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첼라 페스티벌부터 시작된 올해 상반기 르세라핌의 악재는 충분히 호재가 될 수 있었다. 특정 불가능한 적에 대항하는 서사로 디스코그래피를 가꿔온 그룹이 마침내 분명한 형상을 갖춘 공격을 마주했으니까. 애석하게도 < Crazy >는 K팝 버전 테일러 스위프트의 < Reputation >이나 아리아나 그란데의 ‘Yes, and?’가 되는 대신 무응답을 택했다. 함부로 휘둘리지 않겠다는 식의 태연함이 아니라 기계식 공정에 따른 부득이한 외면이다.
전작 < Easy >의 오프너 ‘Good bones’에서 ‘Easy, crazy, hot, I can make it’을 외치며 일찌감치 이번 EP를 예고했으니 찰리 XCX의 < Brat >이 보인다는 지적은 근래 전자음악 신의 기조를 받아들인 결과물이라고 반박 가능하다. 실제로 중간의 참담한 랩만 넘어간다면 최신 퐁크(phonk) 사운드를 공수한 ‘Crazy’는 나름 재밌는 트랙이다.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의 후계자 격인 곡은 키치한 가사가 튀긴 하나 ‘Unforgiven’처럼 어수선하지 않고, 트렌드를 챙기되 < Easy >에서 유독 극심했던 지나친 레퍼런스의 그림자는 어느정도 벗어났다.
결함은 그들이 줄기차게 강조해 온 텍스트에서 발생한다. 열정을 불태우고 싶다면서 댄스플로어를 달구는 가사에는 차가운 현실에 더해 일부 억지 논란까지 마주했던 르세라핌의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다. 고난 인식을 누락하고 광기만을 막연히 요구하고 있어 마치 탄탄대로를 걸으리라는 가정하에 이미 춤을 시작한 분홍신을 힘겹게 쫓아가는 형국이다. 차라리 넋이라도 나간 듯 반려 강아지와 그릭 요거트를 논하는 인트로 ‘Chasing lightning’의 막무가내식 혼돈이 더 설득력 있겠다.
맥락을 떼어 놓고 본다 한들 별다른 매력이 있지도 않다.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를 샘플링해 한국 가요계 디바를 열거하는 ‘Pierrot’는 니키 미나즈의 ‘Roman holiday’ 같은 호러 코미디 분위기가 기껏 다시 끄집어낸 연대의 메시지를 덮어버리고, 넷플릭스 드라마 속 한 장면에 짧게 지나갈 만한 ‘1-800-hot-n-fun’은 K팝이 동경해 마지않는 서구 하이틴 파티 문화의 특색 없는 재생산일 뿐이다. 힘을 모으기도 모자를 타이밍에 각각 집단적 독백만을 내뱉고 있어 정서적 몰입마저 놓치고 만다.
마지막 곡에서 르세라핌은 열심히 ‘미치지 못하는 이유’를 찾으려 하지만 답은 사실 명쾌하다. 부지런히 1년 치 플랜을 짜고 송 캠프를 조직하는 산업에 실제 사건을 스토리텔링 요소로 편입할 여유 따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Crazy >는 ‘빨리빨리’에 미쳐 있는 탓에 현실을 살피기 어려운 K팝의 한계를 드러내는 앨범이다. 정말 ‘핫’하게 ‘해낼 수 있기’를 원한다면 지금처럼 멤버들을 총알받이 삼아 안일하게 밀고 나가서는 안 된다.
-수록곡-
1. Chasing lightning [추천]
2. Crazy [추천]
3. Pierrot
4. 1-800-hot-n-fun
5. 미치지 못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