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조각 끝에 빛을 본 < Up >(2002)의 고된 노력이 무색할 정도다. 20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인고로 깎아낸 피터 가브리엘의 열 번째 정규작 < I/O >에는 73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들끓는 상상과 최상의 프로덕션을 향한 야망이 마구 붐빈다. 130곡이 넘는 장대한 후보군, 7곳의 스튜디오를 오가며 거듭 반복된 녹음 작업, 엔지니어를 따로 배정해 선택지를 마련한 두 장의 믹스, 천문학에서 영감을 얻어 달이 차오르는 보름마다 신곡을 공개한다는 기이한 발표 방식. 이 모든 도전이 한 장에 담겨 있다. 새삼 '완벽주의' 거장의 귀환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대작의 등장에 멈춰있던 역사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 So > 이후 38년 만에 다시 한번 밟은 영국 앨범 차트 정상의 자리다. 이는 커버나 리메이크 앨범이 아닌 오직 순수한 신곡으로 채워진 신보를 기다린 팬들의 염원과 1년 치 장기 프로젝트를 마침내 완수한 아티스트 본인의 의지가 빚어낸 결실이었을 테지만, 이 영광이 단순 공로를 인정하기 위해 마땅히 받았어야 할 경의적 위치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계급장을 도려내고도 세월의 흔적을 거치며 더 완숙해진 보컬과 농익은 선율 등 건재한 감각으로 거둔 성취다.
각기 색깔이 살아 숨 쉬는 수록곡은 다층적인 커리어를 집약한다. 의도적으로 보컬을 뒤로 배치해 벽 너머 절규가 들리는 듯한 첫 트랙 ‘Panopticom’에는 영화음악 제작에 착수할 시절 ‘Zaar’에서 선보인 작법이 도드라지고, 뒤이어 등장하는 ‘The court’에는 그의 정수와도 같은 월드뮤직의 통통 튀는 퍼커션과 주술적 분위기가 담긴다. 중반부 등장하는 ‘Ready to joy’에 도달하면 아예 토속적으로 조율된 뉴웨이브 풍 신시사이저가 흥겹게 넘실거린다. 비장미와 음울함이 공존하던 < Melt >와 댄서블한 선율이 가득한 < So >까지 아우르는 널찍한 스펙트럼이다.
호오를 가리는 건 무수히 남은 호기심의 흔적이다. 물론 비영리 단체나 사회적 이슈에서 영감을 가져와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던 방식은 주특기 수준으로 이미 수차례 선보인 바 있고, 평소 눈여겨본 사진작가나 설치 예술가, 디자이너의 작업물을 각 싱글 커버로 사용한 것은 시각적 즐길 거리로 넘길 수 있다. 하나 여기에 지구와 원소에 대한 상징을 아우르는 비유나 삶과 죽음 같은 철학적 양상에 대해 끊임없는 고뇌가 더해지니 세세한 메시지를 온전히 떠안기에는 다소 버거운 감이 생긴다. 트랙마다 거듭 바뀌는 주제는 소화가 되기 전에 다음 트랙으로 훌쩍 떠나야 하는 붕 뜬 이별을 안긴다.
그럼에도 앰비언트 음악의 선구자 브라이언 이노를 초빙해 세심하게 디자인한 소리의 정교함은 음반의 핵심이 된다. 불교 우화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Four kinds of horses’와 세계 평화를 주장하는 ‘Live and let live’ 사이로 은밀하게 꿈틀거리는 신시사이저의 움직임, ‘Olive tree’의 명료한 팝적 터치와 동시에 공간감이 자유자재로 뒤바뀌는 경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기용에 투자를 아끼지 않은 만큼 풍성한 사운드스케이프는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악기가 명징하게 분리되어 싱글 단위로 즐길 수 있는 밝은 면 디스크(Bright-Side Mix)와 전반적으로 무게감을 둔 뒤 합일된 감상을 자아내는 어두운 면 디스크(Dark-Side Mix)는 기호에 따라 마음대로 리스트를 재구축할 수 있는 기능마저 제공한다.
한 번이라도 세상을 바꿔본 자는 무모함의 위대함을 평생 품에 안고 간다. 오래도록 축적된 욕구를 압축, 실현한 < I/O >는 피터 가브리엘이 앞으로도 무너지지 않을 소신이 있다는 생생한 증거가 된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 증명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그리고 좋은 음악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결국 모두에게 도달하리라는 그런 일련의 믿음을.
- 수록곡 -
1. Panopticom
2. The court [추천]
3. Playing for time
4. I/O
5. Four kinds of horses [추천]
6. Road to joy [추천]
7. So much
8. Olive tree
9. Love can heal
10. This is home
11. And still
12. Live and let li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