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순풍을 탄 아티스트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통과의례다. 일렉트로닉 팝이 시장을 휩쓸던 10년 전쯤 함께 등장한 앤 마리에게 이번 시험이 요구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전자음악의 슬하에서 성장했으나 장르의 열기는 차츰 식었고, 몇몇 히트곡 이후 그의 후속작은 성공 공식을 다소 납작하게 반복하는 데 그쳤기 때문. 시장의 논리는 비정하지만, 화려한 조명이 옮겨간 지금 점검의 시기는 가장 적절하다.
새 판을 짜겠다는 의도가 돋보인다. 초장부터 ‘Sad b!tch’가 새드 걸 팝(Sad Girl Pop)에 일침을 날리고, 대신 팝 펑크에 실마리를 얻은 ‘Haunt you’가 강하고 주체적인 자의식을 불어 넣는다. 본인의 병명을 드러낸 ‘Cuckoo’나 재치 있게 단어 중 앞 글자만 뗀 ‘Ick’ 등 실감 나는 노랫말도 옹골찬 성장의 단면을 써내리는 데 일조한다. 실제 경험을 빼곡하게 수록한 덕에 건강하지 않은 모습, 결점까지도 온전히 내비치겠다는 타이틀 < Unhealthy >는 설득력을 가진다.
준수한 표현력을 청각에 연결 짓기 위해 보컬리스트로서 놀라운 장르 적응력도 발휘한다. 한 우물만 파기보다는 각각에 맞는 옷을 입혀 그가 지닌 최대 장점이 잘 드러나는 전략이다. 래퍼 라토부터 케이팝 그룹 세븐틴까지 교류했던 경험을 양분 삼아 어쿠스틱과 록, 심지어 컨트리까지 폭넓게 선보인 것이다. 돌아온 여성 컨트리 팝의 대가 샤니아 트웨인(Shania Twain)의 허스키한 음색을 만끽할 ‘Unhealthy’에서 마저 전설의 명성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매무새는 그럴듯해 보이나 알맹이는 부실하다. 입체적인 서사와 다르게 대부분의 구성이 평면적인 탓으로, 비교적 준수한 곡은 음미하기에는 너무 짧고 이전 히트곡만큼의 파급력을 지니지도 못해 그 인상이 미약하다. 송 캠프에서 기억에 남는 멜로디만 단순 나열한 트랙리스트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고, 수수한 품으로 몇 곡 정도는 완성도를 높였으면 어떨까 아쉬워지는 지점이다.
인기 싱글 ‘2002’는 순탄한 성공 가도를 펼쳤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높았다. 험난한 길 중간에 거울을 비춰본 순간, 앤 마리는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힘겨운 돌파를 택했다. 그렇게 탄생한 < Unhealthy >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리고 가수로서 도약의 발판으로 충분히 기능할 것이다. 물론 결과를 중시한다면 모든 종류의 초석이 그러하듯 크게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 과정에 의미를 둔다면 자랑스러운 흔적이다.
-수록곡-
1. Sucks to be you
2. Sad b!tch
3. Psycho
4. Haunt you [추천]
5. Trainwreck
6. Grudge
7. Obsessed
8. Kills me to love you
9. Unhealthy (Feat. 샤니아 트웨인) [추천]
10. Irish goodbye
11. Cuckoo [추천]
12. You & I (Feat. 칼리드) [추천]
13. Never loved anyone before
14. Better off
15. Ick
16. Expect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