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에서는 벗어났지만, 다음 차례는 술이었다. 젊은 날의 에릭 클랩튼은 기타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 내에서도 유명한 정키(junkie)이자 부져(boozer)였다. 지지 탑(ZZ Top)이 부른 'Beer drunker and hell raisers'는 이때 클랩튼의 주제가(?)로 쓰였어도 무관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마시고 부수었다.
'기타의 신'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군림하기만 할 줄 알았다. 함께해온 밴드 동료는 물론 애욕(愛慾)의 연가 'Layla'를 바치며 쟁취한(?) 패티 보이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라도 예외가 없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술로 학대했다. 수시로 인사불성이 되었고, 악몽 같은 금단현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에릭 클랩튼은 스스로 헤이즐던 재활원으로 들어가 중독의 고리를 끊는다. 이후에도 치료를 계속 받으며 새로운 작업 구상에 들어갔다. 음악이 최선의 재활이라 믿었기에 지체할 수 없었다. (2013년 현재, 4회째를 맞고 있는 에릭 클랩튼의 < 크로스로즈 기타 페스티벌 >은 그가 설립한 마약중독 재활원 '크로스로드 재단'의 기금 모금을 위한 자선 공연이다.)
“기타를 빼앗기고 음악을 할 수 없게 된 나는 한심한 존재였다.” -에릭 클랩튼
오로지 기타만 알았던 한 남자에게 이제 남은 거라곤 '돈과 담배'뿐이었다. 이 상황은 그대로 여덟 번째 스튜디오 작품 < Money And Cigarettes >의 타이틀로 새겨졌다. 마약 중독의 후유증을 떨쳐낸 < 461 Ocean Boulevard >(1974)를 함께한 명 프로듀서 톰 다우드(Tom Dowd)를 통해 새로운 밴드 멤버를 모집했다.
평소에도 흠모했던 부커 티 앤 더 엠쥐스(Booker T. & the M.G.'s)의 전설적인 베이스 세션 도널드 “덕” 던(Donald "Duck" Dunn)과 같은 소속사인 스택스 레코드(Stax Volt)의 세션 드러머 로저 호킨스(Roger Hawkins), 그리고 훗날 < Buena Vista Social Club >(1997)을 프로듀싱하기도 하는 슬라이드 기타리스트 라이 쿠더(Ry Cooder)가 참여한다.
테네시 출신의 블루스맨 슬리피 존 이스츠(Sleepy John Estes)의 'Everybody oughta make a change'으로 포문을 연다. 새로운 라인업의 궁합이 나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는 '베테랑 밴드'의 사운드가 온전히 담겼다. 알버트 킹(Albert King)의 'Crosscut saw' 원곡의 심상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깔끔한 톤 메이킹이 돋보인다. 초기 로큰롤의 왕좌를 겨뤘던 조니 오티스(Johnny Otis)의 'Crazy country hop'는 경쾌한 리듬만으로 일관하는 감상을 남기기도한다.
'Ain't going down'은 지미 헨드릭스가 커버한 'All along the watchtower'에서 힌트를 얻었다. 코드 진행을 가져왔지만, 지나칠 정도로 베이스 라인이 두드러져 밸런스에서 아쉬움이 있다. 빌보드 18위를 차지한 'I've got a rock 'n' roll heart'는 작품의 베스트 트랙이다. 제목에서부터 수많은 팬들의 마음을 자극시키기 충분하다. 화려함을 지양한 절제된 연주와 소박한 멜로디는 당시 에릭 클랩튼의 주력상품이었다. 이어지는 'Man overboard'는 크게 주목 받은 곡은 아니지만 경쾌한 리듬의 부기(boogie) 스타일은 파티용으로 제격이다.
고전의 탁월한 재해석 능력은 클랩튼의 최대 강점이다. 이와 함께 매 앨범 자작곡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그의 주된 작업방식이다. 단순히 새로운 레코드를 발매하고 공연 활동을 위한 수록곡 채우기식이라는 인식을 저버리기 어렵다. 수록곡의 조화와 조율이 아쉽다.
이후 더 이상의 '술꾼 에릭'은 없었다. 자신이 오래도록 이끌어온 밴드의 해체도 새 앨범 작업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큰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을 테고, 중독자에서 벗어나며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마약과 술'의 늪에서만 연주하던 삐뚤어진 신의 모습은 이로써 마침표를 찍었다.
-수록곡-
1. Everybody oughta make a change [추천]
2. Shape you're in
3. Ain't going down
4. I've got a rock 'n' roll heart [추천]
5. Man overboard [추천]
6. Pretty girl
7. Man in love
8. Crosscut saw
9. Slow down linda [추천]
10. Crazy country hop
Producer: Tom Dowd & Eric Clap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