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하나’로 압축된 박재범의 상징은 여전히 도전 정신과 음악이다. 이쯤에서 그의 행적을 훑어봐도 좋겠다. 아이돌의 알을 깨고 나와 힙합으로 백의종군한 후 독립적인 레이블을 차렸고 대표곡 'All I wanna do'가 수록된 작품으로 AOMG의, 한국 힙합과 알앤비의 번영을 꾀했다. 자신의 확장이 곧 문화의 확장이라는 신념 아래 오디션의 중추를 도맡아 후학 양성에 힘쓰고 무려 제이 지의 레이블 락 네이션(Roc Nation)에 입단해 바다 밖으로 발을 넓히기까지. 이번 신보 역시 K팝 엔터테인먼트부터 본토의 힙합까지 포괄하는 박재범 역사의 요약본이다.
연속성을 갖춘 제목과 많은 수록곡은 근면 성실한 창작자이자 업계 리더로서 그의 기개를 표상한다. 그러나 이 부담감이 도리어 그를 옭아맬 수도 있는 일이다. 이 시대에 간드러진 목소리만으로 20곡을 채우는 건 분명 어려운 과업이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승부처는 접근법이다. 작년 크러쉬가 비슷한 분량의 수작 < Wonderego >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흑인음악의 맛을 여러 층위에서 다듬어 보편적 이식에 성공했다면, 박재범은 K팝에서 힙합 신 중심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융합 전략으로 이 장기전을 타개한다.
선택과 집중이 특히 빛난다. 메인 테마인 끈적한 사랑으로 큰 줄기를 잡고 완숙한 보컬에 몰입할 수 있도록 곁가지를 예쁘게 친 것이다. < Everything You Wanted >가 표방한 ‘잘 만들어진 알앤비 팝’의 재현이다. 그는 차차 말론, 우기, 슬로 등 슬하의 작곡 진을 적극 활용해 완성도와 마감을 적정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랩은 ‘Foreign’ 등 일부 트랙에서만 선보이며 비중을 크게 줄였다. 랩과 가창, 프로듀싱, 퍼포먼스 모두 가능한 쿼드코어의 처리 속도가 빠르고 성능은 준수한 이유다.
동시에 이는 같은 소속사에 합류한 청하, 나띠, 닝닝 등 동시대성을 읽는 K팝 협업 결과물이 붕 뜨지 않도록 역할을 다한다. 아이유와의 듀엣 ‘Ganadara’부터 쌓아온 ‘Need to know’ 등 선공개 싱글은 스낵 콘텐츠에 가깝게 느껴졌지만 한 울타리 안에서는 제 자리를 잘 찾는 모양새다. 단발성으로는 짧고 흐릿할지언정 긴 호흡의 레이스에서는 적절한 페이스메이커로 기능한 덕분. 장르 음악과 K팝의 경계가 빠르게 흐려지는 흐름 속 외부 업계 소속도 단순 퍼포머가 아니라 가수로서 원천을 뽐내고 새로운 매력을 표출할 계기로 삼는다.
확장의 연결고리가 박재범의 핵심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의하나 워낙 운동장이 큰 탓에 몇몇 균열은 피할 수 없다. 타이 달라 사인이나 와이지(YG)의 참여로 쟁취한 본토 인증 마크, 그리고 후반부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심상을 차용한 ‘Your/my’나 진솔한 발라드 ‘Chapter’는 단순함과 가벼움의 힘에서는 다소 멀어진다. 분명 디스코그래피 확장 임무도 무난히 수행하면서 트랙 단위로도 준수한 곡들도 있으나 무리 속에서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뚜렷하게 해외를 지향한 전작 < The Road Less Traveled >에 함께 묶거나 싱글로 조명받았다면 어떨지.
결국 거물의 건재를 증명했는가, 그리고 이 긴 앨범의 스크롤을 끝까지 내리게 했는가. 첫 만남에 바로 떠오른 물음에 대한 답변은 긍정이다. 서투른 매무새를 허용치 않은 품격 있는 발걸음이 스무 차례로, 그 모양새는 각각 다르더라도 한국 알앤비의 현재와 분야별 교류 현황을 인식할 수 있는 뚜렷한 자국이 남았다. 2024년의 박재범만이 감독을 맡을 수 있는 기획작이다.
-수록곡-
1. Ohx3 (Feat. DUT2)
2. Taxi blurr (Feat. NATTY)
3. Mayday (Feat. Ty Dolla $ign)
4. Like I do (Jay Park Remix)
5. Gimme a minute (Feat. CHUNG HA) [추천]
6. Candy (Feat. Zion.T)
7. Ganadara (Feat. IU)
8. Dedicated 2 U [추천]
9. Need to know
10. Sip ona lil sum' (Feat. NINGNING) [추천]
11. Why
12. 100 days (Feat. YG & P-LO)
13. Foreign [추천]
14. Never again
15. Love is ugly (Feat. HWASA)
16. Recall [추천]
17. Chapter
18. Yesterday
19. Your/my
20. Piece of heaven (Feat. ISOL)