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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N' Sweet
사브리나 카펜터(Sabrina Carpenter)
2024

by 한성현

2024.09.16

한때 가요계에서는 못 뜨는 가수들을 가리켜 '핵잠수함'이라는 수식어를 달곤 했다. 사브리나 카펜터만큼 이 말이 잘 어울리는 최근 사례도 없을 것이다. 16세 어린 나이에 데뷔했음을 감안해야겠지만 여태 발매한 다섯 장의 앨범 모두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한 채 10년 가까이 긴 인내의 시간을 보낸 그였다. 그러던 중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Drivers license'에서 당시 애인 조슈아 바셋을 빼앗은 이로 저격을 당해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테일러 스위프트의 'The Eras' 투어 오프닝 게스트로 서며 'Nonsense'와 'Feather'가 소소하게 인기를 끈 덕에 끊임없이 노만 젓던 그의 앞에 물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Z세대 팝스타 투기장 판을 키우고 싶은 언론, '오토플레이'로 일컬어지는 레이블의 전폭적인 스트리밍 마케팅에 힘입어 'Espresso'가 빌보드 싱글 차트 3위에 오른 데에 이어 'Please please please'가 정상을 찍었다. 영국 차트에서는 1위로 데뷔한 'Taste'를 필두로 1~3위 점령 기록까지 세운 상태. 채플 론(Chappell Roan)과 더불어 미국 내 최고의 핫한 신세대 가수로 등극한 사브리나 카펜터의 < Short N' Sweet >은 2020년대 여성 팝 뮤지션 음반의 전형을 보여준다.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확실한 싱글과 무던한 트랙으로 차린 판이다. 산미 강한 뉴 디스코 'Espresso'와 아바의 향기를 듬뿍 적신 'Please please please'를 빼면 어쿠스틱 기타로 엇비슷한 감성을 늘어놓은 대부분의 곡은 여름 드라이브 사운드트랙으로 사용 범위를 제한한다. 품질 관리 면에서 큰 결격 사유는 아니지만 'Taste'가 시동을 건 이후 후반부 코스로 향할수록 흐느낌이 크게 와닿지 않는 ‘Dumb & poetic’, 생뚱맞은 컨트리 사운드로 테일러 키즈임을 선포하는 ‘Slim pickins’ 등 지구력을 소진한 기색이 역력하다. 다다음 신호쯤 되었을 때 기억에 남을 만한 곡은 'Juno' 정도 외에는 찾기 힘들다.

사브리나 카펜터의 각성제는 자극적인 스토리텔링이다. '제발 나 망신 주지 말아달라'는 간청 끝에 'motherfucker'를 끼워 넣고('Please please please'), 젊은 임산부 영화 < 주노 > 한 편 찍자며 털 달린 분홍 수갑으로 놀자는('Juno') 식이다. 산뜻한 음색으로 발칙한 언어를 발사하고 있으니 밈(meme)에 죽고 사는 Z세대의 취향에 부합하지 않기가 더 어렵다. 간혹 너무 애쓴다 싶지만 차트를 정복한 비결도 이 끝을 모르는 발버둥 덕분 아니겠는가. 노력형 스타 이미지를 음악 내적으로도 입증한다.

배우 배리 키오건과의 로맨스, 드라마 < 웬즈데이 > 주연 제나 오르테가를 키스 상대로 초청해 < 죽어야 사는 여자 >를 패러디한 'Taste'의 뮤직비디오가 시사하듯 사브리나 카펜터는 가십과 퀴어 코드가 히트의 필수 요건이 된 현 세태를 반영하는 인물이다. 소셜 미디어는 자기 얘기를 하는 가수라고 찬사를 보내지만, 과거 비슷한 필체의 릴리 알렌이나 여타 경쟁상대를 고려했을 때도 연극적인 연애담에 몰두하는 그의 고당도 세계관은 긴 소비기한까지 담보하지는 않는다. 휙휙 바뀌는 팝 신에서 어렵게 쟁취한 스포트라이트를 물고 늘어지기 위해서는 부단히 뛰어야 할 일이다. 시대가 선택한 앨범을 만들었으니 이를 딛고 중심 인물로 거듭나는 것은 그 다음의 몫이다.

-수록곡-
1. Taste [추천]
2. Please please please [추천]
3. Good graces
4. Sharpest tool
5. Coincidence
6. Bad chem
7. Espresso [추천]
8. Dumb & poetic
9. Slim pickins
10. Juno [추천]
11. Lie to girls
12. Don’t smile
한성현(hansh9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