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행길을 떠난 르세라핌의 모험이 선명한 이해득실을 안고 돌아왔다. 우선 첫 곡이 흐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끝나버린 앨범의 두께를 실감한다. 누군가에겐 음악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행인 점은 15분이 채 되지 않는 다섯 곡의 속전에도 가던 길을 멈추게 만드는 불필요한 요소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 < Crazy >의 허장성세가 만든 절실함 속 신중을 기한 선택이 그간의 한계를 비껴간 고무적인 형상이다.
물론 단점이 명확하다. 짧은 호흡에도 자연스러운 흐름을 위시해 안정감을 제공하지만, 그곳엔 정작 르세라핌이 없다. 언제나 그렇듯 다중 언어를 통해 시작을 알리는 인트로 격 트랙은 주제 전달의 몫을 잃고, 예상 범주 안에서 유영할 뿐 익숙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인상이 ‘Hot’까지 이어지니 초입의 상승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 오랜 시간 아이돌 시장에서 활용된 디스코 팝의 전형과 보니 앤 클라이드 이야기에 기댄 제재, 그 노랫말이 신선함을 마련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깨지지 않는 절개를 부르짖던 르세라핌이 “타오르는 사랑과 산화하는 열기”라는 하락과 분절의 정서로 애틋함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서두의 모호함을 이겨내고 빛을 뿜어낸 ‘Come over’와 ‘Ash’의 연계가 그 주인공이다. 앞선 곡은 지난 브릿 어워드에서 올해의 그룹상을 받은 영국 밴드 정글(Jungle)의 두 멤버와 함께한 트랙으로 그들의 싱글 ‘Back on 74’를 연상케 하며 르세라핌에게 새로운 색을 부여하는 동시에 허윤진이 작업에 참여한 ‘Ash’는 직설과 은유의 교차 속 노랫말의 미학을 부각하며 음반의 정점으로 기능한다.
< Hot >은 르세라핌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고집하다 보니 음악과 메시지 간의 경계에서 갈피를 놓쳤던 지난날을 의식한 결과에 가깝다. 그룹 특유의 농도를 낮추고, 고루 듣기 편한 대중적 색채를 유하게 펼쳐뒀으며 서사와 콘셉트에 집중하기보다는 확실한 키워드만을 골라 장황함을 줄였다. 도전으로 얻어낸 실익 또한 분명한 상태. 그만큼 이전보다 넓어진 선택지로 그동안 대중에 각인된 명암과 이미지 사이에서 어떤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을 지 배합과 양보라는 여전한 과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수록곡-
1. Born fire
2. Hot
3. Come over [추천]
4. Ash [추천]
5. So cynical (Bad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