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코베인 25주기 Vol. 2 너바나를 기억하는 11곡

커트 코베인(Kurt Cobain)

너바나(Nirvana)

by IZM

2019.04.01



커트 코베인의 사망 25기를 맞아 그의 커리어에서 핵심적인 11곡을 선정했다. '록 역사의 마지막 성화봉송'을 일군 너바나의 역사적 의의, 그 속에서 연약한 개인으로 존재하며 괴로워했던 커트 코베인의 삶을 이해하며 오늘만큼은 거친 펑크 록을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해보자.



About a girl (1989)
압도적인 춤을 선보인 폴라 압둘과 자넷 잭슨의 댄스 팝, 또래 청소년들의 감성을 노래한 데비 깁슨과 티파니의 아이돌 음악, 허세와 잘난 체로 록의 본질을 망각한 팝메탈이 대중음악을 지배하던 1989년, 초라하게 공개된 너바나의 데뷔 앨범 < Bleach >가 1990년대 록음악 계를 전복시킨 밀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상업적이고 겉멋에 찌든 대중음악에 대한 통렬한 카운터 펀치와 가멸찬 대안이 우중충한 기후의 시애틀에서 잉태된 것이 세기말을 앞둔 암울한 암시였다.

튜닝도 정확하지 않은 엉성한 커트 코베인의 기타, 아마추어리즘을 확인시켜주는 초대 드러머 채드 채닝의 순박한 드럼, 마구잡이로 섞인 엉망진창의 믹싱까지 'About a girl'은 정교함, 세련됨을 애써 외면하고 거부하나 그 안에는 분노, 허탈, 에너지라는 록의 핵심이 정좌한다. 이 곡을 만들기 전에 비틀즈의 앨범 < Meet The Beatles >를 반복해서 들은 커트 코베인은 'About a girl'에서 최상의 멜로디 주조 능력을 과시했다. 1994년에 공개된 언플러그드 음반에서는 생생함 대신 세련됨을 장착해 커트 코베인의 작곡 실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지만 무대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노래하는 커트 코베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이제는 고통스럽다. (소승근)



Smells like teen spirit (1991)
자주 인용해 상투적이긴 해도 본고장 평론가 앤서니 드커티스의 수사 이상은 없을 것 같다. "정치를 언급하지 않는 정치적인 노래, 가사를 이해할 수 없는 찬가, 상업주의를 비판한 거대한 상업적 히트곡, 개인 소외에 대한 집합적 아우성. 이건 새 시대와 새 불만족 청춘 세대를 위한 '(I can't get no) satisfaction'이다!" 만족할 능력 없음에 대한 만족스러운 선언? 그야말로 전형적 록의 저항 어법, '자이언트 퍽유' 아닌가. 그 충돌과 그에 따른 균열로 커트 코베인의 죽음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마치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펑크(punk)하는 듯한 매끄러운 와일드 사운드는 예술성을 구축하는 동시에 미국 최초의 펑크 록 히트라는 대중성도 부여했다. 축축한 1980년대를 보내고 마침내 1990년대는 '뉴 록',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으로 견인되었다. 메탈은 사실상 종언을 고했고 단숨에 기존 질서와 가치는 전복되었다. 언더와 인디로 표현된 강한 '아래'가 고개를 쳐들어 여전히 억압적인 '위'를 맹렬히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만큼은 통쾌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록 역사의 마지막 성화봉송이었다. (임진모)



In bloom (1991)
'Smells like teen spirit'으로 거대한 분노를 표출한 커트 코베인은 다음 트랙 'In bloom'으로 조소의 대상을 구체화한다. 인트로 없이 곧바로 성난 기타 폭음으로 출발하는 곡은 간결한 베이스와 드럼 리프 위에서 '개화'를 읊조리다 거친 퍼즈 톤의 후렴부를 통해 '노래 부르기 좋아하고 / 총 쏘는 걸 좋아하지만 / 내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이들을 비판한다. 훗날 커트 코베인은 이 곡을 백인 노동자 계급과 폭력적인 문화에 길들여진 남성들을 비판하는 곡이라 설명했다.

