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시 존스(1933 - 2024), 미국 음악사의 위대한 이름
퀸시 존스(Quincy Jones)
미국 일간지 뉴욕 타임스는 2024년 11월 4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영면한 퀸시 존스의 부고 글에 미국 음악의 거인(Giant of American Music)이란
칭호를 붙였다. 일견 보편적인 수식이나 American Pop
Music 대신 채택한 American Music 이란 표현에서 짧은 미국 음악사에서 퀸시
존스가 가진 위상을 읽을 수 있었다. 20세기 전반을 가로지르는 70여
년간의 긴 여정에서 비롯된 무수한 걸작은 조지 거슈윈이나 콜 포터, 듀크 엘링턴 같은 위대한 음악가들을
상기했고 대중문화 산업과 맞물려 선배들 이상의 파급력을 발휘했다.
기록의 사나이다. 그래미에서 무려 80번 후보에 올라 28번 수상한 그는 32회 비욘세, 29회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에 이어 3위에 올라와 있으며 미국 대중문화의 권위 있는 네 가지 시상식, 에미(EMMY)와 그래미(GRAMMY) 오스카(OSCAR)와 토니(TONY)를 석권한 일명 EGOT 위너기도 하다. 대중음악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인 마이클 잭슨의 1982년 걸작 < Thriller >와 슈퍼그룹 유에스에이 포 아프리카의 자선 싱글인 ‘We are the world’도 그의 손길을 거칠 만큼 그를 빼고서 미국 문화사를 논하긴 어렵다. 음악계와 영화계, 공연업계를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한 르네상스적 인간이요, 전방위 예술가였다.
멜팅 팟
인종과 문화가 하나로 융합되는 현상을 뜻하는 멜팅 팟(Melting Pot). 퀸시 존스는 미합중국의 멜팅 팟 정체성을 음악으로 구현했으며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에 앞서 흑백 통합을 제시했다. 흑백 유전자의 완벽한 이해와 대중 감각으로 미국 시민이라면 누구나 즐길법한 음악을 다산했다. 1950년대 초반 라이오넬 햄튼과 디지 글래스피 같은 명인과의 교류로 재즈 뮤직을 체득한 그는 1957년 파리로 넘어가 나디아 불랑제와 올리비에 메시앙 같은 프랑스 출신 현대 음악 작가들과 수학했다.
이십대에 이미 재즈와 클래시컬 뮤직을 마스터한 퀸시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음악계에서 필름 스코어와 프로덕션의 재능을 풀어헤친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루이 암스트롱, 카운트 베이시같은 명장들의 작품에서 퀸시 존스가 오케스트라 편곡 및 지휘를 함(Orchestrated and Conducted by Quincy Jones) 이란 문구가 발견될만큼 관현악과 빅밴드 사운드에 발군이었다. 특유의 인간미와 친화력도 잦은 협업의 추진 장치였다.
퀸시 식 빅밴드 사운드의 결정판인 1961년 작 < The Quintessence >와 1974년 음반 < Body Heat >가 대변하는 70년대 중반 재즈 펑크(Jazz Funk) 시기, 1989년 < Back On The Block > 힙합에 이르기까지 놓친 부면 없이 시대 조류와 감응했다. 심지어 걸작 ‘Soul bossa nova’를 포함한 < Big Band Bossa Nova >로 브라질 대중음악의 상징인 보사노바까지 섭렵하며 브라질 음악가들의 존경을 괴물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스타일 상 다양한 조류를 함의할 수밖에 없는 필름 스코어가 그의 가장 큰 자산이자 밑바탕이었다.
최고의 조력자
입 다물긴 힘든 목록이다. BBC를 비롯한 많은 외신이 그를 “프랭크 시나트라와 마이클 잭슨과 협업한 프로듀서”라고 수식했다. 칠십여년 기나긴 경력은 대중음악사의 지형도와도 같아 1950와 1960년대에는
디지 길레스피와 사라 본, 아트 파머 같은 재즈 명인과 협력했고, 열여섯
나이에 팝계 신데렐라로 떠오른 레슬리 고어의 1963년 빌보드 핫100
넘버원 ‘It’s my party’에도 퀸시의 손길이 닿았다.
1970년대는 소울과 펑크(Funk)에 천착해 아레사 프랭클린과 도니 해서웨이를 도왔고 결정적으로 ‘Strawberry letter 23’과 ‘Stomp!’의 주인공 브라더스 존슨의 수작에 직접 관여했다. 물론 하이라이트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의 콜라보레이션이다. 모타운 사장 배리 고디는 “해왔던 음악이 너무 재즈스럽다(Jazzy)”하다며 우려를 표했으나 만천하가 알 듯 결과는 팝계 천하 통일이었다. < Off the Wall >(1979)과 < Thriller >(1982), < Bad >(1987)에서 쏟아진 빌보드 핫100 넘버원만 자그마치 아홉 곡이며 그래미 트로피도 일곱개나 수확하며 팝의 역사를 새로 썼다.
