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이미지
KRNB
진보(Jinbo)
2012

by 한동윤

2012.09.01

그냥 리메이크 앨범이 아니다. 편곡이랍시고 대충 현악기만 칠하고 마는, 특색 없고 뻔뻔한, 흔해 빠진 리메이크가 아니다. 그렇다고 순전한 창작곡으로 이뤄진 작품도 아니다. 원곡의 가사는 일부 바뀌었지만 주된 멜로디는 그대로다. 히트곡에서 모티프를 얻고 오리지널과는 완전히 다르게 재가공한 ‘반(半) 리메이크’ 앨범이다. 기존에 나온 리메이크 앨범들과 가장 대비되는 부분이다.


진보(Jinbo)는 19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던 노래들을 선별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단순히 지난 세월에 대한 감성을 소환하는 데 늘어지지 않는다. 히트곡들을 자기 방식대로, 자신의 빛깔로 가공하고 윤색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수록곡들은 대체로 리듬 앤 블루스 형식을 띠고 있지만 진보는 이 성격을 더 진하게 끌어낸다. 이것이 < KRNB >에서 발견되는 제일의 특징이다.


그 작업의 한 축은 농도가 한층 짙어진 가사가 담당한다. ‘Gee’의 사랑에 빠진 소녀의 귀여운 가슴앓이는 ‘Damn’에서 끈적끈적한 분위기로 바뀌었고, ‘I need you girl’은 ‘I need a girl’의 연애 감정 대신에 관능적인 묘사로 수위가 높아졌다. 아침이 시간적 배경이었던 ‘빨간 우산’과 달리 ‘아름다운 그녀’는 밤으로 시간을 옮겨왔으며, 풋풋함이 사라지고 데이트할 때 발생하는 남성 특유의 심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표현이 진한 사랑 노래가 다수를 차지하는 본토 R&B의 내용적 특성을 제대로 구현했다.


흑인음악의 면면을 포함하는 넓은 스펙트럼은 농후한 풍미를 내는 다른 축이다. 잽(Zapp)의 ‘Doo wa ditty (Blow that thing)’에 착안했을 펑크(funk)(‘아름다운 그녀’)를 비롯해 디스코(‘알고 있었어’), 뉴 잭 스윙(‘I need you girl’), 슬로 잼(‘Damn’, ‘너와 함께하면 행복해’), 마크 디 클라이브 로(Mark de Clive-Lowe)류의 전자음악 기반의 네오 소울(‘Love game’, ‘Late night interlude: Listen girl’) 등 지난 40년 동안 있었던 리듬 앤 블루스의 굵직한 스타일 변화를 요약한다.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풍의 사운드 또한 간간이 도드라진다. 미국에서도 이런 앨범은 쉽게 볼 수 없었으니 귀하다고 해도 넘치는 말은 아닐 듯하다. 자칫 번잡스러운 백화점식 구성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커버와 R&B라는 기준을 잘 응용했기에 결과는 깔끔하게 나왔다.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도 있다. 진보는 샘플링을 소극적으로 행하면서 자신만의 리메이크를 만들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어’만큼은 샘플 의존도가 무척 높다. 노래에 차용된 실비아 스트리플린(Sylvia Striplin)의 ‘Give me your love’ 주요 마디에 루프로 사용할 만한 멋진 리듬과 거기에 덧붙이는 용도로 쓰기 좋은 연주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득을 본 인물이 아만드 반 헬덴(Armand Van Helden)이다. 게다가 진보는 원곡의 코러스까지 고스란히 삽입했다. 쉬운 절차를 밟은 것 같아 유감스럽다.


그럼에도 < KRNB >의 근사함은 크게 휘청거리지 않는다. 일관성 있는 기획, 세련된 편곡, 래퍼로서, 싱어로서 출중한 능력이 어우러지면서 멋진 작품을 완성해 냈다. 은연중에 고착된 리메이크의 방식과 규범도 깼다. 새로움과 뮤지션만의 개성 있는 해석이 돋보인다. 최고라는 수사가 아깝지 않다.


-수록곡-

1. Intro: KRNB [S.E.S. - 감싸 안으며]

2. 아름다운 그녀 [김건모 – 빨간 우산] [추천]

3. 알고 있었어 [듀스 – 알고 있었어]

4. I need you girl [태양 – I need a girl]

5. Damn [소녀시대 – Gee] [추천]

6. 너와 함께하면 행복해 [서태지와 아이들 – 너와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추천]

7. Interlude: Not too young at all [Nat King Cole – We were too young at all]

8. 나빠 [2NE1 – 아파]

9. Love game [BoA – Game] [추천]

10. Best friend [빛과 소금 – 오래된 친구]

11.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Take 3) [서태지와 아이들 –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12. Late night interlude: Listen girl [솔리드 – 아끼지 못했던 사랑]

13. Yes and no [솔리드 – Yes or no] [추천]

한동윤(bionicsou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