이자 한국 알리미로서 K팝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지만 숫자가 전부일까? 분명 그 아래에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음악적 담론도 존재하고 K팝의 다양한 발전 가능성도 잠재되어 있다. 이즘에서는 이러한 취지에서 2024년 K팝을 둘러싼 여러 사건의 배경을 분석하고, 조명받았던 음악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탐구하는 기획특집 [2024 K팝 동향조사]를 준비했다. 첫 번째는 '포스트 K팝의 시대를 알리는 블랙핑크의 솔로 출격'이다.
아이돌 이후의 아이돌은 어떻게 되는가. 표준계약서 상 최대로 제한하는 일명 '마의 7년'이라 불리는 시간이 끝나갈 때면 선택의 기로 위에서 음악을 지속하느냐부터 연예계와의 연을 끝낼 것인지까지 많은 고민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최근 멤버들이 연달아 단독 커리어를 본격 개시한 블랙핑크는 시한부 아닌 시한부를 살아가는 K팝의 구조 안에서 그 다음 벌어질 일들로 역사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BTS 같은 사례도 이미 있거니와 블랙핑크의 디스코그래피 내에서도 솔로 활동이 비단 지금의 화두는 아니다. 제니가 2018년 11월 먼저 나선 이후 2021년에는 로제와 리사가 단독 싱글을 발매했고, 배우 쪽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던 지수 또한 2023년 ‘꽃’을 공개한 바 있다. 같은 해에는 제니가 미발매 트랙 ‘You & me’를 정식 발표하기도 했다. 4명으로 비교적 적은 수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걸그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멤버 전원이 솔로 작업물을 내놓는 행보를 이어갔고, 심지어 네 명 모두 싱글 차트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성과까지 보였다.
불과 1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의 양상은 많이 다르다. 중요한 분기점은 2023년 12월에 있었던 재계약이다. 1년 가까이 온갖 루머 끝에 결과적으로는 네 멤버가 그룹은 YG 엔터테인먼트가 담당하되 개인 활동은 각자의 소속사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데뷔 직후 ‘휘파람’과 ‘불장난’의 3개월 텀을 제외하면 1년에 한 번꼴로만 음반을 발매해 왔으며, 심지어 첫 정규작 < The Album > 이후 < Born Pink >가 발매되기까지 무려 2년의 시간이 걸린 역사를 보면 사실상 개인 활동이 주력이 된 셈이다.
눈여겨볼 점은 관계의 변화가 산업적인 요소에 그치지 않고 음악에도 반영된다는 점이다. 로제의 ‘On the ground’는 본인과 해외 작곡가들이 크레딧에 이름을 함께 올리긴 했으나 전적으로 재계약 전 음악은 YG 작풍의 핵심이었던 테디를 주축으로 하여 회사 소속 프로듀서들이 담당했다. 듣기에도 그러했다. 제니의 ‘Solo’는 누가 들어도 ‘YG 풍’이라 할 만한 스타일이었고 지수의 ‘꽃’은 이 매너리즘이 가장 극대화된 곡이었다.
스스로에게 록스타 칭호를 하사한 리사의 ‘Rockstar’는 그런 의미에서 본격적으로 개인의 비전을 펼치겠다는 포부와도 같다. 더욱이 많은 비한국인 아이돌과 마찬가지로 K팝 시스템 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의 정체성은 ‘Lalisa’의 뮤직비디오에서도 전통문화 양식의 차용으로 이미 표현된 바 있지만, ‘Rockstar’는 더 큰 차원의 담론을 끌어낸다. “Lisa can you teach me Japanese/I said hai hai (리사 나한테 일본어 좀 가르쳐줘/내가 말하지 그래그래)”라는 가사는 그가 닿고자 하는 서구 주류 음악시장에서 아시아인들이 은연중에 겪어야 하는 인종차별적 발언과 ‘아시아인들은 다 똑같다’ 하는 식의 혐오적 시선을 매섭게 겨냥하고 있다. 그가 ‘New woman’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가수 로살리아의 손을 잡은 것 또한 서구 문화권 내에서 타자로 치부되는 이들 간의 연대를 이루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한편 제니의 ‘Mantra’는 비교적 정형화된 팝스타의 양식을 따르는 곡에 가깝다. 여성들에게 자아 존중감을 설파하는 그의 모습은 그러나 단순한 서구화 이상으로 해석될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위켄드가 주연과 제작을 맡은 드라마 < The Idol >에서 그가 선보였던 안무 신은 선정적이라는 반응도 대거 받았지만, 동시에 2000~2010년대 댄스 팝스타들의 무대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다루는 영상물에서 그리 이상하지 않게 다룰 수 있는 표현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양계 소녀가 노래를 따라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Mantra’의 뮤직비디오는 한국에서 온 팝스타가 2020년대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을 선도하겠다는 포부를 암시한다.