가는 게 있음 오는 게 있다고 역으로 퀸시 자신의 작품에도 지원군이 든든했다. 엘라 피츠제럴드의 남편이기도 했던 당대의 저명한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은 종종 공동 프로듀서를 역임할 만큼 서로 신뢰하는 관계였고 오는 11월 24일 리 릿나워와 내한 콘서트를 펼치는 컨템퍼러리 재즈 피아니스트 데이브 그루신은 퀸시가 믿고 맡기는 연주자였다. MJ 최전성기 3연타석 홈런의 숨은 공신인 펑크 밴드 히트웨이브 출신 로드 템퍼튼과 저음이 끝내주는 소울 거장 배리 화이트, ‘Just once’와 ‘One hundred ways’를 합작했던 명품 보컬리스트 제임스 잉그램이 퀸시의 단골 파트너였다.
뮤지션의 뮤지션
자선 싱글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를 다룬 넷플릭스 뮤직 다큐멘터리 <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 >은 퀸시 존스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We are the world’의 작곡자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퀸시는 스튜디오 콘솔에서 음악적 디테일을 세심하게 다룬 동시에 개성으로 가득찬 슈퍼스타들을 한데 묶었다. 자존심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최고의 아티스트들도 퀸시와 지휘와 통솔에 수긍할 만큼 그를 향한 신뢰와 존경이 견고했다.
악보를 볼 줄 알았고 음학(音學)에 밝았다. 1950년대부터 수많은 편곡과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으로 다져진 그는 고전적으로 훈련된(Classicaly Trained) 음악 기계와도 같았고 음악 만들기의 전과정을 완벽하게 통솔 및 지휘할 정도로 빈틈없었다. 그렇다고 음악을 머리로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며 동료들과 가슴으로 뜨겁게 교감하며 협업 미학을 알리기도 했다. 이성과 감성의 완전 합치에 수많은 뮤지션들이 존경과 지지 의사를 보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속 동료 음악가들의 수많은 추모글은 그만큼 많은 예술가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는 증거다.
운동가적 면모
마빈 게이나 밥 딜런처럼 정치 · 사회적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경력 내내 인권 신장에 힘썼다. 흑표당과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로 대변되는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 시기에도 마틴 루서 킹의 조=협력자로 나설 만큼 적극적이었다. 교육의 힘을 신봉했던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 예술 향유의 저변 확대와 기틀 마련을 위해 흑인 미국 음악 연구소(Institue for Black American Music)를 세웠다. 1970년대엔 퀸시 존스 워크숍을 통해 로스앤젤레스 거주 흑인 청소년의 작곡과 연주, 연기를 교육했으며 퀸시 존스 리슨 업 재단(Quincy Jones)으로 로스앤젤레스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소외된 청소년들 간의 문화적 교류를 도모했다.
본인이 시카고에서 가난하고 거친 유년기를 거쳐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인 만큼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1951년 시애틀대학교에서의 학위 취득과 1957년 파리 유학에서 느낀 바도 많았을 테다. 샘 쿡의 ‘The little light of mine’(1964)과 s니나 시몬의 ‘To be young, gifted and black’(1970)처럼 직접적 음악의 형태는 아니었으나 퀸시는 자신만의 방식대로 흑인 인권에 공헌했다. 시카고와 연관 깊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시카고 거리에서 할리우드 정점에 올랐다, 흑인으로 하여금 연예 사업에 진출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만들어줬다”라며 퀸시의 의의를 상찬했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은 인스타그램에 올린 추모글에서 “그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길 좋아했으며 장벽을 부수길 좋아했다” “스타일과 나이, 국적이 아닌 오직 음악만이 중요했다”라며 개방주의를 높이 샀다. 넷플릭스 음악 다큐멘터리 < 퀸시 존스의 음악과 삶 >에서도 켄드릭 라마를 비롯해 고령에도 끊임없이 젊은 아티스트와 교류하는 모습과 예술가이자 기업가의 표본 같은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속 동료 뮤지션들의 수많은 추모글은 그만큼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중성과 예술성의 완벽 조화 아래 다채로운 스타일을 아우르며 성공작을 쏟아냈던 퀸시 존스. 절륜한 음악성과 훌륭한 인품을 동료 예술가와 공유했던 그는 음악사 휴머니즘의 표본으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