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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라라
키라라(KIRARA)
2025

by 정기엽

2025.03.03

독일의 미학자 발터 벤야민은 예술 작품의 아우라가 기술 복제가 가능한 시대에 이르러 쇠퇴해 간다고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개인적 지향이 뚜렷하다면 기품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 키라라 >는 상징적이다. 함부로 스캔할 수 없는 자아를 꾹꾹 눌러 담은 앨범을 지난 10년간 꾸준히 발표하며 만든 유일무이한 캐릭터의 발현을 증명하듯 본인의 이름 세 글자를 제목에 각인했으니 말이다.


고유성을 해치지 않고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기, 그가 세운 댄스홀의 규칙이다. 서두부터 배치한 ‘음악’은 그 핵심 예제로, 키라라의 하우스 비트와 선우정아의 스캣이 평행선을 그리지만 쨍하고 명확한 두 색으로 뻗은 줄기 자체가 찬란히 빛난다. 즉흥 프레이즈를 외는 목소리는 언어화하기 어렵더라도 감정의 고저가 확실하게 들린다. 받아 쓰는 행위를 무용하게 하는 그냥 ‘음악’이 5분간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된다고 일언반구 없이도 설명한다.


존재대로 즐기는 게 답인 기조는 앨범 내내 지속된다. 다음 곡인 ‘Contrast’와 ‘망한 놀이공원’을 듣자면 키라라는 자기 속도로 묵묵히 발자국을 새긴다. 중간에 랩으로 참여한 언텔은 잠시간 함께 달려주는 페이스 메이커의 역할일 따름이고, 오히려 후자에서 비로소 홀로 눈치 보지 않고 미친 듯한 변주를 잇는 구간이 가장 신난다. 행사 사진에는 같이 뛰며 웃는 모습이 포착될 수 있지만 혼자 있었더라도 생긋한 표정은 그대로일 테다. 마라톤은 본디 독주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며, 피처링을 포함한 우리는 68분간 키라라의 발돋움을 지켜보는 타인이다.


스월비의 리듬감이 보탠 ‘조각’, 속도계의 극에 달하는 ‘FP’, 불독맨션 ‘Destiny’를 샘플링한 ‘Love me’ 등 모든 곡에서 러너스 하이를 불러일으킨다. 다 듣고 나면 숨이 찰 정도지만 지친다기보다 벅차오르는 활력에서 오는 한숨이다. 춤추듯 열심히 내딛는 코스 사이 급수대 역할을 하는 ‘샐러드’는 귀가 쉬어갈 공간이 되어준다. 여러 재료를 귀엽게 읊는 장명선의 목소리는 수분을 가득 머금은 채소처럼 싱그럽다. 음표가 될 것을 고려하지 않은 이름들이 음악의 그릇에 담겨 맛있게 버무려진 트랙이다.


싱어송라이터 예람과 또 한 명의 전자음악가 한정인은 키라라와 상호 이해가 착실히 쌓인 협업자들인 게 분명하다. 각자 ‘조감도’와 ‘지구 밖’에서 안정적으로 보컬과 비트의 조화를 들려준다. 공통적으로 듣는 사람들을 어린아이로 돌려놓는 동심을 간직했다. 비현실적으로 찬란히 빛나는 석양 아래 푸른숲을 파헤치듯 동화스러운 감상을 일깨우는 목소리와 프로듀싱은 예람과 한정인, 키라라가 가진 분명한 힘이다. 전자음악 필드 속 그들의 특장점을 확실히 드러냈다.


셀프 타이틀 음반은 어느 아티스트에게나 결의를 표하는 장치다. 애호가들에게 기대치를 심어주기 마련이기에 실망감을 불러일으킬 악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키라라의 자신감은 꺾이지 않고 아쉬워할 틈을 내주지 않았다. 그가 잘하는 걸 쏙쏙 골라 담아 대중에게 건넸고,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다. 이름을 내건 상차림에 그에 걸맞은 풍성한 먹거리가 가득하다.


-수록곡-

1. 이 앨범의 주제

2. 음악 (With. 선우정아) [추천]

3. Contrast (With. Untell)

4. 망한 놀이공원 [추천]

5. 샐러드 (With. 장명선) [추천]

6. 조각 (With. 스월비)

7. 조각모음 1

8. 조감도 (With. 예람) [추천]

9. 증발 (With. 할로우잰)

10. 지구 밖 (With. 한정인) [추천]

11. 격추

12. 조각모음 2

13. Love me

14. FP

정기엽(gy24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