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더 많이 찍을 걸 그랬어요.”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한 사내가 각막을 렌즈 삼아 본인의 삶과 해변의 자유를 투영해 찐득한 모국어로 인화한다. 기존 색채로 돌아오자마자 세계는 또다시 열광했다. 앨범 차트 정상에 자기 이름을 또 새겨 넣은 배드 버니가 주춤했던 기세를 재차 잡은 것이다. 라틴 음악이 잠시 흐릿했던, 그리고 작년의 큰 이슈가 사그라든 팝 시장에서 지금이 바로 대권을 노릴 적기다. 일단 지금까지 2025년 상반기의 주인공 중 한 자리는 배드 버니의 차지다.
갖은 실험을 위해 깜깜한 심연의 사운드로 잠수했던 < Nadie Sabe Lo Que Va A Pasar Mañana >에 비하면, 전체적인 신보의 분위기는 우리가 알던 이 남자의 흥과 가깝다. 어둑한 공기의 전자음악과 힙합에 심취했던 이전과 달리 레게톤에 힙합과 알앤비를 교배하는 농밀한 크로스오버, 배드 버니 클래식의 완전체다. 게다가 카리브 지방의 전통적인 선율과 리듬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흥얼거린다. 신명나는 음악 덕분인지 드넓은 친화력과 뚜렷한 정체성까지 챙긴 욕심이 그다지 밉지도 않다.
< DebÍ Tirar Más Fotos >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드레이크와의 ‘MIA’ 등 힙합 스타와의 합작 트랙, 동종 업계 제이 발빈과 함께 만든 < Oasis >가 유익한 선행학습이 될 것이다. 게다가 미대륙을 잠식한 배드 버니의 방법론은 곧 라틴음악의 미국 파훼법과 동일하다. 그는 팝과 힙합을 끌어안고도 스페인어 문화권의 가장 큰 무기인 본연의 리듬과 언어의 영역을 늘 지킨다. 여기에 중후하고도 부담 없는 목소리는 덤. 원형을 보존한 채 대중적인 팝과 힙합을, 이 반복적이고 매력적인 소스를 영리하게 이용해 쟁취한 차트 성적은 성장의 달콤한 과즙이 되었다.
신보에도 전문 분야이자 다소 관습적인 레게톤 리듬이 살아 숨 쉰다. 수려하게 나열된 멜로디와 어우러지는 타악 규칙의 조화, 그리고 이 여유 사이에 빛나는 랩은 두어 번 교차 번역을 거쳐야 하는 언어의 장벽을 무시하고도 귀에 내리꽂힌다. ‘Voy a llevarte pa PR(푸에르토리코로 데려가겠어)’라 공표하며 포부를 드러내는 곡은 늘 그랬던 것처럼 즐겁고, 서정적인 전자음 리프와 북받치는 박자가 교차하는 ‘Ketu Tecré(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나요)’나 ‘Kloufrens(가까운 친구)’는 또 진중하다. 전문가답게 그 활용도가 다채롭게 변화했다.
히스패닉 인구의 상승세를 고려하더라도 이 장르의 건재한 인기의 실체와 근거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아가 전작에서 저지클럽과 같은 장르가 단순한 차용에 그쳤다면 이번에는 최신 유행과 어색하지 않은 융합에도 성공했다. 유사한 속도에 레이지에 가까운 신시사이저 연주과 듀엣 알앤비를 선보인 ‘Perfumito nuevo(새 향수)’, ‘Bokete’(도로에 난 구멍)’ 등 조용한 컨템포러리 알앤비 선율로까지 너울거리는 중반부가 그 증거다. 사적인 감정과 진심이 느껴지는 ‘El Club’과 같은 곡을 담을 때는 하우스를 사용해 적절하게 돌아가기도 한다.
출생지에서 체득한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심화 과정도 있다. 퍼커션과 독특한 리듬이 강조된 전통 장르 플레나(Plena)를 도입한 ‘Cafe con ron’을 통해 다시 백사장을 밟은 그는 근원에 존경을 표하는 걸 넘어 그 뿌리가 곧 자신임을 담백하게 드러낸다. 첫 트랙부터 흥겨운 라틴 리듬과 베이스 위 맛깔난 랩을 뽐낸 ‘Nuevayol(뉴욕)’이나 피아노와 브라스가 결합한 살사 음악 ‘Baile Inolvidable(잊히지 않는 춤)’은 이 정체성이 매끈하게 발현된 결과다. 이국적인 곡들이지만 팝 청자들에게도 부담스럽지도 않을 적정 수위를 잘 지켰다.
여러 댄스 음악에 가려진 유기적인 서사도 진지한 의미를 새긴다. 뉴욕에서부터 배드 버니를 따라 푸에르토리코로 이동하고, ‘Café Con Ron(커피와 럼)’, ‘Pitorro de coco(코코넛 칵테일)’과 같이 흥겹게 바닷가 속 정열을 감상하다가도 우리가 ‘Turista(관광객)’로서 외면했던 이면의 이야기 ‘Lo que le paso Hawaii(하와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까지 눈길을 돌리게 된다. 삶의 궤적을 음악으로 이야기하고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는 것, 언어와 결은 다를지언정 대중음악의 본질은 결국 통한다.
아메리카 대륙 내 흡족한 타자(他者)의 사례다. 또 라틴 팝이 오래도록 갈고 닦은 결실은 비슷한 이방인 음악의 위치에 놓인 우리네 K팝이 질투심을 가져야만 할 대상이다. 스타일과 언어까지 모방한 타협안으로 틈새는 공략했을지언정 K팝만의 알맹이, 그 가치는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배드 버니가 이끄는 이 독자적 장르는 영미권의 음악 제국주의 속에서도 놀라운 유연함으로 스스로를 오롯이 지키지 않았는가. 타자의 음악에도 사담(私談)과 대중성, 정체성과 국가를 담아 세계에 전할 수 있음을 그는 또다시 증명했다.
-수록곡-
1. Nuevayol(뉴욕)
2. Voy a llevarte pa PR(푸에르토리코로 데려가겠어) [추천]
3. Baile Inolvidable(잊히지 않는 춤) [추천]
4. Perfumito Nuevo(새 향수)
5. Weltita(해변 놀이)
6. Velda(진심)
7. El Club(그 클럽) [추천]
8. Ketu Tecré(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추천]
9. Bokete(도로에 난 구멍)
10. Kloufrens(가까운 친구)
11. Turista(관광객)
12. Café Con Ron(커피와 럼) [추천]
13. Pitorro de coco(코코넛 칵테일)
14. Lo que le paso Hawaii(하와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추천]
15. Eoo(페레오 커플 댄스)
16. Dtmf(DebÍ Tirar Más Fotos)
17. La Mudanza(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