이들은 '음식을 구하려 아이들을 팔아'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며 '자연을 창녀'로 여기는 탐욕의 화신이다. 그러면서도 '총을 쏘는 것'을 즐기며 폭력성을 과시하지만 자기가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1980년대 상업화된 헤비메탈과 1990년대 거친 갱스터 랩에 불편함을 피력했던 커트 코베인의 사상이 그대로 묻어나는 곡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허세와 혐오를 꺼린 인물이었다. (김도헌)



Come as you are (1991)
폭발의 미학을 설파한 'Smells like teen spirit'과 커트 코베인의 선율적 감각이 돋보이는 'Come as you are'은 너바나의 유일한 빌보드 탑 40 히트곡들로 그중 'Come as you are'은 거칠게 내달리는 것만이 아니라 많은 이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펑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노래의 잠재력은 그도 잘 알고 있었으나, 문제는 더 댐드의 'Life goes on'과 킬링 조크의 'Eighties'의 기타 리프와 유사해 표절 사건이 일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논란에서 그쳤고 그는 싱글 발매를 밀어붙여 차트 32위에 올리며 숨겨진 매력을 증명했다. 얼터너티브 록 밴드에서 나온 대중적인 얼터너티브 펑크다.

커트 코베인이 떠난 지 25주기가 된 지금 다시 이 곡을 추억하는 이유가 멋진 멜로디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음악 속 화자가 꼭 실제 자신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너의 모습 그대로 와' '친구로' '난 총이 없어' 등 죽음 예견한 듯한 모호한 가사는 그의 총격 자살에 남은 타살 의혹을 더욱 지워질 수 없게 만든다. (임동엽)



Lithium (1991)
리튬(Lithium)은 정신과 의사들이 처방하는 양극성 장애, 즉 조울증 치료제다. 커트 코베인이 실제로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Lithium'을 통해 그의 삶을 일정 부분 들여다볼 수는 있다.

"이 노래는 여자 친구가 죽고 난 뒤 종교로 귀의해 삶의 안식을 찾은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내 친구와 그의 기독교인 부모님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커트 코베인은 여자 친구와의 이별 따위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Lithium'에 녹이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노래의 내용이 픽션이라고 했으나, 그의 절규는 진실하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신을 찾았다며 마지막 남은 안식처를 구하는 듯한 처절한 후렴은 사실 약을 통해 찰나의 구원을 꿈꾸던 커트 코베인의 진심일지도 모른다. (정연경)



Polly (1991)
잔잔하게 내뱉은 언어들이 때로는 분노의 대리인이 된다. < Nevermind >에서 'Something in the way'와 함께 정적인 노래로 기억되는 이 곡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1987년에 14세 소녀가 납치 및 고문, 강간을 당한 사건을 접하게 된 커트 코베인은 범죄자의 시점에서 가사를 썼다. 자신의 노래가 명확한 의미에 가둬지는 것을 기피했지만, 'Polly'에서는 끔찍한 상황을 숨김없이 표현해 사회 문제 고발의 역할을 했다. 특유의 우울한 정서와 어쿠스틱 기타가 들려주는 단순한 코드 진행은 감춰지고 소외된 이야기가 다른 소리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만들었다. 커트 코베인의 음악이 시간이 지나도 힘을 잃지 않는 이유다. (정효범)



Heart-shaped box (1993)
커트 코베인은 세상과 불화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아리송한 은유가 가득한 와중에도 불만 가득한 후렴만큼은 또렷하게 들린다. “이봐! 기다려! 새 불만이 있어!(Hey! Wait! I've got a new complaint!)” 기묘하게 꿈틀거리던 지저분한 기타도 이 대목에 이르러 야수처럼 포효한다. 시애틀 그런지 문법을 따르는 것 같으면서도 너바나만의 울퉁불퉁한 '날'이 확실히 살아있다.

서정적이면서 기괴하고, 폭발적이면서 아름다운 이 곡은 아슬아슬한 커트 코베인의 머릿속을 그대로 옮겨 그려냈다. 도무지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뮤직비디오도 비슷하다. 죽음과 탄생, 신성과 불결의 이미지가 뒤섞이는 그로테스크한 뮤직비디오는 1994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최우수 얼터너티브 비디오와 최우수 아트 디렉션 부문을 수상했다. MTV를 그 무엇보다 싫어했던 커트 코베인이 세상을 뜬 지 다섯 달 뒤였다. (조해람)



Rape me (1993)
직설의 역설이요, 권선징악의 메타포다. 'Rape me'의 화자는 자기를 강간하는 이를 향해 오히려 마음껏 유린하라는 식으로 거침없이 말한다. 그저 무력하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냐, 할 테면 어디 해 봐라. 내가 반드시 살아남아서 언젠가 제대로 복수해 주겠다.'는 독한 마음을 품고 범인을 응시하는 상황이 연상된다. 커트 코베인은 노래를 통해 성범죄 문제를 환기하고 그 희생자들을 향한 지지를 드러내고자 했다. 후렴 가사 "I'm not the only one."은 수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의 연대를 청원하는 구호나 다름없다.

