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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ronic
닥터 드레(Dr. Dre)
1992

by 임진모

2001.02.01

90년대 랩 음악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

80년대 후반 랩 음악은 두 그룹을 배출하면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그중 하나는 앞에 서술된 퍼블릭 에니미(Public Enemy)다. 퍼블릭 에니미는 미국 동부출신으로 전위적인 사운드 테크닉과 급진적인 정치성을 담은 가사로 혁명적인 하드코어 랩을 개척했다.

다른 한 그룹은 '경찰놈들'(Fxxx the Police)이란 곡으로 FBI의 경고 서한을 받으며 유명해지기 시작한 N.W.A.(강경한 자세의 흑인들이란 뜻의 Niggarz With Attitude의 줄임말)다. 서부출신의 N.W.A.는 그들보다 조금 시기적으로 빠른 퍼블릭 에니미에 비해 단순하고 펑키한 사운드를 바탕으로 '갱'과 관련된 남성적이고 도발적인 삶을 예찬하는 랩 음악을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갱스타 랩'이라고 했다. 한동안 흑인음악은 말할 것도 없이 전체 팝 음악계에 갱스타 랩이란 어휘가 판을 쳤다.

당시 N.W.A.의 사운드를 주도했던 이가 바로 닥터 드레(Dr. Dre)였다. 그는 이후 솔로로 전향했고(그룹은 이와 동시에 와해되었고 다른 멤버들 역시 흩어져 모두 솔로로 나섰다) 동시에 음악 방향에 일대 전환을 꾀했다. 제임스 브라운 샘플이 지겨워졌고 N.W.A.의 앨범에도 실망한 그로서는 '뭔가 다른 것'을 만들어내야 했다. 마침내 92년 음반사 데스 로(Death Row)에서 기념비적인 작품 <더 크로닉>을 내놓게 된다.

효력이 강한 마리화나의 속어를 제목으로 내건 이 앨범은 '프로듀서'로서 창조성에 대한 닥터 드레의 자신감이 극대화되어 나타난 작품이다. '드레의 날과 함께, 그리고 모든 이들이 경축한다'(Wit Dre day and everybody's celebratin')라는 곡명을 보라.

음악은 N.W.A.에서 보여줬던 갱스타 랩을 토대로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펑크(funk)와 느릿한 그루브를 이입하고 몽환적인 신시사이저를 덧입힌 새로운 형태였다. 제임스 브라운에서 조지 클린턴으로의 선회였다. 단순하게 도식화하면 갱스타 랩과 펑크를 결합한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자신의 음악을 두 음악 용어를 합쳐 '지 펑크'(G-funk)라 명명했다. 여기서 G는 물론 갱스타(Gangsta)의 앞 글자이다.

앨범은 전반에 걸쳐 지 펑크의 기운이 역동하는 가운데 N.W.A.시절부터의 '형제' 스눕 도기 도그(Snoop Doggy Dogg)와 달라스 출신의 래퍼 D.O.C. 등 게스트 보컬의 도움을 받아 제작되었다. 이는 N.W.A. 시절부터 프로듀싱에 전념하려는 닥터 드레의 작업 성향이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래퍼로서는 평범한 실력을 지녔던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방식의 일환이기도 했다.

'드레의 날과 함께'(Wit Dre day)와 더불어 가장 높은 완성도를 들려주는 트랙 '올라타요'(Let Me Ride)와 스눕 도기 도그와 닥터 드레의 호흡이 교차하는 '단지 갱스타야 '(Nuthin' But A "G" Thang), R&B의 요소를 도입한 '릴 게토 보이'(Lil' Ghetto Boy) 등에 힘입어 통상적으로 판매가 약한 흑인 앨범 치고 당시 놀랍게도 미국 내에서 300만장이 팔려나가는 스매시 히트를 거둔다.

특히 가장 먼저 싱글로 나온 '단지 갱스타야'는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치솟으며 플래티넘디스크를 기록했다. '드레의 날과 함께'도 8위에 오르며 골드 디스크가 됐다. 단숨에 <더 크로닉>과 지 펑크는 90년대 힙합 음악을 관통하는 새로운 규격으로 부상했고 자신은 히트 제조기로 떠올랐다.

그 무렵 닥터 드레의 자만. "난 3살 짜리 꼬마를 데려다가 그에게 히트 레코드를 안겨줄 수 있다."

닥터 드레는 이후 후배를 발굴하여 양성하는 프로듀서로서 전성기를 맞이하며 가히 하나의 지 펑크 제국을 건설한다. 자신의 앨범을 능가하는 성공을 일군 이듬해 스눕 도기 도그의 앨범 <도기스타일>과 94년 이복 동생인 워렌 지(Warren G)의 <자 준비해, 지 펑크 시대야>(Regulate...G Funk Era)가 바로 그가 프로듀스한 앨범이었다. 그가 4년여 동안 데스 로 레코드사 시절 제작에 참여한 11장의 앨범은 모두 플래티넘 레코드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그의 지휘력 때문에 설령 그의 제국 부하들이 설령 더 높은 판매고를 올렸어도 평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닥터 드레의 <더 크로닉>을 최고의 갱스타 랩 앨범으로 꼽으며 그 덕에도 이 앨범은 여전히 힙합의 주요 텍스트로 남아 있다.

90년대 중반까지 퍼블릭 에니미와 KRS 원의 정치의식을 대체하는 지 펑크의 확산과 지배는 멈출 질 몰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90년대 중반의 주류의 힙합 계는 점점 획일화되어가기 시작했다. 지 펑크의 사운드가 한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담보로 서로의 음악을 복제하며 적당히 포장만 바꾸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결과로 서부의 로스앤젤레스 지역을 중심으로 닥터 드레가 이룩했던 제국의 신화는 호령을 멈추고 서서히 무너져 갔다. 게다가 96년 갱스타 래퍼 투 팩(Tu-Pac)의 죽음과 97년 공갈 혐의로 인한 데스 로 사장 수지 나이트(Suge Knight)의 구속 사건이 터지면서 언론과 대중은 향락적이며 폭력적인 메시지를 거두지 않는 갱스타 랩에 일제히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

닥터 드레는 "갱스타 랩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데스 로를 떠나 독자로 레이블 애프터매스(Aftermath)를 설립하고 96년 두 번째 앨범 <닥터 드레가 선사합니다, 애프터매스>(Dr. Dre Presents... The Aftermath)를 발표했다. 앨범은 힙합과 R&B, 하드코어와 팝, 서부와 동부, 올드 스쿨과 뉴 스쿨을 아우르려는 닥터 드레의 음악적 전기(傳記)와 같은 회심작이었지만 음악과 상업 양면에서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임진모(jjinmo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