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F, 아니 WWE 팬이라면 로열 럼블(Royal Rumble)을 아실테다. 추첨으로 1번부터 40번까지 순서를 정해서 90초마다 한 선수씩 링 위로 올려 보내 최후까지 남는 선수가 그 해의 우승자가 되는 것이다. 드라마틱한 연출을 위해서 재수 없게 1번으로 선정된 파이터가 나머지 도전자들을 도장격파하듯이 모두 물리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은 막바지에 링 위에 오른 실력자들이 사실상 손 안대고 코 풀듯이 왕좌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2010년 한 해를 결산하는 시점에 카니예 웨스트에 대한 극찬을 지켜보면서 로얄 럼블을 떠올렸다. 11월 말에 발표한 <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동안 설왕설래하던 앨범들을 무력화시키며 2010년 베스트 앨범 리스트 최상단부로 부양했기 때문이다. 그다지 힙합 앨범을 리뷰하지 않던 웹진들의 리스트에서 인디 뮤지션들 사이로 붕 떠있던 불순하도록 새빨간 앨범 커버는 힙합 팬들에게 야릇한 쾌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고로 카니예와 제이 지가 합작앨범을 낸다고 했을 때 가슴이 설레지는 않더라도 일단 들어나보자는 심보를 가진 음악팬들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심 역(逆)시너지 효과를 예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팝과 가요를 통틀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더라는 우리 선조들의 혜안을 증명해준 사례가 흔하지 않았던가. 또한 걸작의 그림자에 가려서 본의 아니게 상대적인 실망감에 의한 누명을 뒤집어 쓸 수 있는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두 절대군주는 스스로에게 금색 왕관을 하사했다. 전반적인 앨범의 콘셉트는 우월한 자의식의 향연이다. 단지 염두로 할 점은 단순한 동어반복의 늪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에 걸맞은 카니예의 스펙터클하고 재기 넘치는 프로듀싱이 겹쳐지며 우월성의 측면에서 말 뿐만이 아니었구나, 무릎을 탁 치게 된다는 것이다. 범인(凡人)들의 수준이었다면 이쯤에서 머물겠지만 카니예는 지난 앨범에서부터 퍼포먼스의 영역에서까지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시연하셨다. ‘Power’에서는 단어 그대로 권위적인 메시아 콤플렉스를 집약했고, 9분 8초의 대곡 ‘Runaway’에서는 발레리나를 대거 동원하여 블랙 스완처럼 고고하게 무대를 지휘했다.
이미 대세는 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 누가 부정하랴. 다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권력이양을 누구나 용인할 만한 인계자가 필요하다. 이번 앨범이 새로운 황제를 선포하는 즉위식의 그림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 해의 미스코리아 진에게 누가 왕관을 씌워주는지 생각해보시라. 힙합 아티스트 중에서 가장 많은 넘버원 앨범을 보유하고 포브스에서 발표하는 연예인 갑부 순위에서도 단골손님이며 청출어람 스토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를 발굴한 제이 지가 적격이다. 왕들의 잔치답게 앨범 커버부터 눈이 부시다.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i)가 제작했다. 대관식은 자고로 최대한 성대해야하는 법이지 않나.
예상했던 바이지만 우주급의 나르시시즘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들이 보시기에 지구는 너무 답답하므로 부인 혹은 형수인 비욘세(Beyonce)와 함께 우주선을 타고 ‘Life off’한다. 제이 지는 자신과 비욘세를 존 레논과 오노 요코 급으로 승격시키고, 사치스러운 인생이 몸에 배인 카니예의 랩은 마치 이탈리아의 명품거리인 콘도티 거리를 연상케 한다.
일반적으로 심히 졸작이 아니라면 걸작의 다음 작품은 후광효과의 수혜를 얻을 확률이 크다. 명반 < 2001 >을 내고 12년째 후속 앨범을 미루고 있는 닥터 드레(Dr. Dre)에 비하면 1년 전 <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의 잔영은 선명하다. 즉 이번 앨범은 성공적인 원투펀치로 마무리되며 카니예의 왕성하고도 고결한 행보를 알리는 성격이 강하다. 존재감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기 때문에 올해 그래미에서 아델(Adele)과 자웅을 겨룰 여지도 확보했다. 로열패밀리가 바로 이런 것이다. ‘관심병’에 걸린 독불장군을 거부하는 안티세력은 그들대로 조소를 날리겠지만 말이다.
-수록곡-
1. No church in the wild (feat. Frank Ocean)
2. Lift off (feat. Beyoncé) [추천]
3. Niggas in Paris
4. Otis (feat. Otis Redding)
5. Gotta have it
6. New day
7. That’s my bitch
8. Who's gon stop me
9. Murder to excellence
10. Welcome to the jungle
11. Made in America (feat. Frank Ocean) [추천]
12. Why I love you (feat. Mr Hudson)
13. Illest motherfucker alive (Deluxe Edition) [추천]
14. H.A.M (Deluxe Edition)
15. Primetime (Deluxe Edition)
16. The joy (feat. Curtis Mayfield) (Deluxe Ed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