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철 인터뷰

신철

by 신동규

2026.06.30

음악깨나 좋아한다는 사람들에게 디제이는 일찍이 익숙한 존재였지만, 1980년대 당시 가요 시장에는 랩, 리믹스, 샘플링이라는 단어 모두 흐르지 않았다. 대중의 무지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역할을 자처하던 이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태원과 신촌, 강남 등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젊은이들의 성지에서 판을 돌리고, 음악을 섞었다. 신철도 그중 하나였다. 디스코 클럽 신의 대표 디제이로 출발해 1988년 서울올림픽 공식 디제이까지 선정, 곧 나미의 ‘인디안 인형처럼’을 리믹스해 이정효와 결성한 붐붐의 일원으로 날개를 달았다. 가수가 아닌 디제이 팀이 그만큼의 인기를 얻은 최초의 사례였다.


철이와 미애는 호흡을 이었다. 첫 음반의 ‘너는 왜’는 정상 가도를 달렸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뒤집어놓은 가요계의 판도 위로 두 남녀는 플로어를 헤집었다. 짧지만 강하게 타올랐던 시기를 지나 신철은 제작자로 복귀, 디제이 디오씨와 구피, 영턱스클럽, 유승준 등을 지휘하며 1990년대 우리 가요계의 댄스 흐름을 견인했다. 새로운 세기를 전후해서는 장르 크로스오버에 주력을 쏟았고, 당대 최고 가수들을 모아 컴필레이션 앨범을 제작하는 등 폭 넓게 활약했다. 최근에는 김연자의 히트곡 ‘아모르 파티’의 작사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즘은 신철에게 물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가까이 활동하며 얻은 최고의 배움은 무엇인가. 그는 답했다. “대중이 좋아하는 것과 나의 역할이다. 빠르게 변하는 오늘날에도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고, 결과물을 대할 땐 외려 나를 덜어낸다. 디제이는 가수와 대중 사이를 잇는 다리다”. 성인 취향의 트로트부터 젊은 층을 겨냥한 전자음악까지 여전히 각계에서 부름을 받는 이유가 비친 순간. 우리 대중음악 계보 속 디제이 목차의 가장 굵은 한 이름과의 만남을 전한다.



여전히 작업을 쉬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어떤 작업이 있었나.
얼마 전 발매된 조항조의 ‘맨발의 탱고’와 곧 공개될 송가인의 신곡 ‘꽃이 아니면 어떤가’가 있다. (곡 설명을 부탁한다) 조항조가 팬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그 문장이 너무나 애처로워 음악으로 만들고 싶다며 조항조가 나를 직접 찾아왔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딸의 이름도 기억을 못 하고, 자꾸만 맨발로 돌아다니는데 자식 된 처지에서 가슴이 미어진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곡이 ‘맨발의 탱고’다. 송가인은 한국 대중음악 전설 간의 협업을 진행하고 싶다며 의뢰를 줬다. DJ처리의 댄스에 자신을 접목해 보고 싶다니 나로선 고맙고 영광이었다. 

송가인의 ‘꽃이 아니면 어떤가’의 부제가 ‘질경이’인 점이 독특하다. 시골 산길에 흔히 보이는 풀 아닌가.
얼마 전, 나의 유년기를 길러주셨던 외할머니의 산소에 처음으로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뿌듯한 마음으로 성묘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발끝에 뭔가가 툭 걸리더라. 어릴 적 분명 많이 봤던 풀인데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찾아보니 그게 질경이었다. 질기다 질기다 해서 질경이 아닌가. 돌아가는 길에 작가인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 딴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잡초인데, 이 친구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싶었다. 며칠 간의 구체화 끝에 내가 곡을, 아내가 노랫말을 쓰자고 결론을 내렸다.

송가인은 국악 전공자 아닌가. 서로의 색을 조합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고민이 많았다. 국악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댄스곡이어야 하니 장르 선정부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아프로 하우스와 우리 민요를 섞는 방향으로 진행했는데, 결과물이 비교적 내성적인 것 같았다. 신나도 눈치 보며 신나는 느낌이랄까. 결국 삼바 풍의 페스티벌 하우스로 장르를 바꿔 새로 출발했고, 다행히 만족할 만한 완성도가 나왔다.