한편 'Rape me'는 미디어에 대한 반감 표출로 해석되기도 한다. 1991년 'Smells like teen spirit'이 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히트함에 따라 커트 코베인은 하루아침에 젊은이들의 우상 같은 존재가 됐다. 이 때문에 방송과 신문, 잡지에서의 언급도 갑자기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커트 코베인은 매체의 과한 관심, 사생활까지 캐려는 것에 진저리를 쳤다. 따라서 'Rape me'가 'Smells like teen spirit'과 유사한 기타 리프를 지닌 것은 그 싫증을 음악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한동윤)



All apologies (1993)
굵지 않은 디스코그래피 속 마지막 정규 음반의 끝 곡이다. 'All apologies'란 다분히 함축적인 제목에 첼로로 덧대 만든 아름다운 선율은 커트 코베인 사후 많은 팬에 의해 확대 해석됐다. 본 의미가 어떻든 간에 생전 그는 이 곡을 아내인 코트니 러브에게 헌정했다. '그녀의 적이 남긴 재에 숨 막혀하겠지', '결혼하고, 매장되겠지' 거칠게 포효하고 '사과할 뿐이다', '우리 속의 우리는 우리일 뿐이다' 읊조리는 보컬에는 그 어떤 성장 동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본연의 록 정체성으로 회귀한 3집 < In Utero >는 날 선 소음들을 두 팔 벌려 수용한다. 그중 유독 첼로와 기타의 질 좋은 선율로 호흡하는 이 곡은 너바나 사운드의 새 지평을 열었다. 수많은 그리운 얼굴이 떠오르는 4월, 음악 속에 살아있는 그를 만나고 싶다면 MTV 언플러그드 인 뉴욕 영상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상업과 비상업. 사랑과 속박. 성공과 비(非) 성공 사이를 위태롭게 견뎌낸 커트 코베인의 음색과 양가적 감정이 이 곡에 녹아 있다. (박수진)



The man who sold the world (1994)
너바나가 MTV 언플러그드에서 선보인 이 곡과 라이브는 특이하다. 1970년 동명의 앨범을 발매한 글램 록의 수장 데이비드 보위가 원작자고, 커트 코베인의 기타 소리는 전기 없이 피아노 같은 어쿠스틱 악기로 스테이지를 꾸리는 콘셉트에 맞지 않게 전기 기타 톤이다. 'The man who sold the world'는 'Come as you are'처럼 단선율식 인트로를 위시한 그의 작법이 어디서 왔는지, 죽음과 자아를 담은 가사는 심신이 지친 상태로 공연장에 나타난 그의 상태가 쉬이 볼 수준이 아니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동시에 그의 플러그드 무대는 세트리스트까지 히트곡으로 채우길 원했던 주류 시장에 대한 반발이자 펑크 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준 증거다.

'The man who sold the world'가 다른 사람 거였어?'라고 생각하며 실망한 사람도 있겠지만, 원작을 뛰어넘는 표현력으로 곡에 새 생명을 부여한 커트 코베인에게 느낀 자부심까지 거둘 필요는 없다. 그도 또래와 같이 하드록과 팝 등 다양한 음악을 사랑했던 사람일 뿐이다. 아쉬울 것 없다. 그의 멋진 음악은 다른 노래들도 많으니까. (임동엽)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 (1994)
쓸쓸하고 불안정한 어쿠스틱 반주 위 너바나의 레퀴엠이 막을 올린다. 1870년대 미국 민요 '소나무 사이서(In the pines)'를 노래한 블루스 가수 리드벨리(Leadbelly)의 고전은 커트 코베인 사후 발매된 < MTV Unplugged In New York >의 마지막을 처연하게 장식했다.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던 1993년의 커트 코베인은 금방이라도 삶을 포기할 것 같은 불안을 가림막 없이 표출해낸다. 위태로운 무대 위 촛불처럼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며 깊은 회한으로 갈라져있다. 이내 모든 것을 쏟아내는 최후의 1분은 노래라기보다 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절규, 끝을 앞둔 존재의 무기력한 몸부림에 가깝다. 그리고 그 절정의 순간에서, 커트 코베인은 처음으로 형형히 눈을 뜨고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마치 자신을 짓눌렀던 모든 것들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듯. 곧 그는 열반(Nirvana)에 들었다. (김도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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