가장 재밌는 것은 최근 나온 로제의 ‘Apt.’다. 가사에는 별다른 메시지 따위 없고 뮤직비디오도 듀엣 파트너인 브루노 마스와 세트에서 재밌게 노는 것이 끝이나 노래는 그 누구보다 혼종적이다. 기반은 ‘On the ground’와 ‘Gone’에서 일찌감치 드러냈던 팝 록 사운드로 놓았고, 브루노 마스의 보컬은 < Doo-Wops & Hooligans > 앨범의 프로듀서가 참여했듯이 데뷔 초의 스타일과 닮았다. 서로 가진 것을 하나씩 쌓은 구성은 듀엣 싱글에 으레 기대하는 바를 벗어나지 않지만, 후렴구에 투척하는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가 즐거운 지진을 일으킨다.
도입부의 나레이션이 알리듯 한국의 술자리 게임에서 착안한 훅은 각 문화권의 이종교배가 일어나는 장이다. 영어 가사로만 쓰여진 다른 구간 사이에 정직한 한국식 발음으로 ‘아파트’를 반복하는 노래는 K팝의 ‘K’스러움과 ‘팝’의 작법이 충돌하는 대표 예시가 될 만한 곡이다. 더군다나 치어리더 구호 느낌은 과거 한국에서도 높은 인지도를 지녔던 토니 베이즐(Tony Basil)의 ‘Mickey’를 샘플링한 결과물이니 ‘K’의 농도는 더 높아진다.
물론 지금 블랙핑크의 행보는 찬사 이외에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올해 MTV의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리사가 ‘베스트 K팝 상’을 탄 것에 대해 적지 않은 이들이 한국 국적도 아닌 뮤지션이 영어로 부른 노래를 ‘K팝’ 후보에 올리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차별 아니냐는 말을 꺼냈지만, 동시에 매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K팝이 홀대받을 때마다 K팝 부문의 별도 신설이 이뤄져야 한다는 이중 잣대도 찾아볼 수 있다. 의도가 무엇이든 제니의 가사가 전부 영어로만 쓰여진 것에서는 서구화의 영향이 분명히 존재하고, 서쿳(Cirkut)을 비롯해 팝 신의 쟁쟁한 프로듀서들이 붙은 ‘Apt.’는 유사한 소재를 공유하나 ‘얼터너티브 K팝’을 표방하며 아시아 중심의 새로운 음악적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바밍타이거의 ‘Kamehameha’나 ‘Moving forward’와 결코 같을 수 없다.
또 하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블랙핑크 각 구성원들이 보여주고 있는 지금의 실적은 K팝의 미래와 동의어가 아니다. 이미 충분한 세계 진출과 유튜브, 그리고 솔로 싱글로 인지도와 지지기반을 두껍게 쌓아놓은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전에도 많은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홀로 나서기를 시도했으나 소수의 성공 사례가 아니고서야 대부분 주류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는 현실에서 블랙핑크의 노선을 섣불리 ‘개인의 비전 표현이 이뤄낸 성공’ 등으로 일컬으며 K팝의 귀감으로 정의하기란 어렵다.
특별한 혁신보다는 또 하나의 자그마한 발걸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사실 그것이 애당초 아이돌 솔로의 본질 아니겠는가. 하나의 그룹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일괄적인 프로듀싱에서 벗어나 타의든 자의든 본인만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 블랙핑크의 개별 활동 개시가 K팝 내 다양성 촉진 현상과 더 나아가 작가주의적 설계 도입의 효시가 될지 아니면 그저 또 하나의 막연한 영웅담이 될지는 시간만이 답을 해주겠지만, ‘K’와 ‘팝’의 마찰 안에서 조금씩이나마 영감의 뿌리가 자라나고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