김연자의 메가 히트곡 ‘아모르 파티’의 작사가로도 알려져 있다. 신철 하면 트로트와의 접점도 빼둘 수 없다.
대략 20년 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트로트를 향한 인식이 바뀌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노래를 선곡하고 싶었고, 관계자들은 트로트를 조금이라도 다루길 원했다. 한동안 서로의 뜻이 오가다 문득 트로트를 내 방식대로 직접 리믹스하여 새롭게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면 어떨까 싶었다. 그렇게 방송에 가수를 초대해 곡 중간에 랩을 섞고 기존의 분위기를 재해석해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변화한 나의 시선이 2013년의 김연자까지 닿은 것이다. 곡은 윤일상 작곡가가 썼는데, 1990년대부터 영턱스클럽의 ‘정’과 같이 트로트 소스를 가미한 호흡에 각자가 익숙했기에 작업은 수월했다. 마침 니체의 철학에 관심이 상당히 많을 때였고, 공동으로 가사를 쓴 이건우 작사가의 라임과 어느 정도의 뼈대 위로 콘셉트를 잡고 가지를 쳐 완성해 나갔다. 물론 이렇게까지 성공할 줄은 몰랐다. 좋아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장르 구분을 떠나 DJ로서 특정한 생각을 다름 아닌 댄스 음악으로 구체화한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댄스 음악이 가진 가벼운 이미지 탓에 어렵게 바라볼 수 있다. 다만 우리는 남들이 골치 아파하는 무언가를 쉽게 바라볼 수 있는 너른 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치매 어머니를 둔 딸의 편지도 분량 자체는 세 장 정도였다. 이를 한 장, 반 장으로 만들어 최적의 장르와 BPM을 찾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여러 가수와 제작자가 신철을 찾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열아홉부터 지금까지 디제이 활동을 해 왔으니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는 자신감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위치라는 게 원작자와 일반인 사이에서 그 감각을 먼저 찾아내는 매개 아닌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리 칠십 퍼센트, 그래도 나를 버릴 순 없기에 취향을 담은 삼십 퍼센트의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다행히 지금까지 그 모습이 흐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미의 ‘인디안 인형처럼’ 리믹스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기획 단계에서 나미의 반응은 어땠나.
만족할 만한 성적을 못 거둔다면 시도가 빛났던 것이고, 뜻밖의 성공을 안게 된다면 결국 자기 곡 아닌가. 마다할 이유는 크게 없었다고 본다. 다만 나미는 미8군 무대에서 경험을 쌓고 출발한 만큼 확실히 열려있는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나미의 친동생과 먼저 친분이 있었는데, 어느 날 원곡이 담긴 언니의 신보를 선물해 줬다.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듣다가 ‘인디안 인형처럼’이 흐르자 이 곡을 리믹스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고 동생에게 전달을 부탁했다. 며칠 뒤 나미에게 직접 연락이 와 얼마 후 < 쟈니윤 쇼 >에 나가야 하는데 신선함이 필요하다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스튜디오로 찾아가 릴 테이프 하나하나를 오리고 붙여가며 만들었다. 완성하고는 얼마나 뿌듯하던지 나미를 보자마자 "누나는 이제 춤만 추면 된다"고 말했다. 호쾌하게 좋다고 대답하던 나미는 정말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붐붐을 끝내고 철이와 미애를 새로 결성했다. 어떤 생각이었나.
사실 < 쟈니윤 쇼 >에서의 무대 한 번이 끝일 줄 알았다. 그런데 방송 후 몇 개월 치 일정이 잡히더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기존의 디제이 일도 하면서 밤낮없이 나미와 스케줄을 다녔다. 얼떨결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제는 뚜렷한 정체성 없이 백댄서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랩도 만들고, 노래도 다듬고, 그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직업이지 않았나. 이러다 나를 잃겠다 싶어 멈추게 되었다.

미애와의 만남은 어떻게 이뤄졌나.
앞선 이유로 나의 이름을 앞에 두고 새로 시작했다. 붐붐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바가지 머리부터 빡빡 밀었다. 당시 1990년대 초는 테크노나 하우스, 랩과 같은 외국의 새로운 소리가 우리에게 밀려 들어올 때였는데, 나는 그것이 왠지 흑백 싸움처럼 느껴졌다.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대립만이 존재할 뿐 동양인이 설 자리는 없는 듯한 느낌. 빈틈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그래도 오래 해온 디제잉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MC와 DJ의 개념을 동시 탑재한 그룹을 그렸다.

내가 그러한 역할을 맡는다면 한 명쯤은 춤을 추고 노래를 해야 한다. 확실한 인상을 위해 혼성 그룹을 의도하고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던 중 우연히 민해경의 ‘보고싶은 얼굴’ 무대를 보는데 뒤에서 춤을 추던 MBC 무용단의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이 미애였다. 춤꾼들에게 물어보니 단번에 알더라. 연락처를 알아내 몇 개월 간의 설득과 구애 끝에 승낙받았다.

자신의 음악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댄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진부하면 안 된다. 특히 신나고 새로워야 한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노랫말을 잃는 경우를 경계한다. (그런 마음으로 바라본 나의 곡 중 가장 자랑스러운 노래는) 디제이 디오씨의 ‘여름 이야기’와 ‘겨울 이야기’를 빼둘 순 없다. 그들의 ‘Remember’도 떠오르고, 대중적 완성도로는 쿨의 ‘해변의 여인’도 압권이다.

신철이 생각하는 대중음악이란.
긴말 필요 없이 심장을 두드려야 한다. 고등학교 3학년 시기 영등포에서 처음 디제이를 시작할 적의 떨림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대중음악은 이러한 박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신철만큼 물리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심장을 두드린 음악인도 많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은 이즘 공식 질문이다. 당신의 삶을 두드린 인생 음악이 궁금하다.
시작은 아리랑 싱어즈의 ‘I Love you, you love me’였다. 1980년쯤 고모 댁에서 처음 듣고는 한국 사람이 영어로 노래한다는 것과 우리 음악을 이토록 다채롭게 알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론 그 후로는 해외에서 받은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갭 밴드의 ‘Burn rubber’나 ‘Early in the morning’도 생각나고, 종로의 새터데이라는 클럽에서 활동할 적의 메인 레퍼토리였던 릭 제임스의 ‘Super freak’과 ‘Give it to me baby’도 내게 블랙뮤직을 알려준 고마운 곡이다. (리믹스 측면에서의 우상도 알려달라) 하나만 고르자면 팻보이 슬림. 그의 ‘The rockafeller skank’를 정말 좋아했다.



진행: 임진모, 신동규, 박시훈
정리: 신동규
사진: 박시훈
신동규(momdk7782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